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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4. 2021

출구는 이쪽입니다: 대피소로서의 영화관




*이 원고는 대덕 FILM 영상제에서 발표되었다



미래는 관찰자의 관심의 성격이나

그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른 측정에 달려 있다.

-프랭크 커머드-[1]


상황과 다가올 행위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간격은 메워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2]


 



1.



지금 저희가 있는 이 장소가 바로 ‘청년 벙커’입니다. 본래 민방위훈련 용도로 사용되었던 장소를 개축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청년 벙커는 청년들이 대피소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임을 표방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대피소에서 영상제가 열렸습니다. 대피소에서 열린 영상제라는 점은 어쩌면 오늘날 영화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민방위라는 말과 대피소라는 말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민방위가 예비군을 벗어나 민간인 신분이 된 이들이 하는 훈련이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즉, 민방위라는 건 현역이지만 현역이 아닌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민방위라는 말을 보면서 ‘현역에서 은퇴한’ 어느 시네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영화에 막 입문했을 때는 하루에 3편씩도 보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럴 만한 시간도, 용기도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정작 영화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적어지고, 이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초심을 잃었다’는 겁니다. 허나 저는 이런 민방위 상태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방위라는 애매한 위치는 오히려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대피소란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 긴급하게 몸을 숨기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재난 상황이 끝나기까지 사람들을 안전히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데요. 그렇다면 대피소라는 건 “재난이 언제 끝나게 될지”를 고민하는 장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를 전제로 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네필은 20대에서 30대 사이인 듯합니다. 영화제에 가서 밤을 새거나 영화를 보고 블로그에 글을 적는 이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추측컨대 이는 아직 삶이 정형화되지 않아서 그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여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이 나이 또래는 보통 삶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에 오히려 불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나중에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청년 시네필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만난 이들 중에서는 “한창 때는 영화제도 가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바빠서 영화를 볼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걸 자주 봤습니다. 시험 준비를 하든, 직장이 바빠서든 간에 영화는 점점 이들의 일상에서 멀어지는 셈이죠.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이들에겐 ‘영화를 보지 못하는 일상’이야말로 재난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던 마음을 스스로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오늘 발표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게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를 볼 수 없다’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미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에 영화를 볼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년 시네필들에게 영화에 대한 사랑이란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이들은 영화를 잘 보지 않게 된 자신의 처지가 ‘삶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컨대 ‘초심을 잃었다는 건’ 우리가 어린 아이였던 시절로부터 머나먼 길을 떠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려서,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깜박 잊고야 만 것이죠. 하지만 저는 ‘민방위’라는 말이 이런 고민을 풀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민방위는 분명 전장에 설 현역은 아닙니다만, 대피소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피소라는 건 ‘재난 상황을 잠시 피할 요령으로 기획된 장소’인데요. 여기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고된 삶을 잊을 수 있다면, 어쩌면 영화란 대피소인 건 아닐까요. 신자유주의, 라고 하기에는 다소 낯간지럽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재난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재난이 언제 끝나게 될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러면 결국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일까요? 정성일 평론가는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1963)를 보며 ‘영화란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 쇼트와 시퀀스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죠. 이 일화는 영화의 최전선에 뛰어든다는 게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첫 번째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시네필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도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기 삶에서조차 주변으로 밀려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내 취향이 아니어도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곤 합니다. 내 의견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들인데도 말이죠. 영화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보통 우리 입맛대로 골라 볼 수 있습니다만, 시네필 생활을 하려면 자기 취향이 아닌 것도 챙겨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좀 허영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선’ 같은 리스트는 보는 이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야 함에도, 이런 게 간과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시네필에게 영화제가 그러합니다. 그동안 시네필들에게 영화제는 일종의 ‘영화력’ 측정기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는 영화제가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영화를 틀어주기 때문입니다. 주변부로 밀려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영화제라는 것입니다. 헌데 그렇다면, 위에서 말했던 ‘민방위’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삶의 주변부에 위치한 우리”가 “주변부로 밀려난 영화”를 본다고 말이죠. 이 묘한 동질감은 우리가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을 정의하는 것에 도움을 줍니다. 삶을 살아가며 점점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화를 볼 때만이라도 온전히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시네필은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취향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삶의 궁극적인 목표조차 잊어버리게 될 공산이 큽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까맣게 잊고서, 단지 같은 처지에 있다는 동질감만으로 주변부에 있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식의 영화관람은 현실도피일 뿐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 세계에 빠져드는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영화에 푹 빠져 산다는 건, “내가 얼마나 자기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있지 못한지”를 자랑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민방위가 된 시네필들은 모종의 자기갈등을 겪게 됩니다. 영화보다 현실을 우선시해야 하는 건 맞지만, 영화를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초심을 잃은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좀전에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람이 항상 현역으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굳건한 이라도 언젠가는 현역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현역에서 예비군이 되고, 예비군에서 다시금 민방위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고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자는 이런 말을 꺼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그만큼 사랑한다면 애정이 식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제까지고 현역으로 남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에 깊게 몰입했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이 영화가 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영화 같은 삶’이라고 알아왔던 것의 정체입니다. 영화를 보는 건 거울을 보는 것과도 같아서, 그에 몰입할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의 삶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건 어디까지나 재난이 진행중인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기 위함이지, 그곳에 영영 눌러앉기 위함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삶을 살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영화는 뒷순위로 밀려납니다.



