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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04. 2022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22인 릴레이 인터뷰」의 기획 후기.

1월 2일 [웹진 PONG]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링크)


“결말이 언제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언제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결말 이후에도 기대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폴 리쾨르-[1]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들 한다. 어떻게 보면 꽤 선입견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그런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이 얼굴에 드러나므로,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평소에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가 하는 말처럼,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며 얼굴을 ‘선언’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하고 이미지에 신경을 쓰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미래를 만들어보려는 하나의 시도가 바로 ‘얼굴’인 것이다.  


못된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감추려고 가면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악인을 제외하면, 이 가면이라는 건 미래에 개입해보려는 하나의 시도에 가깝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지으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얼굴을 ‘선택’하는 일은 앞으로의 미래를 주조해보려는 노력에 가깝다. 말하자면 가면을 쓴다는 건 자신의 미래를 선취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날 가면이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용된다고 생각한다. 가면이라는 말은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일을 지칭한다. 맨 얼굴(살아온 삶)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이들이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얼굴을 선택하는 일이 바로 가면이다.


<에반게리온>에서 아야나미 레이는 신지에게 묻는다. “미안해,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자 신지는 답한다. “그럴 땐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이들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어떤 상황이야말로 진정으로 웃음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웃음을 표현하는 수사라면, 어떤 웃음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마더>와 <올드보이>에서의 웃음은 서로 다르다. 이들이 바라는 행복의 깊이를 얼굴 위의 주름이 따라가지 못한다. ‘웃는다’라는 행위가 입꼬리와 미간을 주름지게 하는 일을 지칭한다면, 그 주름이 인생의 어떤 순간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


나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자기만의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려면 무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본디 생각이란 것은 욕망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그중에서도 비평이라는 것은 비교적 욕망의 폭이 크다고 생각된다. 국어사전을 보면 비평은 ‘사물의 가치를 논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 말인즉슨 무엇을 가치로 볼 것인지에 따라 서술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아들게 된다. 가면을 만들어보려는 이가 있고, 표정을 지어보려는 이가 있다. 가면을 만들어보려는 이는 비교적 외향적인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먼저 발명하고는 그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한편으로 표정을 지어보려는 이들에겐 그런 마음이 있다. 얼굴에서 살아온 삶이 드러난다면, 어떤 표정을 짓는다는 건 우리가 ‘어떤 순간을 마주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감정이 마른 게 아니라 미루어진 미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묻는다면 단순히 ‘지능이 높아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주장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지능은 그 기억 능력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사람 뇌의 대부분이 대뇌피질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은 기억 능력을 토대로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전수해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문명이 발달했다. 그 과정에서 발명된 게 바로 글이다. 문자를 통해 기억을 물리적인 형태로 기록해두는 것, 이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주름지게 만들었다(들뢰즈). 다르게 말해 글쓰기의 행위란 우리가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평이라는 건 다름 아닌 세계의 욕망을 논하는 일이 된다. 모든 비평가는 그러한 욕망, 행복을 향해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누군가는 가면을 만들어 연단 위에 서는 한편, 누군가는 표정을 지어 무대 위에 서기도 한다.


