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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2. 2021

영화와 인간의 속도는 상대적이다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는 큰 틀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과 관계있습니다. 이야기하기에 앞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재고해보고자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런 문제는 리오타르의 말로써 잘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상황을 포스트모던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거대서사의 붕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거대서사라는 건, 간단히 말해 하나의 구심점입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적 구조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포스트모던, 이라는 말만 들어선 왠지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쪽입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 말이죠. 이를테면 우리의 삶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데, 죽고 나면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므로 살아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오늘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마땅히 정해진 바가 없다면, 과연 무엇을 토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영화와 같은 콘텐츠에서 이러한 변화는, 내러티브의 해체라는 드라마틱한 성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야기 개념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전통적으로 이야기란 일종의 연대기, 그러니까 시간을 횡단하여 사건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나열하는 게 바로 이야기였고, 이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는 게 바로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주인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기보다는, 모두가 이입할 만한 설정을 하나씩 집어넣음으로써 인물과 독자 간의 관계를 설립시키는 것에 주력합니다. 이를 통해 단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들 모두의 이야기가 성립하게 됩니다. 독자들마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서, 이야기는 하나더라도 이를 따라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아즈마 히로키가 말했던 ‘데이터베이스 소비’라는 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대상의 ‘부분적 소비’를 뜻하는데,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좋아할 수 있고, 심지어는 이런 부분들의 조합만을 선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타쿠 문화에서 ‘모에’라 불리는 이 소비 현상은 어떠한 완결성을 띠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작품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부분적 대상만을 소비할 수 있습니다. 해당 캐릭터의 모두를 좋아할 필요는 없고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모에’ 포인트만 점찍어서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자면 작품 전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특정 캐릭터만을 좋아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즉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게 주인공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독자에게 주인공이라는 말은 그냥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캐릭터에 더 가깝습니다. 내러티브를 누가 끌어가든 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인공이 되는 셈이죠. 제작사도 이를 잘 알기에, 독자들 모두가 이입할 만한 캐릭터보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첨가한 캐릭터 하나씩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두려 합니다. 하나의 주인공에 열 명의 독자를 끌어들이는 일보다는, 열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열 명의 독자를 포섭하는 일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오타쿠들은 누가 ‘주인공’인지를 두고 경연을 벌이게 됩니다. 


눈치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인공 하나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합의점을 찾기가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취향이 다들 가지각색인데 하나로 타협할 수는 없겠죠. 예컨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거대서사는 없는 셈입니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말은 결론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개인의 등장이 거대서사의 붕괴를 견인했을 수도 있지만, 거대서사의 붕괴로 인해 사람들이 개인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개인이라는 말이 근대 이후로 등장했으므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의 기원은 꽤나 오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독자’라는 개념은 대중문학이 발달하는 17세기 무렵에 등장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현상이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를 지적하는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우리가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가 그에 대한 독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읽는다’는 것과 ‘소비한다’라는 말의 뉘앙스는 꽤 다르다는 것이죠.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들을 때, 그 뒤에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지를 따져 묻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은 그냥 재밌고 그래서 손이 가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대중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선호하는지를 미리 계산해서 만들곤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소비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소비는 심층 없는 표면적 이미지를 두고서 이루어집니다. 이쯤에서 소개하고 싶은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한창 인기를 끌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코난 도일은 어떤 이유로 홈즈를 죽이고 소설을 완결 내려 했는데, 독자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혀 이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들에게 홈즈의 소설은 추리 장르라기보다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의 원맨쇼에 가까웠습니다. 즉, 이들이 사랑한 건 소설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셜록 홈즈라는 대상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영화에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이었습니다. 여러 작품을 횡단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주인공이 바로 배우였던 것이죠. 


