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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6. 2021

비평의 서브컬쳐화란 무엇인가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1.


아즈마 히로키의 『느슨하게 철학하기』를 보다가 문장 하나가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오늘날이란 분명 “거대서사의 죽음”이 이루어진 세계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게 의미하는 바는 통합된 의견의 부재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소속되기는 싫어하는 양가적인 태도야말로 거대서사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눌 일도, 일치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두가 행복한 세상, 하지만 이 행복은 서로 간의 단절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나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냐고. 물론 같은 자리에 있다 해서 꼭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 자리한 깊은 골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나지 않으면서 만난다는 것, 비대면을 통해 대면한다는 것.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와 이어지고 있을까?


거대서사의 죽음, 다르게 말해 이는 우리 스스로 거대서사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의견과 내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하나의 서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래서 서로 간에 말을 나누기를 꺼렸을 테고, 이로 인해 거대서사라는 건 ‘태어날 겨를’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저출생’이나 ‘비혼’이라는 말이 아니라, ‘거대서사의 죽음’과 ‘비대면’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갈등과 혐오로 가득 찬 사회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과 상대가 속한 집단을 나누어 갈라버린다. 이들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상대방과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거대서사’ 만들기를 포기해버린다. 물론 여기에는 더 깊고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쪼록 좋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같은 책에 실린 아즈마의 또 다른 글이 눈에 들어왔고, 이 글은 거대서사의 죽음이라는 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그 글이란 건 이렇다. 사람들이 기사를 스크랩하는 모 사이트에 들어가 봤더니, 여러 분야의 평론이 라이프나 스타일처럼 ‘평론’과는 무관한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용자가 직접 분류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실제로 ‘평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아즈마는 ‘평론’의 독자라는 게 사실은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문화생활을 깊게 있게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 그냥 퇴근길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독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평론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예전처럼 진중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비평의 서브컬쳐화가 아닐까, 하고 아즈마는 의심하고 있다. 예전 시대에 비해 평론이라는 글이 주는 무게감이 달라졌다고 말이다. 이는 평론의 사회적 위치가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뜻한다. 즉, ‘서브컬쳐화’ 되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 무게감은 잃고 말았다. 주류문화에서 세분화됨으로써 더 많은 취향에 다가설 수 있었지만, 거대서사에서 이탈함으로써 더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지 못하게 되었다(이러한 점은 트위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도서시장이 한국보다 훨씬 잘 돌아가고 있는 일본의 현실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유효점이 있다. 예전에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한창 흥했던 것처럼, 문학의 위기란 모두가 감지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와 오쓰카 에이지에서 바톤을 넘겨받은 아즈마의 의견을 따르자면, ‘문학’의 위기란 건 사실 ‘이야기’의 위기이다. 그러니 우리는 ‘거대서사의 죽음’이라는 말을 “하나의 문학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오늘날 비평이라는 게 더는 ‘리더’의 위치에 설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즈마는 비평이 서브컬쳐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비평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비평이라는 건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장르이다. 비평은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싸움판이 되는 일도 종종 있다. 헌데, 거대서사의 죽음이라는 이 현실에는 그런 싸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를 주지도 않고,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얼핏 보면 좋아 보이는데 따지고 보면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하다면, 우리의 투쟁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는 걸까? 이런 세계에선 투쟁이라는 걸 해봐야 결국 자기만족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따지고 보면 별거 없(어 보이)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러나 서브컬쳐화라는 말을 ‘진중함’의 반대편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담론이든 간에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일은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위험한데, 바로 이 점이 거대서사의 죽음이라는 말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이를테면 과거에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경계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의 영화를 봤고 같은 순서를 따라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의 영화를 ‘봤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다른 시계열에서 자기만의 영화를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 걸까? 이 이야기가 비평의 문제에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라 함은 어떠한 현상이나 대상을 두고서 논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비평이라는 건 성립할 수 없다. 허나 오늘날에도 비평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러나 예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근래의 비평들에서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이는 <오징어 게임>과 같은 드라마부터, <아이리쉬 맨> 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비평 중에 이것들을 온전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다룬 글은 없었다. 평자들은 대개 넷플릭스라는 플랫폼과 그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현상, 혹은 세계화의 문제나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불러온 것 등을 논하곤 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 거대서사의 붕괴로 인해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길이 없게 되었고 이를 위해 주변부를 끌어올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선 우리가 보았다고 해도 다른 이에게 설명할 길이 없기에, ‘증명할 수 없음’이라는 표식을 달고서 ‘취향’이라던가 하는 기호만을 내세우게 될 뿐이다. 하지만 이는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척하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은 아니다. 그리고 둘, 전통적 의미에서의 매체가 사라진 만큼 전통적 의미에서의 비평도 사라졌다. 바꾸어 말해 고전적 서사를 찾아볼 수 없게 됨으로써 우리의 앞날이 자유로워졌지만, 그에 수반해 참조해볼 만한 선례도 사라져버렸다. 이는 우리가 배워온 비평의 방식이 무력화되었으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게 된다. 이 시대에 사라진 건 소통일까 아니면 담론일까. 다시 말해서, 담론은 멀쩡한데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한데 우리가 정작 보아야 할 풍경은 사라져버린 걸까. 여기서 ‘담론’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 이 이야기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던가 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해둔 것처럼 거대서사의 죽음이라는 말을 통합된 의견의 부재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나는 그 반대편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담론이라는 건 모두에게 한번 뿐인 순간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20살의 나와 30살의 내가 <시민 케인>을 보면서 하는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12살 아이와 13살 아이에겐 그만큼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만큼의 경험을 하고 그만큼의 세상을 겪는다. 부모로서는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만 하면 된다. 예전에는 어떠했고 앞으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해보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아이와 만나야 한다. 이전의 삶과 앞으로의 궤도를 상정해보는 일조차 어쩌면 아직 [대면]하지 않은 미래를 논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비평의 죽음이 아니라 ‘비평한다는 것’의 부재이다. 비평의 죽음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그곳에 비평이 있음을 보여준다. 연결되어 있지만 않을 뿐, 고립된 점조직의 형태로 멀쩡하게 잘 살아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연결하는 방법이고, 이게 바로 ‘비평한다는 것’의 자의식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하는 것은 꽤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관심사로나 실제로 쓰는 글로 보나 나는 평론가라 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이름을 ‘자칭’하지도 않지만, 세간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서브컬쳐에 더 가까운 사람이고 실제로도 그런 주변부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생각하는 것들도 주류보단 서브에 치중되어 있다. 여기서 ‘서브’라고 한다면 아무쪼록 소외된 느낌이 나지만, 이러한 소외감이야말로 비대면을 통해 대면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볼 수 있게 해준다. 


