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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3. 2021

거대 서사의 죽음, 불가능성으로서의 영화

넷플릭스를 필두로 OTT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분절형 영상 콘텐츠도 늘어나는 추세다. 분절형 영상 콘텐츠란 ‘몰아보기’를 전제로 하여 만드는 중소규모의 영상 콘텐츠를 뜻한다. 한국에서 만든 <킹덤>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런 영상 콘텐츠를 우리가 알던 관점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 이 분절의 형식이 기존의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 포맷에 주로 이용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근래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스토리텔링이나 촬영기법 등에서 영화를 흡수하고 있다. 드라마로 봐야 할지 영화로 봐야 할지 구분이 잘 안가는 게 많아졌고, 우리가 기존에 알던 방법론들이 광범위하게 무력화됐다. 물론 이런 현상이 근래에 들어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애니메 감독 오시이 마모루도 영화적 연출을 애용했고, 게임제작자 코지마 히데오는 영화적 연출에 집착했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에서는 ‘영화’가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던 반면, 근래의 OTT 영상들은 ‘영화’와 본격적으로 융합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을 말하기 위해 영화의 껍질을 빌려오느냐, 아니면 영화란 무엇이었는지를 기리며 그 유지를 계승하느냐의 차이(토마스 엘세서)라 할 수 있다. 


안시환 평론가는 OTT의 이러한 특성을 ‘영화의 흔적’이라는 말로 정의한다(“씨네 21, 구독형 OTT 플랫폼에서 상업적인 흥행의 주체는 누구인가”, 21.10.13). 근래의 OTT 영상 콘텐츠는 매화마다 작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종국에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대신, 영화를 드라마의 형태를 빌려 말한다”는 점에서 이를 ‘타협한 결과’라고 지칭한다. 이어서 “큰 이야기는 영화의 잔영”이라 말하며, 작은 이야기를 엮어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 영상 콘텐츠에 의문을 품는다. 작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큰 이야기로 나아가는 일은 정형화된 성장의 구도이며, 이는 곧 서사의 패턴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원피스>를 예시로 들며 잘 지적하듯이 어떠한 반복에서 생성이 나타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처사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에 어떤 패턴이 생겨날 때 그것은 예측의 범주로 편입된다. 헌데 그렇다면 이렇게 ‘예측’ 되는 콘텐츠를 보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콘텐츠는 미지의 세계를 접하고 탐험하는 모험일 수 있다. 다른 한편, 자신이 예측한 게 빗나감에서 오는 모종의 행위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OTT 영상들을 보며 얻는 쾌감은 둘 중 무엇인 걸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후자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영화를 ‘거대 서사’로 정의해야만 한다. 반복되는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영화의 역할은 드라마가 영화로 나아가는 것, 즉 ‘서사 덩어리’여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OTT 영상 콘텐츠가 남긴 영화의 흔적을 ‘서사 덩어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일련의 톱니바퀴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만들어내듯이, 영화란 이 이야기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OTT 영상들에서는 비교적 시간의 진행이 원만하거나 순탄해지는 경향이 있다. 반복을 통해 생성을 끌어내는 작업은, 급진적인 파고의 깊이가 아니라 완만한 조수간만의 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OTT 영상들에 영화의 흔적이 있다고 말할 때 불거지는 문제가 이 대목이다. OTT 영상들에서 시간의 진행이 매체의 특성에 의존한다면, 그 안의 이야기도 그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OTT 영상들에서는 서사의 진행을 통해 인물을 성장시키기보다, 외적 형식의 지연과 차연, 반복과 생성을 통해 궁극적인 이야기에 다다르게 된다. 안쪽의 느린 일상이 바깥의 반복을 통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탐구해야 할 쟁점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웹툰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웹툰이라는 형식에서 대두되는 건 위와 아래 사이의 단절이다. 위 칸과 아래 칸 사이에 놓인 2mm 정도의 작은 틈은 이것이 분할된 컷임을 말해준다. 즉 웹툰의 형식에서 틈의 역할은 위와 아래 사이에 시간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웹툰에서 이 틈은 찰나에 벌어지는 일을 여러 형태와 각도에서 조망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하나의 장면에서 벌어지는 순차적인 동작을 여러 컷에 나누어 작성함으로써 독자는 “시간이 움직인다”라는 점과 “시간이 멈추었다”라는 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른바, 영화를 보며 영상이 점멸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정지된 2차원의 매체인 웹툰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웹툰은, 영화와는 정반대로 가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시간이 단절된다는 점을 계속 숨기려 하는 반면, 웹툰은 시간이 연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줄곧 역설한다. 그렇다면 웹툰은 왜 자신의 시간을 드러내야만 했을까. 그건 바로, 느린 일상 때문이다. ‘한편’의 웹툰이 아니라 ‘한화’의 웹툰은 관람에 필요한 시간이 너무나도 짧아서, 단순히 본다는 것만으로는 그 안의 시간을 흘러가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웹툰 전체가 하나의 선처럼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연출은 대개 액션 장르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연출이 나올 때면 댓글 창에는 으레 이런 말이 달리곤 한다. “분량 너무 짧은 것 같은데요?” 컷이 없는 연출에서 분량을 객관적으로 따지기도 어렵지만, 이런 현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틈’이 없을 때 웹툰은 더 짧게 느껴진다는 점일 테다. 영화가 ‘틈’이 없을 때 그 안의 내용이 더 길고 무료하게 느껴지는 반면, 웹툰은 ‘틈’이 없을 때 짧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웹툰이 무료한 일상에서 잠시 시간을 보낼 요령으로 소비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마이너스 요소다. 바꾸어 말해, 영화는 무료한 일상에서 잠시 시간을 잊을 요령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그 안에 시간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제 OTT 서비스로 다시 돌아가서, 이곳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살펴보자. 위에서 우리는 OTT 영상 콘텐츠를 두고서 다음처럼 지적했다. OTT에서의 시간은 안쪽의 무료한 일상과 바깥의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두 가지 면으로 구성된다고. 다시 말해서 분절된 영화는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 사이의 틈을 통해 작동한다. 