3.



이 대목에서 저는 청년 벙커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벙커’라는 말이 대피소를 지칭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대피소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반대로 보면 우리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재앙에도 끝은 있으며,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이죠. 바꾸어 말해 시네필인 우리에겐 영화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며 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헌데 그렇다면, 영화 관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인생이 힘들고 고달픈 이유는 잠시 쉬어갈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삶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영화관인 것이죠. 하지만 저희는 다음과 같은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영화와 가까워질수록 영화는 휴식이 되지 못한다. 이제 영화는 삶의 바깥 지대로 기능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영화가 자신의 삶 안으로 편입됨으로써 그곳 또한 우리 삶의 고단함을 담은 장소가 되어버립니다. 즉, 영화를 보는 일이 더는 즐겁지 않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영화를 보는 일이야말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게 되어버립니다.



발표를 시작하며 짧게 언급했던 ‘오늘날의 영화’란 바로 이것과 관련 있습니다. 영화가 삶의 바깥 지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일이 단지 시네필들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영화관을 벗어난 영화의 시대에 모두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영화관을 벗어난 영화란 무엇일까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영화 같다’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날 영화라는 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흉내낸 이미지를 더 소비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티브이를 본 사람들은 “이거 무슨 영화 광고야?”라고 생각했다고들 합니다. 상황이 너무 실감 나서라기보단, 현실이라면 있을 리 만무한 일이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그게 현실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맥락으로 생각하면 ‘영화 같다’는 말은 “비현실이 현실을 잡아먹은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헌데 영화를 두고서 ‘비현실’이라고 표현하는 건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영화가 비현실이라면, 그런 영화를 보고, 듣고, 찍는 우리는 비현실에 둘러싸인 걸까요. 이런 식으로는 영화가 현실도피라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현실적인 것을 쫓는 게 바로 영화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하게 되니까요.



적어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영화를 헛것으로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에게 영화는 아주 분명한 현실이고 어쩌면 두 번째 삶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비현실성, 즉 스펙터클에 대한 오해가 생겨난 이유를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영화는 왜 비현실의 대명사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화관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티브이의 발명에 대항해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발명해냈던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의도가 그러했습니다. 티브이가 점점 더 동시대적으로 변해갔다면, 영화는 그러한 동시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자 했습니다. 이제 영화는 점점 더 비현실적인 크기의 화면과 소리, 상황과 설정을 마련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영화는 동시대적인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의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9.11을 두고서 ‘영화 같다’고 말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갑니다. 영화관에 간 적이 없는데 눈앞에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을 때도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건 정말로 재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영화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오늘날, 관객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비현실에서 도피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영화에 대한 사랑도 의심받습니다.



4.



