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28. 2021

히어로 영화와 미장센의 시대


2019년에 마틴 스콜세지가 “마블은 시네마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던 게 최근 들어 다시금 구설에 오른 이유란 무엇일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의 개봉 이후 여러 인터뷰에 불려다니는 주인공 톰 홀랜드의 발언 때문이다. 스콜세지의 옛 발언에 대해 톰은 “마블 영화와 타 시네마들 사이에는 오직 제작비 말곤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톰의 이 말은 스콜세지가 했던 말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배우 본인에 대한 비난으로 번져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일에 관해서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는 편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논란이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영화의 상업성과 예술성이라는 이분법을 떠올려볼 수 있다. ‘시네필’들의 심기를 건드린 이 말은 마치 ‘마블’이 제작했던 <시빌 워>의 내용처럼, 영화 팬들의 진영을 두 갈래로 나누어 놓았다. 한쪽에 작가 영화가 있다면 그 맞은편에는 대중 영화가 있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 물음은 영화의 존재론에 연결된다. “영화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말이다. 영화의 존재론이라는 말은 우리들 생각보다 꽤 흔해 빠진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노 웨이 홈>을 되짚어보고 싶다. 먼저, 스파이더맨 프렌차이즈를 이루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영웅상은 크게 두 가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점과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디”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거진 영화에도 적용된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영화로서 가져야 할 재현의 윤리, 후자의 경우는 대중예술로서 지녀야 할 매체 근본의 원리다. 


영화를 통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영화의 힘을 경계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사실 꽤 유서 깊은 것이다. 당장 벤야민부터 그러했으니 이를 거진 영화사와 맥을 같이 하는 질문이라 보아도 좋다. 물론 영화 미학에 재현의 윤리만 있는 것은 아니나, 이미지가 넘실대는 이 시대에 ‘이미지학’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만 간다. 우리는 알고도 속거나, 혹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안게 아니었던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악당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이 그러했듯이 “고도로 발달한 CG는 감탄스러운 4K와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에서 생생하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때가 과연 언제인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히토 슈타이얼은 인터넷상에서 열화된 짤방들은 그 표면의 구질구질함과는 달리,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운송되었기에 열화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빈곤한 이미지란 사실 그 무엇보다 생생한 것”임을 역설한다. 같은 이유로 영화에서 ‘큰 힘’이란 단순히 생생함을 제시하는 이미지나 플롯만 있는 게 아니다. 이를 통해 운반하고자 하는 기의가 있으며, 우리가 책임을 물려야 하는 것도 바로 그 기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스파이더맨의 존재론이라 할 법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스파이더맨은 현대 사회에서 출처는 불분명하나 여러 장소에서 특출나게 행동하는 몇몇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만능 이미지들에 대해 몇몇 이들이 취하는 태도란 대개 이렇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생생하지만 이것을 굳이 고도로 발달한 CG와 구분 지어 보고 싶진 않다.” 다시 말해서, 이게 가짜이든 진짜이든 간에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에 잘 어울리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맥락을 따라가면 스파이더맨에 따라붙는 악질 언론인 조나 제임슨(J.K.시몬스)이야말로 되려 참언론인이 되어버린다. 수상할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이웃 스파이디는 사실 ‘큰 힘’을 지닌 만큼 큰 파급력을 낼 수 있는 허구이므로, 우리는 그를 견제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스파이더맨을 옹호하고 또 지지한다. 샘 레이미의 21세기 스파이더맨 3부작에서 얼굴이 공개되었던 스파이더맨에게 시민들이 보냈던 지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벼랑에 몰린 지하철을 구해내고 탈진한 스파이디는 골고다 언덕의 예수처럼 운송된다. 그 물밑으로는 지지자들의 운구 행렬이 있고, 이 매력적인 장면을 두고서도 사람들은 폰카를 집어들지 않는다. 스파이디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와 정반대로 스파이디는 카메라로 촬영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파이디는 사람들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소문처럼 나돌았던 빈곤한 이미지였고, 바로 그렇기에 더욱 생생했던 존재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톰 홀랜드의 말은 그러한 맥락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듯 보인다. 홀랜드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의 말을 오독할 것이다. 단언컨대 마블 영화와 시네마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히어로라는 보기 좋은 기호를 내세우는 마블 영화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의 역할과 수용을 설명하기에 더 적합하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히어로라는 이미지상에 대해 지적해보려 한다. 과거에 흥행을 보증하는 게 스타 배우였다면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들이 연기하는 대상에 더 열광한다. 사람들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라 아이언맨을 좋아하고 톰 홀랜드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 몇몇 이들은 내가 너무 속단해서 말한다고 비판하겠지만, 버츄얼 유튜버라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건 이미지다. 