웹툰의 측면으로 보면 OTT 영상 콘텐츠는 ‘분절된 영화’라 볼 수 있다. 첫 번째, 일상에서 더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면 영화는 분절되어야만 했다. OTT 영상을 영화의 측면으로 본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줄곧 강조함으로써 일상을 더 길고 무료하게 만들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OTT 영상 사이의 틈을 인지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는 일상을 더욱 ‘길고 무료하게’ 슬로우 모션으로 느낄 수 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영상 콘텐츠를 재밌게 보려면 일상이 더 길고 무료해야 한다니? 하지만 영화의 측면에서 길고 무료함은 그 연속성에서 틈이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 말해서 일상에서 마땅한 탈출구가 없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해 OTT 영상 콘텐츠는 영화에 탈출구를 접목한 형식일 수도 있다. 이에 따르자면 OTT 영상 콘텐츠는 영화가 시대에 맞추어 자신을 타협한 결과물이 아니라, 시대에 맞추어 진화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서 한 편의 영화 안에 모든 것을 몰입한다는 건, 그동안의 변화를 놓치거나 혹은 대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즉 영화를 보면서도 일상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형태가 바로 OTT 영상 콘텐츠다. 


위에서 “예측한 게 빗나감에서 오는 쾌감”이라고 지적했던 대목은 이를 뜻한다. ‘일상’이라는 말은 자기 삶의 패턴이 정형화되어서 근미래가 쉽게 예측될 때를 지칭하며, 그래서 일상은 무료하다. 과거와 현재, 근미래가 모두 하나의 시간선으로 합쳐져 버림으로써 체감되는 시간은 길고 무료한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진다. 문제는 그렇게 ‘슬로우’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일상은 과거, 현재, 근미래의 틈을 없애기에 오히려 우리를 더 잘 미끄러지게 한다. 보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 위에서 우리는 미래로의 가파른 스케이트를 탄다. 오늘날 영화는 이러한 측면에서 경쟁력이 없거나 부족하다. 어느 플랫폼에서 보든 간에 영화는 시간 위를 미끄러지고,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삶의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즉 영화를 보는 일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삶의 의의를 집중시켜야 할 하나의 구심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영화를 보는 일이 내용과 의미를 예측하는 것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하는 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도 일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OTT 영상 콘텐츠의 경우, 그러한 내용을 예측하는 일에서 일상을 하나의 보철로 끌어들인다. 


