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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9. 2021

RE: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모 게임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어보자. 게임 <데빌 메이 크라이>의 5편에서 버질은 염마도를 통해 ‘악마로서의 자신’과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분리해낸다. 버질은 그의 동생인 단테와의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며, 자신에게 남은 일말의 인간성을 없애면 단테보다 힘이 더 세질 것으로 여긴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버질은 그토록 바라던 힘을 얻지만, ‘강화된’ 인간성을 얻은 단테에게 패배하고야 만다. 그러나 이 패배는 ‘악마로서의 자신’인 유리즌(Your Reason)에 한정된 것으로, 분리되었던 나머지 ‘인간 자신’이 유리즌에 접촉하자 ‘버질’은 다시금 하나가 된다. 이제 단테와 버질로 마주한 두 사람은 숙명의 재대결을 펼치게 된다.


이하의 스토리에서 플레이어가 얻는 교훈이란 무엇일까. 인간성 대 악마성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 중, ‘강함’의 베이스가 되는 것은 ‘인간성’이라는 점이다. 인간성이 없다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으며, 세상을 바르게 인지할 수 없으니 성장 가능성도 사라지고야 만다. 즉, 인간성을 버린 이에겐 인간이 지닌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의식 또한 함께 버려진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는,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강함을 추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변증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이 인간성에서 시작되는 건 맞지만, 인간성만으로는 자신을 비출 거울이 없기에 돌아오는 이미지 또한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버질의 실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맹신하다가 거울 세계의 그림자로만 활동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제 인간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해 말해보자. 원은영은 마테리얼 4호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기존의 비평장 진입 구조에 부당함을 느끼거나 지금의 상태가 아닌 대안을 원하는 신진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독립 잡지를 만들어냈다. 장의 외부 혹은 경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의 관건은 지속 가능성이다.” 이 글의 논지가 비평장에서 ‘인정’받아야만 경제적인 환원이 일어난다는 것임을 고려하면,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다. 비평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려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이 읽혀야 하고, 이는 곧 자신을 ‘세일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많아야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이러한 인정은 선대의 의지를 이어 계보학적인 세계의 끝자락에 서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때의 ‘지속’이란, 가능성을 점치는 일이 아니라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사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가 환경을 두고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을 쓸 때 그러하듯, 망가진 자연을 되살리는 일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바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남겨두어야만 비로소 현재가 성립(지속)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래가 없으면 현재도 없다는 말이 성립한다. 희망을 품을 대상인 미래가 있어야만 비로소 희망은 작동한다. 


이 대목에서 언급해볼 만한 것은 이 말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보고서의 출판 제목은 바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였다. 이에 따르자면 우리가 희망을 품은 곳이 ‘공동의 미래’라는 점을, 그리고 우리의 현재에서 남겨진 게 바로 공동의 미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염원하는 게 각자 다를 수는 있어도 이런 것들은 모두 공동의 장소로 귀결된다.


예컨대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은 모종의 수렴점을 전제한다. 원근법에서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선이 수렴되듯이, 또한 먹이사슬과 생태계에서 하나의 종만이 승리하듯이, 비평장에서도 세계의 끝자락(frontline)에 선 이들만이 지속 가능성을 영유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세계의 끝자락에 선 이들 모두가 선대의 의지를 잇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삶의 끝자락에 내몰린 채로 삶을 이어왔고, 그 결과 마주한 게 세계의 끝자락이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비평장이라는 것은 링 위의 삶이 아니라 비평계라는 하나의 생태계이다. 이 생태계는 진화론의 논리를 따르며, 강한 이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이가 강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원은영의 글을 독해하면 그의 글은 너무나 비관적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논의를 빌려 오면서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장”이라는 말을 덧붙이기엔 “어떤 가치와 신념이 강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피하기 힘들다. 특히나 “제도라는 문화 자본, 혹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사회관계 자본”이라는 그의 말은, 그러한 주류 문화, 즉 ‘강함’에 자신의 몸을 의탁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치와 신념에 강함이라는 게 있는가? 부르디외의 말처럼 가치와 신념에 고급과 하급이 따로 있다면, 우리는 고급스러운 생각을 하기 위해 선생님들로부터 그러한 고급성을 인정받아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이런 말이 과연 선험적인 판단의 논리-인간성을 따라가는 비평의 원리에 부합할 수 있을까? 