버츄얼 유튜버도 결국 사람이 3D 모션 트래킹 디바이스를 통해 이미지 데이터를 불어넣는 것이므로, 그 뒤에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버튜버(버츄얼 유튜버)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배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수면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소위 말하는 빨간 약이라는 표현이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워쇼스키의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유래한 이 표현은 버튜버에게 있어 맨 얼굴이 노출되는 게 바로 [불편한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컨대 독자들이 원하는 건 그게 거짓임을 알더라도 당장은 행복에 겨운 매트릭스 세계(“파란 약을 먹으면, 이 세계에 남는다.”)인 셈이다. 그리고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나온 위의 장면이 바로 이것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가상 세계에 있지만 그 누구보다 친근한 존재.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며 사람들에게 행복과 위로를 불어넣어 주는 존재. 가면 속의 얼굴보다 가면 밖의 얼굴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존재. 바로 그가 버튜버, 스파이디다. 


다른 한편 영화는 결국 대중예술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대중이라는 단어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굳이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모 감독의 발언을 기억한다. 말하자면 영화를 두고서 죽음, 폐허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는 그러한 두 가지 맥락이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게 있고, 2)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게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위에서 논한 사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대중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있고, 대중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있다. 어떤 경우 진실은 베일에 싸여있을 수도 있지만 알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으로 보면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결코 아니다. 만약 시네마의 조건이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이것을 만들어야만 할 이유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시네마의 조건이 보지 못하는 것과 보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상황의 구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블 영화, 그러니까 히어로 영화는 히어로라는 기호를 통해 보지 못하는 것과 보려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운반한다. 


흥미로운 생각을 하나 해볼 수 있다면 히어로 영화에서 히어로의 입지가 바로 무빙 이미지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먼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히어로들은 여러 영화의 다양한 장소에 등장한다. 시각 매체에 출현하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바로 무빙 이미지라는 점에서 각각의 마블 영화는 하나의 매체이자 전시물(Exhibition)로 활용된다. 이들 전시물은 <캡틴 마블>이나 <블랙 위도우>처럼 다른 매체에 해당 캐릭터의 움직임을 예비할 요령으로 만들어지거나, <인피니티 워>나 <엔드게임>처럼 부유하는 캐릭터들의 안전한 착륙지대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들 히어로는 영화 작품 사이를 이동함과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계속해서 바꿔나가고 있다. 마치 무빙 이미지처럼 말이다. 


따라서 만약 마블 영화(정확하게는 히어로)와 시네마를 카테고리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은 존재론이다. 마블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VFX는 결국 이를 사용함으로써 영화 이미지를 더 완전에 가깝게 한다는 점에서 바쟁이 말하는 완전 영화나 다름없다. 그러나 완전 영화의 뒤편으로는 비극이 자리한다. 완전한 영웅이라는 신화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과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의 콜라보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연극(시네마)에서 배우(이미지)를 배치하는 감독들의 두 가지 성향이다. 바쟁이 발족하고 트뢰포가 이어받아 앤드류 세리스가 첨언한 ‘위대한 연출가 metteurs en scene’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작가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용어는 영화 연출에 탁월한 역량이 있으나 개인적인 성향을 첨가하지는 않는 영화감독을 뜻한다. 위대한 연출가라는 말은 영화를 개인의 팔레트처럼 사용하는 작가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사용됐고, 이 경우 미장센은 말 그대로의 영화적 순수함을 뜻하는 게 된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에 있는 것을 현실에 옮기는 게 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했던 바쟁의 말처럼 말이다. 