진정으로 서사의 진행이라 할만한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고, 이렇게 진행된 서사를 들고서 영화라는 거대 서사로 모험을 떠나는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OTT 영상 콘텐츠가 보여주는 하나의 경향이 “서사가 현실과 융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메타버스라는 말이 현실-기반 공동체(Reality-based Community)를 암시하듯이, OTT 영상 콘텐츠에서 영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거대 서사에 제동을 거는 작은 이야기의 존재를 암시한다. 거대 서사가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거대 서사는 작은 이야기가 모여드는 무대가 될 수도 있다. 거대 서사에 존재하는 틈은 이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이 틈은 우리가 눈으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쪽은 아니다. 과거에 영화가 현실과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현실의 대안 혹은 현실의 대피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실 위에서 서사 덩어리인 영화를 발견할 수 있지만, 영화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될 때 세계는 시간을 잃게 된다. 그리고 시간을 잃은 세계는 “시간이 움직인다”라는 점과 “시간이 멈추었다”는 점 모두를 느낄 수 없게 됨으로써 자신이 보고 듣는 감각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영화는 정보 집약적인 영상 매체가 됨으로써 자신에게서 현존의 감각을 분리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거대 서사’의 죽음이라 말하는 것의 실체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거대 서사에 이끌리기에 벌어지는 참사”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거대 서사의 죽음”이라는 말이겠지만. 이는 이야기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불가시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게 거대 서사의 죽음이다. 위에서 내가 OTT의 형식을 두고 웹툰을 언급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웹툰이라는 형식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칸과 칸 사이의 공백도 작품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웹툰을 볼 때 독자는 칸과 칸 사이의 공백 동안 지나가는 시간을 자체적으로 구성하고, 또 조립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품 속의 캐릭터가 주먹을 휘두를 때, A 숏이 B의 자리에 가기까지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점은 문학이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언어를 이미지화하는 것과도 차별화되며, 정지된 도상인 만화가 평면에서 시간을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른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란히 병치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OTT의 거죽을 뒤집어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메타버스라던가 VR이라던가 하는 입체와 가상의 시대에 영화는 (비교적) 평면에 가깝다. 우리는 인터넷과 항상 연결되어 있지만 영화와는 늘 떨어져 있다는 게 둘 사이의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수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우리는 잠시 쉬고 싶을 때, 전화기를 꺼두고 영화를 보러 간다. 즉 세계와의 연결을 끊고 난 후에 다른 편에 있는 세계를 보러 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영화는 그것을 ‘보러 간다’고 의식하지 않으면 영화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말할 때는 그러한 영화로의 진입지점이 필요하다. 넓은 범주에서, 오늘날 영화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런 와중에 이것을 ‘영화’로 정의하게 해주는 건 ‘영화를 보러 간다’는 우리의 의식인 것이다. 이 의식이 바로 웹툰에서의 틈이다. 웹툰, 그러니까 만화에서 틈의 역할은 우리가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점을 겉으로 드러내어 주는 일이다. 같은 원리로 OTT 영상 콘텐츠를 영화로 본다면, 여기서 분절의 역할은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음”을 선언하는 일이다.