2. 


비평의 서브컬쳐화라는 것을 두고서 나는 ‘모두에게 한번 뿐인 순간의 도래’라고 설명했었다. 꽤 낭만적인 문장이지만 그런 의도로만 작성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튜브에서 한창 진행되는 ‘영상 비평’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 영상 비평은 과거에 있던 블로그 비평을 새 플랫폼에 맞게 번안한 것이기도 하지만, 비평의 서술 방법을 글쓰기에서 영상편집으로 바꾸어 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플랫폼의 문제이고 둘은 방법론의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리는 중이며,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플랫폼의 문제란 무엇이고, 그게 ‘한번 뿐인 순간’으로 이어지는 대목이란 어떤 걸까? 


오늘날 ‘플랫폼’으로 불리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아마존이나 넷플릭스처럼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자신의 미래 궤적을 만들어가는 큐레이션 서비스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서비스는 모두에게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번 뿐인 순간’을 제안하는 것과도 같다. 말하자면 사용자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접속하는 건 결국 하나의 사이트다. 즉 하나의 사이트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을 체험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예전이라면 말이 안 되었겠지만 인터넷의 두 번째 혁명을 통해 이러한 일이 가능해졌다. 큐레이션이라던가하는 서비스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비대면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중요한 건 단순히 사람을 만나기만을 꺼리는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소통의 욕구는 여전한 상태에서 물리적인 접촉만을 배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듣고만 있자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점점 고립되어감과 동시에 그런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소 자의적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대략 이렇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를 설명하는 단어가 1세대 인터넷이라면,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초를 두고서는 2세대 인터넷이라 할 수 있다. 1세대가 즉각성과 소비성을 강조하는 시기였다면 2세대는 연결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각성만으로는 현실에서의 대면과 인터넷에서의 대면이 왜 다른지를 설명하지 못했고, 이에 생겨난 게 바로 연결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때 멀리 떨어진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우리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 시기의 촛불 혁명을 떠올려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서로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하나의 장소에 나서게 되는 일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말하자면 대면의 비대면성, 사람을 만나지 않고서도 어떻게 마음이 통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게 바로 비평의 서브컬쳐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몇 가지 시사점에 해당한다. 오늘날, 텍스트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개의 파라텍스트로 분해되었고 어느 경로를 택하든 간에 결국에는 하나의 장면에 모두가 도달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종말 의식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 게임을 즐기는 수천 개의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느 시간선에서나 끝은 존재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방법이나 경로가 다르다면 이 게임은 그들 각자의 경험을 만들고, 이는 우리가 그동안 거대서사라 말했던 하나의 ‘정석’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날 비평이라는 게 일종의 ‘모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이 발견한 포인트를 중심으로 작품 전체의 서사를 재편해버리는 연결의 행위 말이다. 이 경우, 작품이 의도하는 본래의 속뜻과는 완전 딴판이 되어버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테다. 허나, 우리가 이를 통해 얻는 이점이 더 많다. 


