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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09. 2021

<지옥>이 그려내는 살아갈 만한 세상의 자리


“점점 멀어져가는 풍경의 전망을 뚜렷한 윤곽으로 드러내는 ‘창문’과 같이, 하나의 작품은 그 구조로 말하자면 그 자체로 닫혀 있으면서도 또한 어떤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림은 텍스트가 살 만한 어떤 세계를 내보인다는 데에 있다. 이 점에서, 수많은 현대 작품들이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은 견디기 힘든 세계는 결국 살 만한 세계라는 문제 의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성립된다.” [1] -폴 리쾨르-


시대가 시대인지라 넷플릭스를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데, 엄밀히 말해 이 생각은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와 관련 있다. 넷플릭스를 티브이 역사의 연장선으로 바라본다면 그렇다. 넷플릭스가 티브이라면 우리는 기존에 해왔던 일들을 고스란히 넘겨받을 수 있다. 1950년대에 티브이가 새로 등장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위협받았다는 걸 이미 배우지 않았나. 이와 마찬가지로 넷플릭스를 티브이로 볼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이것의 역사의 반복이라는 점이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현상임을 깨우치는 일이다. 헌데 그렇다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어떨까. 이야기조차 반복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를 대하는 태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미 다 봤던 거야.”라고 말하면서 자리를 뜰 수도, 아니면 “먹을 만하네요.”라고 말하면서 입맛을 다실 수도 있다. 여기서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 세계는 원래 있던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반복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부피를 늘려나가는 게 아닐까. 예컨대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며, 시간은 계속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이야기’란 일종의 창문으로서, 이곳이 어떤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단순히 그곳에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이야기라는 건 말이 되든 안 되든 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고다르가 <이미지북>을 만들면서 펀딩을 구하려 다녔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려볼 수 있다. 담당자는 <이미지북>을 두고서 “이것은 영화가 아니므로 예산을 내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없다면 영화로 분류할 수 없고, 따라서 펀딩도 불가능하다고. 물론 이 일화는 고다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이야기가 일종의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이 있는 곳에 존재가 있는데, 고다르의 이미지학이 추구하는 것도 그러하다. 고다르는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곳에서 바로 영화 이미지의 ‘존재’가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북>은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볼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만약 세계가 우주라면, <이미지북>은 흩어진 먼지들을 모아 작은 행성을 만들어보려는 영화 작가의 야심찬 실험인 셈이다.


고다르의 이런 행보는 딱히 최근 들어 대두된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그랬었기에, <이미지북>의 펀딩 거절 일화는 어딘지 모르게 아쉽기만 하다. 허나 이 일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존재가 사건이라는 말이 연대기적 시간에 의존하는 반면, 사건에 존재가 있다는 말은 탈중심적인 시간을 따른다는 점이 그렇다. 이 맥락을 따른다면 전통적인 영화 내러티브가 바로 연대기적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다르에 따르면 이미 세계는 탈중심적인 시간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영화도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리쾨르가 말하듯 이야기가 창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 이야기는 ‘열림’을 체득한다. 그러나 탈중심을 말할 때 이 열림은 일방통행으로만 동작하지 않는다. 문은 양쪽을 오갈 수 있게 해준다. 문은 양쪽을 공간적으로 이어주는 일종의 설계이며 공간이 하나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넷플릭스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게 이렇다. 시간이 ‘탈중심화’ 되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은 아니다. ‘탈중심화’라는 건 영화가 우리 일상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오늘날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눈앞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던져진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들뢰즈의 말은 (아마도)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영화는 점점 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으며, 영화라는 것의 외형은 그것과 마주함에서 태어난다. 예컨대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건 감독이 아니라 관객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사건을 그려내는 것에 더 가까워진다. 이는 즉 어떤 장소에서 그를 마주하는지에 따라 인상이 달라 보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넷플릭스는 티브이 매체로만은 볼 수 없는 듯 보인다. 티브이의 형식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편성표는 티브이처럼 선형적이고 일괄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넷플릭스를 티브이의 범주에 넣는다면 넷플릭스는 하나의 전송 매체에 불과할 뿐이다. 티브이가 오만 잡다한 것을 틀어주는데 영화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OTT에 올라오는 콘텐츠들은 외형적으로 기존 드라마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드라마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분명 기존처럼 티브이에서 방영하던 걸 OTT로 가져온 ‘다시 보기’ 형태의 극이 있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OTT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고 방영되는 ‘몰아보기’ 형식의 극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게 ‘짬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엄밀한 구분은 불가하나, 우리는 전자가 드라마 후자가 영화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킹덤>, <오징어 게임>, <지옥>, <체르노빌> 같은 건 한 편의 영화를 여러 번에 걸쳐 보게 하는 분절로 보는 게 옳다. 예전 시대에 비디오방에 가보면 <반지의 제왕>이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고 그걸 또 1편과 2편, 3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를 보면 알 수 있듯 분절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그러나 최근 OTT에 올라오는 ‘영화’들을 보면,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에 복속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유효하게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예전에는 그냥 큰 이야기를 분절했을 뿐이어서다.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일종의 쉬는 시간(Intermission) 개념으로 작품을 잘라놨다고나 할까. 반면 OTT의 영화들은 매화마다 기승전결이 있고, 여기에서 하나의 주제 의식이 파생된다. 그리고 이렇게 파생된 주제 의식들은 종국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흘러 들어가 작품 전체의 의식을 강화한다. 즉 반복을 통해 사건을 강화하며, 이러한 사건은 끝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존재’로 만든다. 특히 르몽드와 같은 외신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한국 영화의 특징을 ‘강한 사회성’으로 분석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사회성이라는 말을 소셜 미디어에서의 ‘소셜’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며 동일한 눈높이의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 이른바 “세상이 영화가 된다”라는 말의 의미란 영화를 ‘살아간다’라는 동사 형태로 이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에 복속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복종’의 의미는 아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이루어낸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존재가 되어 ‘그곳’과 ‘이곳’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준다. 이 과정에서 창문은 문이 되고, ‘열림’은 ‘닫힘’이라는 짝패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사회성’이라는 걸 ‘소셜’ 말고 ‘대의’로 이해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티브이가 보도의 반복을 통해 어떠한 일에 하나의 존재감을 부여하는 일을 생각하면, 넷플릭스 플랫폼에서의 영화들이 사회성을 띠는 것은 그런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이유는, 큰 이야기를 이루어낼 수 없는 OTT 플랫폼과 타협한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진 하나의 시간은 우리가 소위 ‘동시대’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열림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안는다. 들어가는 입구가 다르니 보는 이마다 자신이 본 것이 바로 입구라고 말하는 일은 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모든 입구가 하나의 장소로 귀결될수록 그러한 영화는 시간 위에서 하나의 사건, 즉 ‘플랫폼’이 된다. 헌데 이 플랫폼은 일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어느 사건에 더 가깝다. 사건이 있는 곳에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리쾨르의 말처럼 “살 만한 세계는 견디기 힘든 세계라는 문제의식 안에서 그려진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테다. 내가 <지옥>을 보며 했던 생각이 그러했다. 


