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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0. 2021

메타버스_가상현실_영화관 없는 영화를 상상하기


*콜리그에 투고한 일곱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78844





『컨버전스 컬쳐』의 13장에서 프랭크 로즈는 필립 K. 딕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허구의 우주라는 말을 꺼낸다. 이어서 그는 “허구의 우주는 그저 허구일 뿐이며, 상상의 공간이자 도피처에 불과하다.”고 적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과거의 영화관이 이렇게 여겨졌던 것 같다. 영화가 비교적 새로운 매체로 여겨졌던 영화사의 초창기에 그것은 일종의 꿈처럼 여겨졌고, 이를 두고서 관객을 몰지각하게 만든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가상현실이 발달하여 네트워크 개념이 본격적으로 일상화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영화는 이전 세대의 매체로 밀려나 버렸고 이에 따라 ‘꿈’이라는 개념도 영화는 새로운 매체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꿈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꿈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현실에서 보지 못한 건 꿈에서도 등장할 수 없다는 연구사례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호소다 마모루가 맡은 <디지몬 어드벤쳐: 우리들의 워 게임>(2000)이나 <썸머워즈>(2009)를 떠올려볼 수 있다. 두 작품은 가상현실의 생명체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이로 인해 현실 세계의 주인공들이 가상현실로 탐험을 나간다는 플롯 상의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가상현실을 그려냈다는 점에 있지 않은데,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은 그들 자신의 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쉽게 말해 가상현실은 현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워게임>과 <썸머워즈> 모두 현실을 구하기 위해 가상현실로 침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이는 워쇼스키가 <매트릭스>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스필버그의 말처럼 “진짜는 현실에 있으며, 우리가 구하려는 건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가상현실’이라는 단어에서는 그것이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오늘날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기반한 가상현실 공동체를 지시하는 게 되었다. 기업이나 단체의 회원들은 메타버스를 통해 그들 집단의 구성원들을 처음으로 대면하며, 이는 단순히 보여주기식의 소통이 아니라 정말로 이들 집단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그러한 가상현실이 그들 자신의 ‘현실’에 기반을 두기에 가능하다. 이들이 회사에 출근하는 건 현실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라는 공간도 그렇다. 메타버스는 현실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현실이라는 공간을 대신할 가상의 공간을 선택해 만들어낸 결과물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메타버스는 현실의 보완재가 될 수는 있어도 완전한 대체제가 될 수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영화관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영화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현실이라면, 영화로 향하는 문은 어떤 방법으로든 열려있기 마련이다.



두 작품에서 가상현실은 그들이 현실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의례적 공간으로 치부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신화적인 장소로 기능하기도 한다. 현실성과 허구성이라는 두 가지 당위가 한데 어울려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들의 최종목표는 가상현실을 구원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현실도 구원하는 일이다. 물론 이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진행 방식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의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가상현실을 ‘허구’라고 여기는 암묵적인 풍조이다. 그들은 가상현실을 어떠한 ‘꿈’처럼 여기지만, 이 경우에 가상현실은 현실로 돌아왔을 때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가상현실을 두고 현실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비규범적인 공간으로 여기게 되며, 이때 가상현실은 사용자가 현실에 돌아왔을 때도 그곳에서 체화한 나쁜 규범을 계속 이행할 수 있게 하는 ‘나쁜’ 곳으로 이해된다. 즉, 가상현실이 일종의 일탈이라는 맥락으로 이해됨으로써 현실 세계에서의 도피처, 또는 망명지로 치부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가상현실의 지위는 영화관에 방문해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일종의 일탈이자 도피처이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아무런 기능 없이 사라져버리기만 하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관 없이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에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러한 장소성 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영화는 넷플릭스나 유튜브가 제공하는 동시다발적인 UI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플랫폼에서 영화는 한 번에 하나만 상영되는 게 아니라, 동시다발적인 형태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도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삶에 접속되어 있다. 이러한 전제는 우리가 가상현실을 다루면서도 어떻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세 개의 작품 모두에서 가상현실은 현실을 구할 요령으로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이는 가상현실이 현실에 그만큼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가상현실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날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최초에 등장했던 방향과는 달리 지금 이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평행우주의 개념을 더 잘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는 나로 존재하면서도 온라인상에서는 트위터 유저 A로 양립하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마치 순간이동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찰나에 가까운 수준으로 빠르게 가속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비릴리오의 말처럼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어느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임으로써 우리가 서로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즉시성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찰나에 불과한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상대방과의 만남과 그를 파악하는 일이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이때 우리는 상대방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고서 그를 다 파악했다고 여기며 또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린다.