비평이 꼭 선험적인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세르쥬 다네의 유명한 글인 <카포의 트래블링 쇼트>를 언급할 필요까지도 없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이 수렴점을 전제하긴 해도, 우리에게 정해진 미래는 딱히 없으니 말이다. 미래라는 것은 그저 끝내 다다르고야 마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의미할 뿐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발견하려는 걸 먼저 염두에 둔 후, 그것을 선택적으로 걸러내는 일은 “비평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할만한 일이라기보다는 “지속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옳다. 예컨대, 그것이 비평계에서 지속 가능할 만한 일이 아니기에 자연스레 도태될 것이므로 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본 것을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비평에서처럼 “보다 오래,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풍경”을 적극적으로 서술하는 일에도 문제는 있다. 마땅한 미래 없이 희망을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낭만에 불과할 수도 있다. 희망을 품을 미래가 있어야만 현재가 존재하는데, 현재만을 논하는 낭만적 수사는 미래가 없기에 지속이 불가하다. 말하자면 낭만 비평은 자신 이후의 것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이다. 자기 자신의 세계의 최후가 된다는 점에서 이는 꽤 멋져 보이기도 하지만, 지속 가능성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태도가 꼭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이런 태도는 선생님들의 계승자라기보단 생태계의 마지막 생존자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지속 가능성에 관한 두 가지 태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계승자, 다른 하나는 생존자다. 그리고 이 둘은 각각 독립적이지만 어느 한 쪽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버질의 사례처럼, 계승자임을 버리고 생존자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강함’의 베이스가 되는 게 선대로부터 인정받는 일이라 해도, 이런 일들이 자신의 ‘강함’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준다는 점은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생존의 행위는 무언가를 계승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무협지에 나오는 떠돌이 무사들이 꼭 어느 당파의 마지막 계승자인 것처럼, 혹은 <매드맥스>와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생존자들이 누군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시간을 원점으로 돌려, 인간성과 악마성을 분리하는 버질의 모습을 다시금 관찰해보자. 대악마 문두스의 수하로 오랜 세월을 보낸 버질은 약해진 힘을 보강하고자 자신의 몸에서 인간성을 분리해낸다. 이때, 버질이 남긴 세 명의 부하들은 문두스의 수하로 있던 시절의 그가 당시를 ‘악몽’처럼 여긴다는 점을 단테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버질은 악마로 사로잡혔던 자신의 삶을 악몽으로 여겼고, 그게 자기 힘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이에 따라 인간성을 도려내어 다시금 악마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악마성에 사로잡혔던 이가 다시금 자발적으로 악마성에 사로잡히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인다. 그게 설사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는 일이었다 한들, 지속 가능한 삶을 원했다면 인간성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다. 오히려 버질은 미래를 상상해볼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에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강함의 베이스가 되는 게 인간성임에도 그가 인간성을 버려야만 했던 이유는, 인간성을 척도 삼는 강함의 논리가 전형적인 인간계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논리는 인간의 가치를 계승 받은 자로서,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구성되고 인정받는다. 따라서 절박한 상황임에도 그가 인간성을 택하지 않은 건, 그런 사회에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해서다. 이런 점에서 버질의 이 태도는 기존의 비평 제도가 답 없다고 여기면서 속세를 등진 몇몇 이들의 행보와 유사하다. 살아남은 이가 강한 것이라면, 비평계를 등지고 악마성에 몰두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원은영의 말처럼 [지속]의 조건 중 하나가 “경제적 조건”이라면, 악마가 된다 한들 누가 이 사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동의 미래를 상정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악마성과 공존할 수 없다. 모두가 경제적 여건을 취하는 일도, 모두가 하나의 의견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비평계에서 강함을 인정받게 해주는 게 인간성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강함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성은 인간성과 대비된다고 여겨지는 악마성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돈이 없으면 비평을 안할 건가? 혹은, 비평을 하면서(글을 쓰면서) 꼭 돈을 받아야만(벌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의 전제는 비평계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강하다’라는 인식표가 생겨나고, 이게 없다면 제대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런 [인간성]이란 버질이 보여준 것처럼 [악마성]의 주류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본성에 더 가깝다. 


결과적으로 원은영이 스스로 진술하듯이 이러한 물음들은 “대립쌍인 것처럼 나열되었지만 대립이 아닐 수 있는” 것들이다. 비평가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일구어내는 일이 기성 비평계로부터 인정받는 일인 것은 맞지만, 이러한 일들은 모두 자신의 악마성, 즉 [비평가로서의 힘에 대한 강함의 추구]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버질의 말마따나 “내가 조금만 강했더라면 이러한 질문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을 텐데”라거나, 혹은 폭풍을 마주하는 자세에 있어서 겁에 질리거나 도망치는 일 말고도 바르게 마주해 검을 빼 들 용기가 바로 악마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버질의 실책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강함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인간성을 잊어버리고야 마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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