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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6. 2021

선을 넘는 세계: <오겜>과 <기생충>의 동물적 상황




<오징어 게임>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흥행한 작품이다. 이러한 성공은 작년에 있던 <기생충>의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렇게 보면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이 작품들이 문화적 코드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기생충>에서의 반지하나 <오징어 게임>에서의 신파는 다분히 ‘한국적’인 요소이지만, 해외의 모두가 이에 공감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이 뭔지도 모를 거다. 오히려 빈곤이나 가난, 경쟁이나 게임과 같은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건 세계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상이니 말이다. 대표적인 것은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에서의 선의 역할이다. <기생충>은 ‘선을 넘어서’ 사건이 발생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선을 넘지 말아야 비로소 사건이 성립한다. 전자를 먼저 말해보자. <기생충>에서 이 선은 계급 간의 위치를 구분하는 것에 사용되었는데, 이 영화의 핵심 트릭은 그러한 선이 세계에 유지되는 상황에서 인물의 위치 이동을 통한 선의 횡단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인물은 선을 넘어가고, 이에 따라 사건이 발생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기생충>에서의 선이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선을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원근법처럼, <기생충>은 선을 설정함으로써 평면적인 상황을 입체적인 것으로 바꾼다. <기생충>의 포스터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눈에 검은 마스킹처리가 되어 있는데, 이런 모습조차도 영화에서 ‘선’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인물의 눈을 마스킹처리함으로써,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들의 뒤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평면적인 상황이 보다 입체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는 셈이다. 이 영화에서 사건도 그런 쪽으로 변화한다. 이선균이 송강호에게 ‘선을 넘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은 그들이 넘어가게 될 선이 가시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넘어갈 일도 없었으며,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오징어 게임>은 처음부터 하나의 사건을 전제로 시작한다. 작품이 시작하면 이미 각자가 겪은 사건이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즉, 여기서 사건은 입체적 무대를 위한 평면적 배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무대에는 외관으로 각자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건달, 외국인노동자, 광인, 화이트칼라 등.



우리는 암묵적인 선을 가지고서 그들을 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편견’이다. 겉으로만 판단한다는 점에서 선입견이라는 표현도 옳다. 이때 누구나 편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상대방과 갈등을 빚게 된다는 걸 떠올려보자. 즉 편견은 어디까지나 선 안쪽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이미 겉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생충>과는 정반대다: <오징어 게임>은 가시화된 선을 넘지 않는 게 바로 ‘무탈’해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라마의 후반부에 쌍문동의 자랑 조상우(박해수)가 성기훈(이정재)에게 “오지랖은 쓸데없이 넓다.”고 말할 때, 이는 작품 내내 꼽주던 기훈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응수한 것이다. 다른 한편 작품 안에서 이런 식의 관계 설정은 계속 나오는데, 상우가 외국인 노동자 알리(아누팜 트리파티)를 도와주면서도 은근히 선을 가르는 일이 그렇다. 즉, 자기 선 안으로 다른 사람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인생을 ‘무탈’하게 살고 싶은 듯 보인다. 남들이 어떻든 간에 나만 잘 살면 되는 게 이 사회이니 말이다. 상우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괜히 오지랖 부렸다가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듯 보인다.



어쨌거나 상우는 자존심이 센 인물이고 그럴만한 배경도 있었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알리를 자기 세계의 안쪽에 들여놓지 않음으로써 그를 탈락시키는 결과를 제공한다. 그러나 결론이 어떠했는가? 오일남이 말하듯, 성기훈은 이런 선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기에 그 무엇보다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늘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철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보면 이런 점이 다른 사람에게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자신의 선 안으로 사람들을 들여놓는 것, 이렇게 지켜지지 않는 선 안에서 불확실한 감정과 미래를 추구하는 점 말이다. 이 때문에 성기훈은 가장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최후의 1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오일남이 말하는 ‘깐부’의 가치는 “네것내것” 없는 근대적 공동체의 모습에 있기도 하다. 깍두기라던가 하는 건 게임의 승패와 관계없이 그냥 ‘모두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원초적인 형태의 관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그냥’이라는 말은 성기훈이 다른 이들을 도울 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는 건 직접 해보는 것만 못하다.”는 오일남의 말처럼, 이 ‘그냥’은 선 안쪽에 있다.