헌데 이러한 제작방법은 마블 영화에 대한 비판점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마블 영화가 시네마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판 중 하나는 “마블 영화는 전적으로 마블 세계관을 옮기는 것에만 치중하며, 이 과정에서 감독의 역량은 철저히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역량의 제한은 영화 작가주의를 반대하고 위대한 연출가를 지향했던 경향에 어울리기도 한다. 그리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이데아를 얼마나 잘 스크린에 옮기는지에 따라 그 역량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시네마의 어떤 경향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마블 영화가 시네마로 취급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무빙 이미지가 미장센이 될 수 있다고, 바꾸어 말해 이 영화들이 스크린과 현실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무빙 이미지이며 이 세계에 소속된 것은 결국 작가들의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우리들 관객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알지만, 구태여 뜯어보고 싶지는 않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상화된 현실, 무빙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중이 히어로 장르를 통해 마주하려는 건 그러한 가상을 들여다볼 용기인 것 같다. 히어로는 우리가 낼 수 없는 용기를 대신해준다. 히어로는 용기의 집합체이며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히어로는 세계의 곳곳을 누비며 사물과 사건 사이에 배치되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준다(호빵맨 만화처럼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나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가 히어로에 품는 기대감이다. 그러니 히어로를 두고서 무빙 이미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그리 어색하지 않다. 오늘날 이미지는 가만히 앉아 부동의 지위를 점유하기보단 세계를 횡단하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적재적소에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모종의 용기를 얻으며, 바꾸어 말해 이는 ‘환상이지만 우리가 그에 삼켜지지는 않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마주하는 이미지가 허구라 하더라도 그에 동조(하기를 선택)한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산타를 즐기는 모습처럼, 이 동조는 자발적이면서도 암묵적인 동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너는 어른이 되었으니 이러이러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해.”라는 말은 이런 놀이를 해친다. 왜냐하면 이들은 헛된 현실이라도 부여잡으면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한 허구를 자기 삶을 나아가게 할 일종의 동기(Motivation)로 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히어로’라는 건 결국 현실성을 따지기보단 믿음의 산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이 먼저 다가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그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다음 현실로 나아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환상은 깨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동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빙 이미지의 역할은 동기부여다. 최초에 등장했던 판본을 벗어나 자사의 다른 만화에 참여하고, 현대적 맥락에 맞춰 새롭게 리메이크되는 오늘날의 히어로 만화를 떠올려보자. 누군가는 돈이 되는 걸 굳이 출하할 이유는 없다고 말하겠지만, 여러 지면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이동하는 히어로들의 모습은 잡히지 않는 허구, 횡단하는 환상에 가깝다. 지젝은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 환상을 가로지르자.”고 주장했지만 그에게 환상은 좌파적 맥락에서의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그러니 이것이 환상은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을 망치지는 못한다. 