장면 하나를 상상해보자. 마블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이션트 원이 스트레인지의 영혼에 타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손을 내밀자, 스트레인지의 영혼이 몸 바깥으로 튀어 나간다. 그와 동시에 스트레인지는 자신이 사는 곳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같은 공간을 점유한 두 개의 시간선은 인지의 여부에 따라 그 세계를 가르지만, 틈을 인식하는 사람에겐 두 세계를 오갈 자격이 주어진다. 게임 <데빌 메이 크라이>의 닌자 시어리 버전에서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틈을 냄으로써 영화는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삶에서 “보고 있지 못하던” 것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니까 위에서 ‘영화의 진화’라고 말했던 것은 영화의 폐쇄적인 체제가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영화관이란 영화를 보는 장소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지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OTT 영상 콘텐츠가 의도하는 바는, <#살아있다>의 패턴화된 구호 신호처럼 같이 있지만 너무 멀리 있는 당신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 영화를 보면 세계가 보이지 않고 세계를 보면 영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 아이러니함이 거대 서사의 죽음이라는 현상을 낳았다고. 


가상의 영화관에서 객석에 앉아있는 영화 관객은 자신의 세계가 영화인지를 모르는 상태다. 멀리서 보면 작아서 안 보이고, 가까이 가면 너무 커서 안 보이는 게 거대 서사로서의 영화다. 이러한 상태에서 보여지는 틈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영화임을 깨우치게 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그리고 <듄>의 폴처럼 관객은 실재의 사막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다. 둘 중 하나를 꼽자면 OTT 영상 콘텐츠는 후자에 더 가깝다. <매트릭스>의 세계가 절대적으로 바깥을 상정하는 반면, <듄>의 세계에서 사막은 공간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의 장소다. 폴 아트레이더스가 목격하는 시간은 미래와 현재, 과거가 마땅히 구분되지 않지만, 여기서 그는 그러한 환영을 봄으로써 자신이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영화적 세계에서 벗어남으로써 영화의 끝을 자기 시간의 끝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틈을 통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OTT 서비스의 패턴화된 서사는 모래사막의 벌레를 끌어들이며, 화면 위로 거대한 벌레가 나타날 때 우리의 시야는 원근법에 의해 뒤로 후퇴하게 된다. 이 거대한 벌레, 서사 앞에서 나라는 관객은 그저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막은 우리를 세계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웹툰에서 얻은 교훈은 이 대목에 적용된다. 눈에 초점을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스크린에서 떨어질 필요가 있고, 이는 보이지 않게 하는 작업을 통해 눈에 보이게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거대 서사의 죽음’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크기를 넘어섬으로써 시야 밖으로 벗어나 버린 ‘불가능성으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이때 핵심은 단지 보이는 것만이 거대 서사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웹툰(만화)에서 시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움직이는 시간과 멈춘 시간이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비로소 이야기는 흘러간다. 영화가 OTT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시간과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 있다고. 영화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한편, 이러한 정보 집약적인 면모는 오히려 관객을 스크린의 수렴점까지 가속하여 종국에는 시간을 멈춰버린다. 이는 영화가 정말로 죽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가 특이점을 넘어섬으로써 하나의 개념으로 응집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뒤에서 미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정체된 정보들은 하나의 대목에 뭉칠 수밖에 없고 이 대목에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OTT 영상 콘텐츠에서 틈은 찰나의 꺼짐을 영화에 제공한다. 이는 영화 사이에 잠시 휴식시간을 주는 인터미션(Intermission)과는 다르다. 인터미션이 극장을 벗어나지 않는 반면, OTT에서의 틈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작용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러니 영화가 “이야기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라면, OTT 영상 콘텐츠에 담긴 영화의 흔적은 이런 이야기의 종착역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일 테다. 전화나 인터넷이 전자기파의 형태로 우리 삶에 체화된 반면, 영화라는 매체는 빛의 형태가 되어 점점 더 세계에 산포되고 있다.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고,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정작 그 자신은 무언가로 정의될 수는 없게 되었다. ‘광속’이라는 말처럼 세계를 측정하는 하나의 단위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켜짐과 꺼짐의 반복, 즉 0과 1의 조합인 디지털 신호로 손쉽게 변환된다. 영화를 거대 서사로 바라보는 일에는 그런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거대 서사가 무너졌기에 작은 이야기만이 남은 게 아니라, 작은 이야기를 해야 비로소 거대 서사가 유지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빛이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던 위베르만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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