가짜처럼 보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무엇이 진짜인지를 분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영화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시네필들이 “무엇이 내 취향이 아닌지”를 논했다면, 오늘날의 시네필은 “무엇이 내 취향인지”를 열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가짜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사랑도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영화임을 입증할 의무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영화로 가득하다면 거기서 영화가 아닌 걸 찾는 게 더 어려우니 말입니다. 바꾸어 말해, 영화를 보거나 생각하는 일은 쉬워졌지만 정작 그런 영화들에서 안식을 취하기란 어려워졌습니다. ‘영화 같다’는 말이 일종의 대명사로 굳어진 오늘날에 영화의 개념은 점점 더 모호해집니다. 우리가 아는 영화의 의미는 ‘영화 같다’는 말에 자리를 빼앗겨 버렸고, 정작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거대로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오래된 고전 영화를 유튜브나 비메오, 토렌트를 통해 마주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이 시네마 천국이라고 말이죠. 허나 기억의 과잉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무엇이 진짜 자기 기억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게 정말 내 취향인지를 나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시네필과 영화 사이의 유사점이 바로 이렇습니다.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시대에 영화란 지각하는 그대로의 현실이었습니다. 즉 영화는 기억이었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지각하지 못하게 된 오늘날, 영화는 기억의 착란을 겪습니다. 영화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게 되었고 끝내 자아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습니다. 시네필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고 영화에 집중해야 할 이유도 약해졌습니다. 영화가 어디에나 있다는 말은 오히려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끔 하며, 이제 시네필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교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영화의 처지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른바, 방향상실의 감각을 영화와 공유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영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바로 청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 아닐까요? 이들에게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관은 한 번에 하나의 영화만을 상영하며, 이는 영화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삶이 영화 자체가 되어버렸다면, 여기서 영화가 아닌 것을 찾기란 어려운 일일 테죠. 하지만 영화관에는 항상 영화가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영화관이라는 건 단순히 영화를 보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자신이 영화 한편에 이만한 공을 들인다는 점, 영화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생색을 내는 장소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다니는 이들에게 영화를 보러 간다는 건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이벤트일 것입니다. 이들에게 영화제란 휴가를 내고 가는 일종의 ‘휴식처’입니다. 바꾸어 말해 이들에게 영화관이란 일상을 잠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현실을 살아갈 힘을 북돋아주는 장소 말이죠. 문제는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우리 삶에서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짧은 클립 하나가 영화 전체를 설명해주지는 못하듯이, 삶의 단편적인 면만으로 자신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고민한다면, 삶 전체를 생각해보는 게 차라리 더 낫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영화는 그 시작에서 끝이 정해져있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 끝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끝이 없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안에 떠는 것은 몹시 당연합니다. 영화는 여러 번 볼 수 있지만 인생은 딱 한 번만 살 수 있으니까요.



5.



이 대목에서 저는 영화와 기억의 관계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화 클립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영화 한 편을 다 볼 시간이 없고 그래서 이런 영상을 찾습니다. 이 영상은 일목요연하게 줄거리만을 소개하는데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나아가면서 인간의 생활권이 넓어졌고, 그만큼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한 사람과의 진중한 관계는 점점 없어지고, 얇고 가벼운 관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화에서 잃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진중함입니다. 영화를 접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그냥 얼굴만 쓱 보고 넘겨버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법은 많아졌지만 정작 그에 대한 진중함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세상에 영화가 만연해짐으로써 벌어지는 참극이 바로 이러합니다. 영화가 점점 우리의 삶이 될수록 우리는 영화의 소중함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영화 한편에 담긴 쇼트와 시퀀스를 잊어버리게 됨으로써 영화는 그저 크게 뭉뚱그려진 감정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바로 오늘날 영화관이 ‘폐허’처럼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점점 모호해지듯이 영화 속에 담긴 기억들도 점점 모호해집니다. 마치 모래처럼 말이죠.



제가 사례로 들고 싶은 건 스마트영수증입니다. 스마트영수증은 환경을 보호할 목적으로 종이 입장권을 발권하지 않는 서비스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영화표는 영화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겠지만, 지금은 환경오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 구태여 종이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저희가 마주하는 또 하나의 고민은 영화가 바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계에서 필름이 퇴출당한 게 경제적이고 환경적인 이유였듯이, 영화를 ‘본다’는 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는 영화관에 방문해 영화를 보는 일도 쓸모없고 무가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영화관이 일종의 쓰레기장이 되었다면, 이곳을 삶의 터전 삼은 우리들 ‘시네필’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 게 아니냐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처럼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할 사람들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영화 ‘CD’가 수집품이 되고 필름 영화 제작과 오프라인 영화 상영이 돈 낭비 혹은 환경오염으로 취급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들 ‘시네필’은 이 시대의 잉여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헌데 그렇다면, 시네필이란 건 삶의 주변부에 위치할 뿐인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영화관에 방문해야만 영화를 볼 수 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를 두고서 “이 시대에 영화관은 쓸모없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흥미로운 상상 하나를 해보려 합니다. 앞으로 오프라인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굉장한 사치가 되지 않을까요? 바꾸어 말해 돈이 없고 시간이 없는 빈자들은 온라인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관이나 영화제에 가는 일은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아주 귀중한 이벤트가 될 테죠. 이는 즉, 우리가 영화와 직접 대면해서만이 충족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카카오톡이나 Zoom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비언어적인 면이 있고, 이는 우리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상대방의 단편적인 면을 다각도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화관에 가야 할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화가 삶의 중요한 순간이 될 때, 우리는 영화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좀 전과는 정반대의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만큼 그에게서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에 진심이 된다는 건 더는 영화를 삶의 대피소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영화에 진심이 됨으로써 영화에 진심일 수 없게 됩니다.