관객들은 스타 배우를 보면서 자기 내면에 자리한 욕망을 하나둘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스타란 선망의 대상이었고, 비평가들은 이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어냈습니다. 그러나 차츰 스타는 이미지 소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이 마를린 먼로를 두고서 비평한 사례에서도 잘 수 있듯, 스타의 이미지는 하나의 공산품이 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보편타당한 문화가 되었습니다. 대중은 특정 스타의 팬덤에 소속됨으로써 ‘스타’라는 하나의 내러티브 안에 뛰어들었지만, 반대로 그들 각자의 이야기가 스타와 관계 맺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미디어에 비치는 스타의 표면적인 모습만을 알았기에 스타를 생각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스타의 심층적인 면까지 알았더라면 스타에 느끼는 감정은 다들 비슷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은 스타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는 현상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대상에 대한 몰이해가 오히려 세계와 연결되는 한 가지 방법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마를린 먼로의 공산품화란, 바꾸어 말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마를린 먼로’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분명 먼로는 섹시 심볼이었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먼로라는 개인으로만 설명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먼로는 섹시 심볼에 접속하게 해주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고 이는 ‘마를린 먼로’라는 거대서사의 붕괴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를린 먼로는 위에서 말한 것 중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먼로의 팬이 먼로를 몰개성화했는지, 아니면 먼로의 몰개성화가 먼로의 팬을 만들어냈는지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전자가 맞겠지만 오늘날에는 후자,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먼로는 모두의 심볼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의 것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먼로의 사례는 거대서사의 붕괴가 개인화를 가속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해 이는, 마를린 먼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개인이 참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그 이야기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바꾸어 말해,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보편타당한 취향의 붕괴입니다. 거대서사의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각자마다 선호하는 취향이 하나쯤 생겨났다는 것은 ‘절대’라는 말의 기준을 훼손합니다. 절대적인 건 없고 상대적인 게 더 도드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상대’라는 말은 오늘에 다양한 면으로 발견되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이 상대적임을 우리에게 말해주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상식이 되었지만, 그때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의 시간만이 존재했던 게 바로 중세였는데,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옴으로써 근대로 이행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이라는 말이 부상하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도 본격적으로 파편화됩니다. 위의 셜록 홈즈 사례는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었던 것이죠. 포스트모던 시네마가 속도에 집착했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속도가 상대적이라는 말은 영화가 하나의 절대적 시간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여기서는 포스트 시네마의 대부인 장 뤽 고다르의 발언 하나를 인용해보고 싶습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시작과 끝이란 게 분명 존재하지만 그 배치가 꼭 순서대로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 자체로도 상징적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아즈마 히로키의 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는 부분적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우리가 보는 영화란 그런 취향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영화 관람 문화에서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그건 바로 ‘멈춤’입니다. 갑자기 ‘멈춘다’고 말하면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오늘날의 영화는 멈춥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화면을 멈춰놓을 수 있고, 그 사이에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다른 일을 보거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데, 위에서 말한 속도의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두고서 멈추라고 말했을 때 영화는 멈춥니다. 이 명령은 영화에 있어 절대적이고 또 바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신이 영화를 ‘지배’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를 멈춘다는 건 우리가 영화의 시간에 대해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즉,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절대적 시간만을 받아들였던 우리가 이제는 그러한 절대성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마치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에 나오는 악당 DIO처럼 말입니다. 이 만화에서 DIO는 “시간이 멈춘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멈춰버리는 편리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적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 만화의 DIO처럼 우리는 영화가 주는 정보량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잠시 후퇴하고서 이게 무슨 내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을 보고자 멈출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쇼트의 구성이나 미장센을 알아보고자 잠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멈춤’의 행위에 제한 시간이 있다는 점도 그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던 중 시간을 멈췄을 때, 이것은 다시금 영화로 돌아와야 함을 전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본다는 일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 쉬는 것과 영화를 보던 중에 쉬는 것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과 끝이 한자리에 있는 매체이기에, 한번 틀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그것을 마무리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시간을 멈추는 일은 어디까지나 대피이지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대서사의 붕괴라는 말은 그런 거대서사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거대서사의 붕괴로 인해 시작된 게 모에라는 현상이라면 아무런 조합의 행위 없이는 캐릭터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걸 마무리하지 않고 도망가버린다면 캐릭터는 미완의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취향인지를 모른 채 남들 의견에 휩쓸려 다니기만 할 테고,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무언가를 머릿속에서 기억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줄곧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잘 모르는 것을 계속 찾아다니는 일도 어떻게 보면 시간 낭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언가를 잊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리오타르가 말하는 ‘거대서사의 붕괴’란, 우리가 어디에 몸담을 것인지를 잘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일본의 로닌이라던가 미국의 총잡이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인물들에겐 집이 없고 목적지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마땅히 소속된 곳 없이 혼자 행동하는데 필요할 때는 어딘가에 소속되기도 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지요. <요짐보>는 무명의 로닌이 마을에 와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세력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둘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고 고통받는 중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짐보가 왜 사람들을 구해주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일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영화 안에서는 그냥 마을 사람들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동한 것으로 묘사됩니다만, 현실적으로 이게 쉬운 일은 아니죠. 오히려 칼을 쓰지 않기로 한 인물이 잠시 칼을 쓰는 것을 허락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칼을 쓰지 않기로 한 인물이 칼을 빼 든다는 것. 확실히 일탈이라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역시나 칼을 빼 들게 된 계기이겠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일탈의 행위가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는 행위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지적해야 할 사항은 무엇일까요. ‘잠시’라는 점일 겁니다. 어떤 이유로 자리를 떠나든 간에 우리가 다시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삶을 살아가든 영화를 보든 간에 우리가 잠시 휴식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일탈은 다시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일탈이라던가 방황이라던가하는 말로써 이해하기 쉬운 요짐보의 사례는, ‘삶이란 끝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에 더 가깝습니다. 과거에는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게 우리의 공통된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그 고민에 완주 지점이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거대서사의 붕괴가 이루어진 시대란 우리가 완주해야 할 하나의 큰 목표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무엇이기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전문화된 기술, 자기만의 이야기를 요구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은 하나의 가치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취업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잘한다는 단순한 말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엑셀, 워드, 국가자격시험, 영어시험, 인간관계와 같은 다양한 것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가치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전 시대처럼 하나의 공산품으로 규격화되었던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수치화하고 규격화해서, 테스트에 통과하면 취하고 그러지 않으면 버리는 때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에’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자신을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회에 여러 형태로 동시에 존재합니다. 


