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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30. 2021

우리는 '배틀로얄'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게 하나 있다. 하나의 생각을 다른 맥락에 적용해보는 일이다. 그리고 이건 글을 쓰는 일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오늘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병헌 평론가가 ‘배틀로얄’ 장르에 대해 쓴 글을 내 생각대로 변형한 것이다. 특히 다음 문장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경쟁사회에 밀려 달아나 봤자 답이 없고 끝내 돌아와 부딪혀야 한다는 것은 최근 넷플릭스로 공개된 또 다른 한국영화 <사냥의 시간>에서도 확인되는 메시지이다." 그가 이 문장에서 잘 지적하듯이, 근래의 사회와 배틀로얄 장르에는 ‘반향성’이라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한 건 전자가 아닐까 한다. 배틀로얄 장르에서 반향성이 현실 세계에서 궁지에 몰린 인물의 상황으로 인해 정당성을 얻는 데 반해, 근래의 사회에 모종의 ‘반향성’이 있다고 말하는 건 가장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향성이란 무엇인가. 음파나 빛이 직진하여 나아가다가 무언가에 반사되어 궤도가 안쪽으로 회절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즉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첫 번째는 대상이 다시금 안쪽으로 돌아오는 일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돌아오는 대상이 좀 더 번져 보이는 일이다. 예컨대 반향성이란 우리가 던진 공이 커다란 파문으로 우리 삶에 닥쳐오는 일과도 같다.


그래서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 벌어진다고 말했을 때는 대부분 커다란 파동을 몰고 오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파동이 단지 어떠한 현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느 대상이 반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게 부딪힐 평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평면은 무엇일까. 거대한 유리온실을 상상해보자. 유리온실은 들어오는 것만 가능하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계속해서 더워지기만 하는 닫힌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여기에 들어온 빛은 안에 있는 생명체 전반에 산란되고, 반향된다. 들어오는 길만 있고 나가는 길이 없으니 생태계는 늘 궁지에 몰려있는데, 균형을 맞춰야 하는 이들의 강박은 작은 흔들림에도 큰 파문을 낳곤 한다. 이게 배틀로얄 장르가 상정하는 균형의 의미이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의 숫자와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보여주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하는 말이지만, 배틀로얄은 그들이 마주한 사회 전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정도로 작은 싸움”이다. 즉, 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폭력은 미시적 관찰이 내린 결론일 뿐 이 세계는 이보다 훨씬 잔혹하다. 이에 따르자면, 배틀로얄은 작중에서 진행되는 게임을 통해 “바깥세상은 이보다 더 잔혹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경우 거대한 벽에 반향되어 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성찰’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세계 전부를 바꿀 수는 없으며, 이 세계의 균형은 이렇게 미시적이고 국소적인 면을 통해서 맞춰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작은 개인에 의해 바뀌어나간다고 말이다. 하지만 근래의 배틀로얄 작품들에는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단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더 큰 세계로 나가길 거부한다는 특징이 도드라진다. 이는 단순히 세상을 포기해버린 것도 아니고, 유년기에 계속 머무르려는 어리광인 것도 아니다. 유리온실이 깨어졌을 때 일어날 환경 변화를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미 기후변화는 시작되었다. 세계는 우리가 예측하는 것보다 더 빨리 바뀌고 있으며, 이런 불확실함은 무언가를 시도하는 일보다 주저하는 일을 더 쉽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건 누구일까?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걸까? 많은 배틀로얄 장르에서 참가자들이 묻는 “이 게임의 주최자는 누구지?”라는 물음을 떠올려보자.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감금실 밖으로 나가서야 비로소 ‘주최자’를 떠올렸듯이, 게임이 진행 중인 동안에는 주최자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원칙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에는 우리의 운명을 만든 신을 만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배틀로얄의 의미는 다소 명확해진다.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에 인생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다. 우리 인생 안에 작은 인생을 만들어 두고서 다시금 ‘현생’으로 돌아오는 일 말이다. 많은 배틀로얄 장르가 기억을 잃은 상태(혹은 본래의 삶을 알려주지 않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들은 마치, 이들의 삶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볼 수 없듯이, 게임의 참가자가 된 이상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다르게 보면 이는 한 번도 유리온실 밖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곳에서의 미래가 어떨지를 그려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즉 이는 단순히 불안하다거나 하는 감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상상할 수 없음’의 영역이다. 디디 위베르만은 “볼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미지”가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게 바로 배틀로얄의 바깥일 테다. 그러나 문제는 <오징어 게임>처럼 우리 사회 전체를 게임의 무대로 삼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우리가 이미 그에 속해 있다는 걸 전제하곤 한다. 바깥도 이미 생존 게임인데 여기 들어온다고 딱히 다를 건 없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오히려 살아있는 이들의 지옥보다는 죽은 이들의 지옥이 더 낫다고 말한다.


여기서 상상되는 건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다. 이들은 선택지가 없는 삶에서 도피해 게임에 참가했고, 여기서도 역시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게임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안은 없다.”라던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 말이다(가속주의). 이는 배틀로얄이라는 게임이 모종의 ‘대안’이나 ‘미래’로 점찍어진다는 뜻이기도 한데, 잘 생각하면 굉장히 소름 끼치는 말이다. 우리가 그동안 말해왔던 “우리는 늘 답을 찾을 거야.”라는 말이 사실은 ‘배틀로얄’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우리에겐 항상 길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것. 배틀로얄 장르가 하려는 말이 그렇다.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배틀로얄 장르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무대에 던져지고, 처음에는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세계의 끝에 가봐야 벽에 부딪힐 뿐이기에 결국에는 무대에 올라 싸우는 걸 택하게 된다. 이들에게 세계는 바꿀 수 없는 요지부동의 산과도 같으며, 세계를 바꿀만한 능력이 있는 엘리트에 구제의 권리를 양도하고 이에 따른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이 논리가 ‘배틀로얄’ 장르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적용된다면 어떨까.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미래가 우리를 하나의 길로 몰아넣는다면. 그런데 이런 운명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다면.