마블 세계관에 속한 영화 간에 히어로가 출연하여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이들 환상이 ‘가로지르기’를 행하고 있음에 대한 아주 확고한 증거이다. 이를테면 소위 인피니티 사가로 불리는 MCU의 페이즈 1부터 3까지를 떠올려보자. 이 사가의 주인공은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과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은 서로에게 결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장점으로 지닌 모순 관계에 있다. 아이언맨이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 하는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다른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아이언맨이 더 많은 능력이 있어야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한편, 캡틴 아메리카는 모두의 능력이 있어야 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흥미로운 대립관계는 두 사람이 어떤 영화에 출연하는지에 따라 사건의 전반적인 의미를 바꿔놓는지에 일조하며, 이에 파생되는 의미 변화란 <엔드게임>에 이르러 두 사람이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끝맺음하는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모습은 ‘결점’이라는 부정사보다 ‘협업’이라는 긍정사가 더 어울린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이 그러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적절한 경쟁관계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는 히어로와 굳이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 히어로에겐 우상(Idol)이라는 성격이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를 따라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따라잡지 않음(못함)을 전제로 하는 문화다. 말하자면 우상으로서의 히어로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무빙, 미끄러지는 환상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근래의 마블 영화를 ‘위대한 연출가 metteurs en scene’의 소산으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미디어에서 도드라지는 배치의 경향은 히어로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에이드리언 마틴이 2013년에 제안한 디스포지티브의 다양한 활용 방안은 영화 장치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런 환상을 배치하는 게 바로 영화 장치라는 점이었다. 즉, 히어로라는 환상은 대중을 영합하고 규합하는 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살아갈(나아갈) 용기를 준다. 오늘날 히어로 영화는 별개 영화가 아니라 그들 환상을 배치하는 하나의 세계로서, 동시대에 필요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적절히 조사하여 배치하는 영화 장치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미장센이라는 용어에 관한 정의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미장센이라는 말은 처음에 연극 무대 위의 사물 배치를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소품의 원근감이나 각도, 배우들의 복장과 무대 조명까지 말이다. 즉 연극 감독에게 미장센을 연출한다는 건 개인의 주관을 발휘한다기보다 세계를 건설하는 하나의 작업이었다. 무대는 하이데거식의 집이 아니라 우리들 관객이 살아갈 곳을 마련하는 보금자리의 성격이 더 강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위대한 연출가가 하려는 것은 아름다운 가상이 아니라 재난 세계에서의 대피소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 대피소는 우리가 정말로 들어가 살아가야만 할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금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곳이다. 만약 영화가 대피소가 된다면, 고도로 발달한 CG가 우리의 현실을 대체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곧 세계 전체로 확대해버리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바깥세상’에 대한 이해가 결핍된 채 어딘지도 모를 세계로 방출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결국에 운송수단에 불과하듯이, 우리가 올라탄 것은 거인의 어깨가 되어야만 한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인터뷰한 다섯 시간여의 다큐 <쇼아>를 만든 란츠만은 “그렇기에 우리가 보여줄 수 없는 게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 <쇼아>에 대해 위베르만은 “그럼에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는 게 있다.”고 말했다. 이 이미지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용기의 문제이다. 위에서 우리는 히어로를 두고서 우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신학에서 우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문제 중 하나는 우상이 과연 신(이미지)을 대리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신의 형상에 기도를 드리는 건 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련지, 신을 재현하려 드는 일 자체가 일종의 모독은 아닌 건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히어로(라는 우상)를 바라보면 우리가 해볼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생겨난다. 히어로는 1) 보기 드문 사람이라서 마주하기 어렵거나, 2)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선뜻 나서서 되기(becoming)란 어려운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무언가를 ‘선택’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우리는 영웅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그런 영웅이 현실에 있을 리 없다. 또한 우리는 영웅이 되고 싶어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영웅의 단편적인 면만을 선택하며 살아갈 용기가 없다. 


영웅은 너무 단편적인 존재라서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쉬이 택할 수 없는 인물상이다. 어쩌면 히어로 장르의 부흥이 시사하는 건 그런 점일지도 모르겠다. 재현할 수 없고, 재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그 역할을 유튜브나 티브이 뉴스가 아닌 영화로 떠넘겨버리는 것. 왜냐하면 영화야말로 스펙터클이라는 단어와 맥락이 가장 닿는 장소이기에.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내가 다뤄보고 싶은 건 최근 개봉한 <매트릭스: 리저렉션>(2021)이다.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건 부활이다. 한때 신처럼 다뤄졌던 영웅 네오가 돌아오는 이 영화는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흥행이 보장된 옛것’을 되살려낸 것에 불과한 듯 보인다. 흥행에 대한 불확실함이 이런 촌극을 자아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야를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이 말이 의미하는 게 결국 불확실함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용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불확실한 시대에 부흥하는 히어로 장르”는 아니다. 여기서 다시금 되살려보아야 할 가치는 이미지의 횡단과 전송, 혹은 전송(transfer)이다. 인터넷 인플루언서들이 범람하는 이미지의 사회에서 우상이라는 말이 갖는 값어치는 고전 스펙터클 시대보다는 훨씬 더 저렴하다. 그러나 이 저렴함은 위에서 말했듯 너무나 생생하기에 큰 힘을 갖는다. 결국 히어로라는 말은 오늘날 그렇게까지 무게감 있는 단어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생생함에서 용기를 얻는다는 점에서 과거 시대의 이미지에 대한 파괴력이나 현혹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무빙 이미지를 미장센으로 사유하는 일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만약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게 히어로라면, 우리와 이들 간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배치의 기술이 바로 시네마라 할 수 있다.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서 자동차를 타고 내리는 이의 역할이 줄곧 바뀌듯이, 우리가 올라탄 거인의 어깨에서 지평선의 너머로 보이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살아갈 용기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옥>이 그려내는 살아갈 만한 세상의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