비대면 시대는 만남의 용이도를 높여주었지만 이해의 깊이를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우리가 사는 곳은 언제나 현실이었는데 가상현실이란 그런 현실과 줄곧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우리는 이미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현실과 늘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끼면서 가상현실을 이 상황을 돌파할 하나의 방법으로 삼는다. 현실에서 멀어지는 게 가상현실인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가상현실은 언제나 현실을 기반으로 작동한다고 말했던 위의 발언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가상현실을 통해 서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사실, 우리가 너무 현실과 연결되어 있기에 잠시나마 가상현실에서 숨을 돌리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가상현실이란 언제 어디서든 상대와 만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로나 현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게 아닐까. 이런 제안은 가상현실이라는 말을 도피처가 아니라 대피소라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즉 우리는 가상의 현실에 빠져드는 이들을 현실을 포기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그런 우려가 생겨날 수는 있다. 여러 다른 현실에 공존하면 정작 그 모든 일을 통솔하는 하나의 나는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위해 우리는 현실 기반 공동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에리카 발솜은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언급하면서 영화관과 영화 사이의 관계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온라인상의 모금 활동이 어디까지나 그들의 현실을 위해 꾸린 공동체이듯이, 온라인으로 영화를 보는 일은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의 현실에 기반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쉬운 풀이법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일반의지 2.0』에서 제안한 소통 없는 소통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가 트위터를 예시로 들며 주장하는 이 개념은 그가 오타쿠 문화에서 줄곧 지적해온 동물이라는 개념을 인터넷 공간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산물인 오타쿠라는 동물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서로와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반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를 위해 문화적 코드라는 사회적 계약을 성립시켜 그러한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자면 오타쿠라는 인간상은 자기만의 집을 짓고 그 안에 틀어박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성향이 마냥 폐쇄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그러한 문화적 코드는 현실을 외면한 결과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현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하나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타쿠라는 인간상은 현실에서 패배하여 가상의 현실로 도피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 후퇴함으로써 다시금 현실로 돌아올 용기를 얻는 가련한 동물일 뿐이다. 이들이 두려워한 건,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이 무너졌을 때 찾아올 미래였다.



이어서 프랭크 커머드는 말한다. 현대인이 느끼는 공포는 살아가는 현실의 붕괴가 아니라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한 상태에 관한 것이라고. “사람은 공허한 시간의 흐름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을 종식시킬 것으로 기대하는 사건이 늦어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1] 커머드의 이 지적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게 변함없는 일상이 아니라 와야 할 것이 오지 않은 기다림의 상태라고 말한다. 즉, 발전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자신의 멋진 모습을 언제 만나볼 수 있을지가 불확실하기에 불안한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논의들과는 달리 우리의 미래가 확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또 그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앞으로 우리가 겪을 일이 확정되었다면 우리는 그게 언제 현실이 될지를 매번 고민하고 또 생각하게 될 테다. 그러면서 그러한 미래로 나아가는 여러 경우의 수를 줄곧 생각하고 또 계획해볼 테다. 말하자면 이는 옛 신화들에서 묘사되는 신탁의 역할과도 같다. 신탁이 내려진 이상 그게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점은 분명하고, 이는 예언의 당사자를 미치게 한다. 당사자는 정해진 미래에서 벗어나 보려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미래는 유예되기만 할 뿐 취소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영화가 처한 상황이 이와 유사하다.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은 언젠가는 겪게 될 현실이면서도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줄곧 유예된다. 필사적으로 저항해보려 한들 거쳐갈 수밖에 없는 미래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또 두렵게 한다.