<지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갑론을박 중 하나는 설정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CG의 질이 좋지 않다는 말 말고, 지옥의 사자라던가 고지라던가 하는 설정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에 파생되는 감정도 붕 떠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옥>이 염두에 두는 건 현실비판이 아니라 작품의 플랫폼화다. 먼저, <지옥>은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에 최규석이 기획이 접합되어 만들어진 만화에 해당한다. 여기서 만화에 방점을 찍을 수도 있겠지만, 연상호의 상상력과 최규석의 현실성이 한데 어울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더 흥미롭다. 연상호는 딱히 선을 고려하면서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다소 출렁이는 감이 있다. <염력>은 그런 출렁임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실험하는 영화였고 그래서 평가는 별로 좋지 못했다. 다른 한편 최규석은 둘리를 노동자로 그린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현실성은 개연성이라기보단 핍진성에 더 가까운 것인데, 딱히 한국 사회가 아니더라도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일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을 다룰 테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협업은 거의 말랑말랑한 부당함을 그려낸다고 보아도 좋다. 바꾸어 말해 이는 현실 세계처럼 보이지만 그에 적용되는 기준선은 확고하게 다른 세상을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옥>이 그려내는 현실이란 개인이 가진 가치관과 기준선에 따라 출렁일 수 있고, 멀미가 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허구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옥의 허무맹랑함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견디기 힘든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지옥>이 그려내는 풍경이 어째서 살 만한 세계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세계라는 뜻이지 ‘먹을 만하다’라는 뜻은 아니다. 즉,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 우리가 ‘어떤’ 대안을 찾아야 할지를 생각해본다면 바로 그때 ‘살만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일종의 방향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나는 티브이의 특징 중 하나로 창문을 꼽은 바 있다. 창문의 특징은 열림과 닫힘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점이다. 창문은 우리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과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 예컨대 <지옥>은 살 만한 세계일 수도 있지만 견디기 힘든 세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가 사는 곳은 바로 살 만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살아갈 만한 세상이란 무엇인가. 희망을 떠올릴 수 있는 자리인가 아니면 불행을 목격하는 자리인가.


<지옥>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6화의 후반부에서는 고지를 받은 아이를 대신해 부부가 지옥에 가는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를 대리해 재난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건 희망일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을 위해 희생할 누군가가 없다면 그런 재난을 온전히 겪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는 불행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은 건 특히 후자인데, 코로나바이러스가 제공하는 격리와 고립의 상황은 재난이라는 말의 특징을 강화하기도, 또한 약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고립된 상황이어서 사람들에게 더 연락을 취하게 된다. 고립은 외롭고 고독한 것이므로, 이를 달래고자 오래된 지인에게 말을 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고립됨으로써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에 생생해지기도 한다.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짐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일들에 감각을 보내고 또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염두에 두는 건 연결의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지옥>에서 고지를 받은 이들 사이의 인과관계는 고지를 받았다는 것 말고는 없다. 이들 사이는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후천적 추론이라는 약한 연결로 채워지며, 이 연결은 정말로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가상에 가깝다. 그리고 이 가상이라는 성격이 비대면 시대에 가상이라는 공간이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지옥>을 본 사람들은 길고 지루한 인터넷 방송 장면에 질려버렸다고들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화살촉을 보며 각자가 다른 것을 떠올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대입하여 화살촉 같은 게 없다면 세상이 좀 더 밝아질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런 단체가 현실에 정말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작품 내적으로는 이것이 어느 사회로의 열림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는 듯하다. <지옥>의 결말에서 멀어져가는 화살촉의 풍경이란 멀어짐과 동시에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사실 인터넷 방송이라는 게 네모난 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지옥>은 우리로 하여금 창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게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세상은 그러한 사건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점을 유의하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곳’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이 살 만한 세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걸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화살촉’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사는 곳엔 화살촉이 아니라 그런 화살촉을 떠올리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1]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김한식. 이경래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0)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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