 어떤 면에서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런 편협성을 지녔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문득 꽂혀서 영화 전체를 그렇게 해석해버리는 일은 예전에도 흔했다.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것도 과대 해석해버리는 일이 있었고, 이런 일은 오타쿠의 폭주처럼 이해되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나 비평의 서브컬쳐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맥락은 다소 다르다. 비평이 서브컬쳐화될 때, 그곳에 정작 비평은 사라진다. 즉 여기엔 비평가도 오타쿠도 없고 그냥 관객만이 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해 이는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비평하는 사람들에게서 비평한다는 것의 의식이 사라진다는 점을 유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비평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바보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들은 “나 비평해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만 실제로 비평을 한다고 생각한다. 비평가에겐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자의식이 없으면 비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평의 서브컬쳐화가 진행된 세상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비평을 하게 되는 일이 잦다. 이전 시대에 하나의 작품을 뜯어보는 건 비평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미디어 환경에 의해 작품 전체가 산산이 조각나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비평이라는 일에 진입장벽은 사라졌다. 유튜브 클립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특정 장면을 잘라놓은 것은 흔하며, 이를 통해 해당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이들에겐 그게 바로 작품으로의 첫 입구가 된다. 


혹자는 바로 이 첫인상을 통해 작품 전체에 대한 인식이 왜곡될 수 있으리라 우려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 방향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서순은 순서대로가 아니었다고 말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해서 봐달라고 호소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틴 스콜세지라던가 봉준호라던가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화를 “큰 화면에서 봐달라.”고 했던 건 단순히 영화 매체의 성질이 극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겐 모두가 하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그 속도는 다르더라도, 첫 장을 열어 마지막 장을 닫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허나 ‘정지’라는 게 보편화된 세상에서 꼭 그래야만 할 이유는 없다. 넷플릭스를 보면서 <D.P>의 1화를 보다가 재미없어서 관둬버리고 바로 <오징어 게임>의 1화를 뒤적거리는 일이 오늘날엔 흔하다. 


개인적으로도 란츠만의 <쇼아>와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를 여러 번에 걸쳐 감상한 경험이 있다. 오늘날 OTT 서비스들은 사용자가 작품을 어디까지 봤는지를 서버에 기록해두어서, 이용자가 다음번에 작품을 재생할 때 지난번에 보다 만 곳부터 다시 볼 수 있도록 있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끊어서 보는 경험은 영화 전체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다르게 말해 오늘날 관람이라는 행위에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자의식이다. 영화를 가장 완벽하게 손질하여 내놓는 작가라 하여도 관람객의 자의식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또한 관람객의 세계와 시간을 따라잡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관객은 작품 속의 세계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 올라타 이들 세계를 관람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 시대의 작품이 일종의 테마파크가 되어야 했다면 오늘날엔 거기에 머무를 시간조차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작품들은 하나의 플랫폼에 더 가깝다. 


어느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경유하는 시간,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어주지만 정작 하나의 공간으로 취급되지는 않는 애매모호함 등이 이들 플랫폼을 구성한다. 바로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간으로 작품을 관람한다. 모두가 수원역과 서울역을 방문해볼 수는 있어도 그사이의 시간을 구성하는 요인은 각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이 나이로 규격화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궤적으로서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발견하는 여러 장면은 ‘보았다’는 의식을 공유하기에 충분한 형상이지만, 그것들을 ‘보았다’고 말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비평’이라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분류보다 중요한 건 ‘개인화’의 측면이다. 모두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알 것 같으면서도 확 와닿지는 않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그러니 이를 요즘에 유행하는 말로 바꾸어보고자 한다. 이른바 “비평의 평행우주(Multiverse)란 가능한가?”라는 것. 마블과 같은 프렌차이즈 미디어의 팬이라면 잘 알겠지만, 평행우주라는 것은 한자리에 공존하는 여러 개의 시간대를 뜻한다. 기본적인 설정이나 공간 등은 같지만 각자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분기되는 여러 세계를 바로 평행우주라고 부른다. 예컨대 평행우주란 창작자가 각 요소를 어떤 고리로 엮어나갈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선택지라 볼 수 있다. 