그렇다면 이 신탁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바꾸어 말해,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 다음에는 영화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죽으면 다 끝인 걸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이 점이 영화와 우리 사이의 공통점이다. 이에 앞서,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어떤 면을 지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히로키의 말처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영화 관람이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며, 이를 통해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관객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한 편의 영화가 지닌 프레임이 영화적 디제시스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마땅히 분리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객은 영화가 의도하는 바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아예 그런 프레임을 해체하여 자기만의 것으로 체화하기도 한다. 이전 시대의 영화 이론에 따른다면 영화란 분명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날 영화 속 세계는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으며,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의미하는 건 바로 ‘연결’이다. 과거에 우리가 영화 속 세계에 직접 몰입하는 형태로 영화를 관람했다면, 오늘날에 우리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여러 다른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고 또 추론한다. 우리는 하나의 현실에서 여러 다른 가상의 현실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을 수 있고, 이는 ‘한 명’의 나로서의 관객이 죽었다는 말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제 영화관이라는 장소만으로 설명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과 늘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취한다. 마치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살아가는 현실에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 때 문이듯이, 우리가 영화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영화가 너무나 우리 삶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의 삶에서 나라는 존재는 경계를 잃고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그래서 영화가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 유예된 미래 쪽을 더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막연하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미 영화와 연결된 삶 안에서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 아니라 힘을 합쳐 우리 모두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다. 영화의 죽음으로 인해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영화 주인공으로서의 ‘나’가 생겨난다. 오늘날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도피처가 아니라 대피소로 이해되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객은 단순히 영화 안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그런 영화를 살아가는 행위 주체이기에, 영화 속 세계와 함께 몰락하지 않는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나면 영화 속 세계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안으로 후퇴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 여기서 굳건히 자리하며 이곳에서는 더는 후퇴하는 게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이며, 이런 상황에서 영화로 도피하는 일은 지양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현실과 늘 연결되어 있다는 공허한 느낌이 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를 실천하려면 현재의 자신이 달라져야 하고 또 그때까지 자신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무기력함이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런 미래에 접근하는 경우의 수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보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나 자신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기본 전제는 우리가 현실에 계속해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다른 곳에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더 굳건히 할 수 있다. 비대면의 시대에서 우리는 가상현실로 잠시 대피하여 이곳에서 사람들과 현실의 문제를 토론하고, 또 해결책을 마련해 다시금 우리 각자의 현실로 내려온다. 예컨대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영화관이라는 말이 유명 무색해진 이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건 그 무엇보다 현실적인 행위인 게 아닐까? 우리는 여러 다른 영화와 동시에 연결됨으로써 오히려 그런 영화들을 더 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영화를 보는 일은 오타쿠들이 집에 틀어박혀 세상을 등지는 일에 빗대어지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영화 오타쿠라 할 수 있는 시네필들은 하나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이들과 토론함으로써 하나의 영화 세계로 연결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는 잡설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서도 따듯한 인간애를 느낀다거나, 영화관 없이도 영화에 몰입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더는 도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런 생각은 바뀔 것이다. 비대면의 시대에서 결핍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이러한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프랑수아 트뢰포와 같은 과거의 시네필들은 영화관에 가는 일을 하나의 일탈이자 도피처럼 느꼈다고 한다. 영화관에 가면, 불이 꺼지고 스크린 안의 이야기만이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영화 이외의 모든 현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영화관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는 게 가능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단순한 도피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영화관이라는 말이 장소가 아니라 영화에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고, 이는 영화관이 제공하는 어둡고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영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정하는 행위 주체로서의 관객이 있는 덕택이다. 즉, 우리는 그러한 가상현실에 전적으로 끌려가지 않고서 우리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이곳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가올 비극을 대비해 뭉쳐있기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쪼개지고 나눠지지만, 이런 상황이 근본적인 분열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미래가 확정된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생존 방법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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