6.



영화계에 있다 보면, 가끔은 영화에 파묻혀버린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영화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이게 시네필로서는 거한 포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을 신경 쓰면서,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야 마는 것이죠. 처음에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좋아하던 게, 이제는 내가 정작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게 된 채 남들이 좋다는 영화만을 관성적으로 관람하게 됩니다. 영화 말고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꿈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내가 정작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까먹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꿈은 마치 끝나지 않는 영화와도 같아서, 처음 빠져들 때는 환상적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꿈이 언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지치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해버리곤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마음이 들 때면 휴식을 취하다 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일상이라는 건, 그 밖에서 바라볼 때 더욱 소중하니까요.



시네필들에게 영화는 아마 그런 의미였을 겁니다. 누군가의 삶을 그 삶 바깥에서 바라보는 일 말입니다. ‘영화’를 ‘삶’이라는 말에 대입해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시네필들은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일을 일종의 유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네필이 영화에 대해 알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현실은 끝나지 않지만 영화는 영화관 안에서 끝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이 영화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렇습니다. 인간과 영화의 시간은 다릅니다. 우리가 영화에 다가설수록 영화와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까지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아무리 좋아해도 먹고 살려면 취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취직을 하면 별 생각 없이 영화만을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화를 덜 보게 됩니다. 이때 시네필들은 영화를 좋아했던 자신의 초심을 떠올리면서, “혹시 내가 변해버린 건 아닐까”하는 노파심을 드러내곤 합니다. 동시에 현대 영화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처럼 여기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죽음이란 게 사실 내 죽음이 되는 건 아닐련지. 영화에 대한 애정의 부족이 나라는 ‘시네필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건 아닐지, 와 같은 여타 고민 말입니다.



위에서 ‘스마트영수증’을 말했던 대목을 떠올려봅시다. 영화, 시네필, 영화비평, 이것들은 오늘날 잉여처럼 여겨지거나 혹은 그렇게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 이상하리만치 언급되지 않는 건, “우리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재난 상황이라면 죽음을 피하고자 어딘가로 대피해야 마땅한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행동합니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선 인간처럼,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식의 말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분명 이 재난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게 여길만한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까요? 자문자답하자면, 아마도 이는 영화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감각 때문일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은 마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처럼 들리니까요. 어떤 면에서 영화를 관람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건 그런 이별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지만, 이 영화도 언젠가는 끝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병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말은 이런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겪는 일들에 끝이 없어보이지만,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 끝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죠.



7.



우리는 영화에 너무 매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꾸는 꿈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리자면, 영화는 지친 삶에서 잠시 쉬어가는 대피소가 될 때 더 가치있습니다. 영화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영화에 빠져 죽어버리면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영화란 무엇인가?, 가 아닌 영화관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영화라면, 중간에 잠시 밖으로 나가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에 영화는 그런 매체였지만, 오늘날 영화는 얼마든지 멈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네필인 우리도 그러한 변화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만 계속 좋아할 이유가 없고, 너무 꿈을 향해서만 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힘들면 힘든대로 잠시 쉬어가면 됩니다. 더 이상 현역이 아니라고 자책하면서 민방위라는 신분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현실주의자가 됨으로써 영화를 더욱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화관이 폐허인 것은 그때문입니다. 어느 밝은 날, 문이 열리고, 시네필들은 46초 동안 공장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마침-







[1] 프랭크 커머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조초회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3) p.95.


[2] 질 들뢰즈,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유진상 역, (서울: 시각과언어, 2002)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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