기존에도 개인이 지닌 여러 인격을 설명하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건 동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집과 학교, 직장의 분리가 확실했고 공간에 따라 인격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로의 가속은 집과 학교, 직장의 경계를 허물었고 우리는 여러 장소에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비대면 사회에서는 ZOOM으로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에 잠시 밥을 챙겨 먹는 일이 가능합니다. 혹은 집에서 원격근무를 하다가 고양이 밥을 주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때 우리의 인격이 한자리에 공존하는 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일도 벌어지곤 합니다. 방 안에서 원격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가족이 불쑥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순간 당신은 학생에서 가족 구성원으로 전환되어 버립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정체성이 바뀌어버리는 것이죠. 이러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공간이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했다면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해보건대 영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이 그것이 영화임을 보증했지만, 오늘날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 영화는 거의 모든 장소에서 볼 수 있고 또 그래서 단지 하나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공간의 붕괴가 영화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졌고, 정체성의 붕괴는 다시금 거대서사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긴 해도 그 안을 어떻게 따라가는지에 따라 별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화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속속들이 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런 이야기들이 각자 공존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했고, 그래서 시네필들에겐 이런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흩어지는 만큼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줄 공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만큼, 하나로 이어줄 공간보다는 무엇이 더 자신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영화를 보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자기 PR이 중요해진 것이죠.


쉽게 말해 이런 표현이 가능합니다. 과거에는 내가 영화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늘날에는 영화를 통해 설명받으려 하는 내가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 오타쿠들에겐 영화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모에’ 포인트가 있었지만 오늘날엔 상황이 바뀌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가 자신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영화 추천 서비스의 분류표인 #슬픈#감동적인#실화기반, 과 같은 문구가 자신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여겨지길 바랍니다. 예컨대 이들은 영화가 아니라 그런 영화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영화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자신에 대한 분류를 세분화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우리는 소비사회의 특징을 두고서 실물 가치가 아니라 이미지 가치를 추종하는 것으로 말했는데, 정확히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시대는 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도 그런 식으로 전도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나를 설명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영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 의해 자신이 설명되는 순간, 우리는 영화 같은 삶만을 살게 될 뿐 진정으로 영화가 될 수는 없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영화를 설명하려면 잠시 영화의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려면 잠시 삶 밖으로 빠져나올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영화에 내내 푹 빠져만 살다가는 영화에 대한 지식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단순히 시간을 멈춰 화면을 헤집어 보는 것만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지는 않으며, 중요한 것은 탐험입니다. 물론 영화를 보기 위해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을 배움으로써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를 미리 알면 대화에 웃음꽃이 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를 잠시 멈추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일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영화를 멈출 수 있게 된 것은 영화에 더 잘 다가서기 위함입니다. 


밖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은 후에 다시금 영화로 돌아오면,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여러 디테일한 면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영화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에도 어딘가 희망찬 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잃게 된 건, 안정적인 삶의 위치입니다.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쇠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얻게 된 것은 우리의 삶에 더 잘 공명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거대서사가 붕괴한 자리에 선 영화는 개인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가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진 시점에서 영화는 우리가 시간을 잠시 멈추고, 그 안을 탐험해야 하는 하나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화는 하나의 영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소통과 담론 생성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영화는 과거처럼 하나의 이야기만 교조적으로 전달하지 않습니다. 거대서사가 붕괴한 자리에서 영화를 설명할 방법은 모호해졌지만, 오히려 이 점이 바로 영화와 우리 사이를 하나의 세계로 연결해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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