결국 비평의 평행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것을 엮어나가는 여러 개인들의 다양한 방법이라 볼 수 있을 테다. 여러분은 “그래서 이게 뭐?”라는 표정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래 비평이라는 게 다 그런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플랫폼’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플랫폼이란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장소지만 그 자체로 특정되지는 않는 특징이 있다. 예전 시대에는 열차역이 플랫폼이었고 지금 시대에는 메타버스가 그런 장소다. 이 장소들은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목적지는 각기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즉, 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지만 각자 점유하는 공간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공간을 점유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그런 이동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플랫폼이다. 


3. 


좀 전에 나는 개인이 고유의 영역을 점유하면서 이동한다고 말했다. 이 생각을 면밀히 풀어놓을 수는없겠지만 예전에 정관장 광고에 나왔던 면역력의 버블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면역력의 버블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같은 걸 설정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영역이 절대적이지 않게 된다. 영역이 눈에 안보이니까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걸 할 겨를이 없다. 예컨대 모두가 개인의 영역을 점유하면서도, 이 영역은 절대적이지 않아서 상대방과 동선이 겹치거나 할 수 있다. 면역력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타인과 마주할 때 어떻게 타인의 생각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면역이란 기본적으로 항상성(恒常性)과도 무관하지 않아서 나와 세계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만화에서는 이를 강한 자의식으로 묘사했었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 주인공 신지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인간에겐 자의식이 있기에 서로를 안아줄 수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의식을 포기해버리면 세계는 그냥 세계로만 남게 된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모두가 공유하는, 이런 세계가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결국 이상론일 뿐이다. 여기서 내 생각은 신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다른 이들을 안아줄 가능성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비평의 서브컬쳐화라는 말이 의미하는 게 바로 이렇다. 너=나, 라는 공식에서는 근본적으로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연결되었고 이렇게 되면 마음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본격적으로 ‘너’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서브컬쳐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오타쿠 현상을 그 기원으로 끌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비평이 오타쿠화되어간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전하려는 건 비평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게 바로 자기 취향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비평의 서브컬쳐화라는 말은, 자신을 그저 치켜세우기만 하는 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확실히 이는 “비평가라는 고고한 생물”의 자태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취향이 확고하다고 해서 꼭 고고해 보이는 것은 아닐뿐더러, 그런 고고함은 서로를 껴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막연하게 ‘취향 존중’이라는 구호만을 외치라는 것도 아닌데, 취향이란 것은 우리 몸에 있는 면역력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면역력은 우리가 조절하고 싶다고 해서 조절되는 게 아니다. 면역력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유지하는 힘이지만, 우리가 원할 때 딱 잘라서 조절할 수는 없는 힘이다. 오히려 면역력은 균형을 맞추는 무게추에 더 가깝다. 그래서 면역력이 과할 때 우리는 그 방어체계에 의해 살해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취향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취향은 우리가 세상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지만, 너무 과해도 문제다. 자기 취향만을 내세운다면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자기 취향이란 게 없다면 플랫폼의 사람들에게 휩쓸릴 수도 있다. 이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가정 중의 하나는 “취향의 전체화”인데, 위에서 <에반게리온>을 끌고 온 것은 이를 위해서였다. 내 말도 맞고 네 말도 옳다면, 여기서 우리가 상정하는 ‘우리’란 무엇일까?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이것이 어떠한 집단이나 소속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절망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른바 종말에 관한 의식, 모두가 하나의 길을 걷는다면 근본적으로 이 길 자체를 바꾸어 보려는 시도 따윈 생각도 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백색왜성처럼 소멸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세계의 중력이 곧 자신을 잡아당기는 가치처럼 여겨지게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자기 취향’이라고 오인하는 것 중에 대부분은 이렇게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사회 전체의 무게에 이끌리는 ‘가짜 취향’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엔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청년 김두한 식의 계몽의식이 통하지 않는다. 플랫폼에서 중요한 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그런 흐름 안에서도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능력, 즉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이다. 