성기훈은 선을 넘지 않고서 그 안의 공동체적 가치를 줄곧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었다. 성기훈은 다른 인물과는 달리 게임에 임할 때 별도의 전략 같은 걸 세우지 않았고, 그는 ‘게임’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오일남이 말하는 ‘동심’이라는 것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심은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 자기만의 감정이다. 즉, 어른이 아니라 아이의 감정이고 이는 보다 원초적인 것에 가깝다. 그렇게 보면 줄곧 경마에 빠져있는 성기훈의 모습은 ‘게임’, ‘재밌으니까.”라는 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아마도 이는 <오징어 게임>에서 그가 정 많은 참가자가 된 이유였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성기훈의 이 태도가 ‘잴 거 다 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우승 포인트가 되었다는 점이다. 성기훈의 쌍문동 친구가 말하듯, 그는 너무 착해 빠졌고 그래서 쉽게 죽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형상화한 이 게임에서는, 서로 지킬 건 지키자는 개인주의 마인드가 팽배해있다. 즉 이들은 각자 훌라후프와도 같은 선을 정했으며, 이걸 넘어오면 물어뜯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택하고, 그렇지 않은 건 철저히 분리 수거해버렸다.



하지만 이런 식의 관계 설정은 자칫하면 서로 간의 선이 닿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경우, 양자의 선은 마치 AT 필드처럼 작용해 자아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무너뜨려 버리는 비극을 자아낸다. 그러나 성기훈은 철저히 자기만의 선을 유지했고,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선 안에 동료를 들여놓으려 했고, 이런 태도는 네것도 내것도 없는 깐부였다. 그래서인지 이는 모든 마음이 허물어져 모두가 하나가 된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데, <에반게리온>이 잘 묘사했듯이 이런 건 결국 자폐적인 태도로 귀결되어 버린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이 이상한 건 이런 자폐적이고 동물적인 태도를 게임에서 승리하는 하나의 관점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기에 천진난만한 철부지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오징어 게임과 같은 옛 추억에 더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가라타니 고진의 언급을 빌려 오고 싶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아메리카적 생활양식’ (…) 코제브에 따르면 그것은 (…) ‘세계나 자기를 이해한다’는 사변적인 필요성이 없는 ‘동물적’인 사회입니다. (…) 그것은 오히려 타인의 욕망밖에 없는 인간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1]



고진은 동물적 상황이 사실은 그 무엇보다 인간적 상황임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근거로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게 바로 인간의 본능임을 들고 있다. 이에 따르자면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의 동심이 보여주는 건, 자신이 바라는 인간상에 대한 욕망이지 본성이 선하기 때문은 아니다. 성기훈이 선을 넘지 않았던 건 그가 모토로 삼은 세계에 의해 본인이 감시당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의 시선은 내부적으로 설정한 선에 거울처럼 반사됐던 게 아닐까. 그의 이런 마음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태도를 비준하는 일, 즉 칸트적인 숭고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성기훈은 꽤 공허한 사람이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으니 말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욕망이 있었던 것과는 차별화되는 부분이며, 오일남이 성기훈에 끌린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돈이 너무 많아서 인생이 공허해졌다는 사람에게, 그 자체로 텅 비어있는 인간이라는 게 일종의 ‘동류’ 의식을 느끼게 해준 것은 아닐까. 오일남이 이루어 놓은 세계 안에서는 모든 선이라는 게 무화되는 반면(오징어 게임의 잔혹함), 성기훈이 이루어 놓은 세계 안에서도 모든 선은 무기력해진다(살아가는 것의 루즈함).



결과적으로 성기훈에게 선을 넘는다는 행위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기생충>에서 선을 넘는 행위가 사회 안에서의 자기 ‘지위’를 잃어버리는 일이었던 것과는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첫 번째로는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게 바로 주인공이라는 말의 상실을 뜻한다는 점이다. 세계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이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나’는 세계 전체에 곧바로 대응되어 버린다. 이때 ‘나’라는 건 그냥 [세계]가 되어버리며, 여기에는 우리가 아는 여러 관념이 대입되기 쉽다. 즉, 주인공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그 세계 안을 탐험하는 게 쉬워진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을 갖고 탐험에 나서는데, <기생충>은 계급 상승이라는 사회 안에서의 보편적인 욕구를 하나의 마음으로 묘사한다. 예컨대 <기생충>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을 스크린 위로 양각화한다면(입체), <오징어 게임>은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를 다시 보게 한다. 구태여 연결 지어보자면, 넷플릭스의 열린 세계와 영화관이라는 닫힌 세계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건 아닐까. <오징어 게임>이 오픈 월드 게임이라면, <기생충>은 스테이지 위주로 진행되는 게임이라고 말이다.







[1]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조영일 역, (서울: 도서출판 b, 2005)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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