신이 죽었다는 세상에서 우리가 믿을만한 것은 없다. 하나의 길은 있지만, 이 길은 인간의 것이라서 우리가 직접,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이다. 세계는 계속해서 나아지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어야 할 몇몇 소수 인원이 있으며, 이들은 자신이 만든 ‘더 나은’ 세상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된다. 즉, 세계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마음은 자기 세계의 끝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다른 글에서 내가 ‘해변을 바라보는 감각’이라 불렀던 게 바로 이것이다. 해변은 대륙의 끝에 자리하기에 모든 세상에서 막다른 골목이 된다. 바다를 건널 게 아니라면 다시금 육지로 돌아와야만 한다. 이때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는데, 하나는 다시금 육지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왜 우리의 사회가 막다른 골목이 되었는지에 의문을 품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들이 마주한 해변이 정말로 세계의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다를 넘어갈 수는 없으니 다시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을 뜻한다. 겁쟁이처럼 보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인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해변에서 자신이 마주한 것을 통해 그들이 소속된 사회를 발전시킨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이곳이 삶의 무대라는 점만은 확실히 새겨두고 간다.


이때 문제가 되는 건 후자이다. 왜 우리의 사회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는지를 묻는 이들에겐 그런 감정이 생겨난다. 정말로 문제인 건 내가 아닐까 하는 마음. 이 사회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야말로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닐까 하는 마음. 그리고 이 마음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이 섬 안에서 자신의 몸집을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몸집이 작아지면 소모되는 자원도 줄어들고 그만큼 욕구도 줄어들므로, 비교적 생존에 유리해진다. 이는 근래에 N포 세대로 지칭되는 여러 사회적 현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눈에 비치는 세계의 크기를 전부 담을 역량이 안되니 몸집을 줄여버린다. 즉,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데 오히려 개인의 삶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간다. 두 번째는 자신이 적응해야 할 사회 밖으로 탈출하는 일이다. 2010년대 중반에 자주 회자되었던 말인 ‘헬조선’은 이를 잘 드러내는 사례다.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이곳은 막다른 골목이니 따라서 탈출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2020년대에 들어서 이 마음은 ‘직접’ 세계의 끝을 마주하려는 것으로 바뀌었다. 직접 세계의 끝을 마주한다면, 자기 세계의 끝은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바꿀 수도 없고, 바뀔 수도 없다면 그냥 다 때려 부수는 게 낫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세계를 죽인다. 그것이 굳건히 지켜온 신념이든, 아니면 안정적인 생활의 기반이든 간에 세계를 멸망시키면 이들 세계보다 먼저 죽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와 그 맥락이 유사하다. 테러리즘을 구성하는 두 개의 측면인 공포와 정치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두 개의 방법론이다. 이들이 테러를 일으키는 건 어떠한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공포스럽고 이런 사회의 정치적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끝을 상상해보는 일조차 두려워진 지금, 오히려 그런 끝을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일으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집어넣는 게 낫다는 것이다. 예컨대 테러란 작은 죽음(petite mort)이다. 죽음의 배면에 오르가즘이 있듯이, 세계의 멸망은 짧고 강렬한 희열을 낳는다. 세계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바로 이 부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상이 망할 때 그 안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찰나에 머무르려는 이들이라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공포가 정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정치를 공포를 통해 할 수도 있다.


미래를 생각해볼 수 없고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미래가 떠오르는 장소와 대안이 있어야 할 공간을 제거해버리면 된다. 바꾸어 말해 섬에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섬 밖의 세계를 폭파해버리면 된다. 이러면 대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섬 안에서 계속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을 적대함으로써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지키려는 일이 근래 한국의 모습이다. 예전에는 그나마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절망뿐이다. 차라리 모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살 수 있는 이 세상은 상처에 울부짖는 이들의 낙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모두가 아프고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나누면 슬픔을 덜 수 있다는 말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상대방을 세계 전체에 대입해버리는 일이며, 결국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미워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지 않는 마음은 몰락한 세계 그 자체만을 받아들이게끔 하며, 미운 건 세상인데도 감정을 베푸는 건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세상을 미워하는 일이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으로 오인(Misrecognition)되는 일은 사실상 자신에 대한 부인(disavowal)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배틀로얄 장르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들은 ‘사적인 감정’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세상은 그 무엇보다 사적인 감정으로 가득하다. 사적인 감정이 없으면 게임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또 게임이 진행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틀로얄에 참가한 인물들은 “사적인 세계를 위해 상대방에게 공적인 감정을 투과”하려 든다. 즉 이 게임과 세상이 공적이고 공평하다고 믿지만, 이런 감정의 진실이란 “사적인 세상에서 공적일 수 없는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정의는 죽었다고, 진리는 없다고 소리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미련이 찜찜하게 남아있는 것과도 같다. 어쩌면 배틀로얄이 보여주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삶에 미련이 없는 이들에게서 찰나의 미련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이런 미련이 게임 전체를 움직이고 그렇게 세계를 개변할 수 있다는 일말의 믿음 말이다. 결과적으로 “달아나 봤자 답이 없고 끝내 돌아와 부딪혀야 한다”는 말은 세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세상을 향해 소리칠 때,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이지 때 묻은 세상의 잔해는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배틀로얄 장르의 잔혹함을 두고서 “세계는 잔혹하다.”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잔혹한 쪽은 오히려 세계의 죽음을 가지고서 도박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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