마음을 세운다는 건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 가치다. 세상을 등진 채 고독함을 취득하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는 펜스룰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하는 일을 두고서 그것이 ‘이미 하고 있는 일’임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눈을 깜빡인다든가 들숨 날숨을 내쉰다든가 하는 일은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걸 의식할 때 더는 자연스럽지 않은 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좋아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어 보기를 꺼린다. 이건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가 이미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더 깊은 우주로 항해할수록 우리는 세계의 자장에 이끌리게 된다. 말을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워지고 애초에 어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세계의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상이라는 매체가 바로 그렇게 시간과 나란히 등속 운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영상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그런 시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전해준 건 『관찰자의 기술』이었다. 오늘날 무언가를 본다는 건 이 악물고 외면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로 치부될 만한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우리가 본 풍경을 자체적으로 검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보였고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꿋꿋하게 서 있으려면 적어도 자기 주관이라는 게 필요했다. 오늘날 비평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영상 매체의 발달이 가져온 것은 비평 의식의 보급이었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비평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기에,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평의 서브컬쳐화라는 건, 그러한 의식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그와 동시에 고립된 인간의 처지로 다시금 돌아가자는 뜻이다. 인터넷의 보급이 사람들을 점점 더 외롭게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초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의 고통을 정말로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있다. 단순한 공감을 넘어,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내면에 침투해오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는 즉 면역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상대방과 적절한 거리를 두라거나, 또는 알아서 잘 참으라는 것밖에는 없다. 헌데 그렇다면, 면역력을 증진할 요령으로 백신을 접종하는 것과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다른 글에서 나는 ‘정지’라는 게 보편화된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의 악당 DIO를 언급한 적이 있다. DIO의 능력은 세계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으로, 시간을 멈추고서는 그 안의 세계에 간섭함으로써 인물 간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다. 이 글에서 우리의 생각은 여기서 더 나아가, DIO의 의지를 이어받은 6부의 악당 푸치를 논할 것이다. 일단 두 사람의 차이는 이렇다. DIO가 정지된 순간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게 바로 권능이라고 말하는 반면, 푸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면 앞날에 대한 고민 같은 게 사라짐으로써 진정으로 모두가 행복한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DIO가 ‘정지’를 통해 관찰자의 거대서사에 대한 우위를 논한다면, 푸치는 ‘등속운동’을 통해 거대서사를 반복하고, 그것을 개인의 영역 안에 밀어 넣는다. 


그런데 이는 마치,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봄으로써 영화의 모든 면을 알아내고자 하는 시네필리아의 속성과 닮아있지 않는가? 거대서사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취하면 무엇보다 개인화된 영화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시네필의 이야기 말이다. 방법론 자체도 동일하다. 푸치가 말하는 반복의 방법이란, 시간을 빠르게 가속해 서사를 한 바퀴 돌아오면 인간은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여태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 모두 일종의 궤적을 따르기만 할 뿐,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선택은 아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니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삶에 대한 비평을 전적으로 포기해버린다. 


이런 세상에서 취향이라는 건 말끔하게 부정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애초에 이렇고 저런 것을 좋아하도록 태어났다는 말은 상당히 김빠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개인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거대서사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취향이 과연 정말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닐 테다. 푸치에 대항하여 인간 찬가를 말하는 주인공 진영의 논리가 바로 그러하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거대서사 앞에서 자신의 삶을 비평하여 주변 세계를 확고히 하기 때문이라고, 모에라는 게 없고 취향이라는 게 없다면 이 세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시간에 편승하는 것뿐이라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비평을 서브컬쳐화해야 하는 이유는 단명하다. 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천국에 신뢰를 보내야만 한다. 


4.


우리는 시간을 사유화해야 한다. 시간의 등속운동에 저항하여 우리의 삶이 세계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은 우리의 지난 삶을 궤도화하여 미래의 서사를 예측하여 보여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성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지’라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만을 보내기보다는, 그러한 관성으로부터 자신을 탈구시킬 하나의 방법으로 볼 필요가 있다. 거대서사라는 게 알아서 만들어지도록 내버려두면서 그저 시간을 앞으로 돌려버리는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서사 만들기를 수행하는 게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한번 뿐인 순간이라는 게 그런 정지를 뜻하기도 한다. 영상을 편집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영상 편집은 자르고 붙이는 일의 연속이다. 바꾸어 말해 영상을 정지했다가 돌려보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고, 여기서 타임라인이란 전적으로 내 주관에 따른다. 단순히 시간을 멈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삶의 궤적과 시간의 등속 운동에 의지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말은 그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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