이게 바로 비평가의 두 가지 모습이다. 정치가가 되거나, 연극배우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려는 이들은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보려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이들과 연합하기도 하고, 지지자들에게 후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돈이 필요해진다. 돈이 없어도 정치를 할 수는 있지만, 정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건 어쨌거나 돈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욕망도 자본 아래에서 움직이는 탓이다. 바꾸어 말해, 정치에 돈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욕망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잘살아 보자”라는 말을 하려면 일단은 “잘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연극배우들에 대해 말해보자. 이 사람은 얼굴의 귀재이다. 자신의 실제 감정과는 관계없이 특정한 부류의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반대로 말해 그는 자신이 짓기 싫은 표정도 지어 보여야만 할 때가 있다. 헌데 이 말은 굉장한 모순처럼 들린다. 행복을 말하려면 그것을 말할 만한 최소한의 ‘행복’이 필요하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니 ‘짓기 싫은 표정’이란, 사실 실제로 느끼는 걸 모른 체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연극배우들은 감정을 너무 잘 알기에 자신마저 속일 줄 아는 셈이다. 실제로 연극배우들에겐 감정에 대한 풍부하고 깊은 이해가 요구되기도 한다. 사랑받지 못한 이가 사랑을 줄 수 없듯이, 감정을 모르는 이가 감정을 연기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평가가 헤쳐 나가야 할 난제는 이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미래를 상상해야만 한다는 것(연극배우). 또한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손에 거머쥐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정치가). 이러한 상황에서 얼굴이란 미래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 될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지난 삶이 얼굴에 주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미래를 점칠 수 있다. 관상을 믿으라는 게 아니라 주름에서 파생되는 반복의 형태가 일종의 궤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미래는 예지된다. 나는 인간에게 ‘기억’ 능력이 주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기억에서 미래가 예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미래는 꼭 절대적이지만은 않다. 미래가 궤적의 형태를 하고 시간이 주름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가 바로 그 시간의 간격을 고무줄처럼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시간의 궤적을 회피할 수 있고, 또 간섭할 수 있다.


*


흔히들 작가는 살아온 삶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고들 한다. 얼굴이 지난 삶의 반영이듯이, 작가의 얼굴에 해당하는 글 또한 작가의 삶을 반영한다. 그래서 글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대강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맨얼굴이 아니라 그가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얼굴일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이 얼굴에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만들어가려는 미래를 보여주려는 이가 있는 반면(정치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보여주려는 이가 있다(연극배우). 더 나아가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성향을 추가해볼 수 있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말이다.  


내향적 성향의 정치가는 자신의 글과 삶을 지속시키려 하지만, 균형이 맞지 않거나 근소한 수준으로만 유지되고만 있을 뿐이다. 그는 글을 위해 삶을 산다기보다 삶을 위해 글을 쓴다. 즉, 자신이 바라고 되고자 하는 미래를 위해 글을 쓰며 이 과정에서 세상과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반면 외향적 성향의 정치가는 미래에 의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며 말하자면 글을 위해 삶을 산다. 즉,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미래와 접촉할 수 있는 글을 쓴다. 내향적 성향의 연극배우는 자신이 살아온 길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믿으면서, 표정을 연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한다. 즉, 글을 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가기에 글 또한 쓰인다고 말한다. 반면 외향적 성향의 연극배우는 웃는 표정을 지어야만 그러한 미래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표정인 것처럼 연기한다. 즉,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상의 네 가지 분류는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왜 글을 쓰는지를 엿볼 수 있게는 해준다.


이따금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우리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달랐을까. 내가 당신의 삶을 살고 당신은 내 삶을 살았을까.” 당연한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로가 점점 고립되어 가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가치는 줄곧 되새겨보아야 할 것임이 틀림없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 거의 항상 연결되어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될수록 마음은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앱, 또는 Zoom이나 webex와 같은 서비스가 우리를 연결해주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내세우는 ‘프로필’ 사진의 의미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의 가면처럼 보인다. ‘프로필’이라 함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소개할 요령으로 걸어두는 현판 같은 것인데, 세상이 싫어서든 사람이 싫어서든 간에 얼굴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 하는 이들은 꽤 많다. 나 또한 여우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두었는데, 카카오톡에 처음 가입한 이래로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사실 최근에 다른 여우 사진으로 바꿨다). 추측건대 아마 이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은 아닐까.


혹자는 그런 식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건 사람들의 표정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표정을 지을 수 있고, 같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이들이 왜 함께할 수 없는지와 왜 함께해야 하는지가 동시에 느껴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모순된 존재이고 완전히 함께할 수 없는 걸까. 어쩌면 나는 그런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미래를 거머쥐려 하는 일처럼, 세계를 알 수 없기에 세계를 거머쥐려 하는 일. 이는 마치 신생아가 허공에 손을 뻗어 달을 쥐려 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의 일은 아닐까. 정치가이든 연극배우이든 간에 비평가인 우리는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어내려 한다.

 
  


[1]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김한식. 이경래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0)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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