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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4. 2022

비평의 멀티버스는 가능한가


*콜리그에 투고한 열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617256


1.




마블 영화를 이해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놓고 악담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다. 이번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경우, MCU가 아니라 이전의 소니 영화와 협업했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가 단독 영화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혹자는, <노 웨이 홈>에 나오는 세 명의 스파이디가 각자 누구인지 몰라도 플롯을 따라가기엔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응당 옳다. 영화에 나오는 여러 위트와 오마주 된 장면은 알아보면 좋은 것이지 모른다 하여 작품을 망치지는 않는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스파이더맨을 보아야만 비로소 2020년대의 <노 웨이 홈>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안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건 단순한 캐릭터 팔이가 아니라 소니라는 타향에서 마블이라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전 세계의 스파이디들에 대한 ‘귀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 웨이 홈>은,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과 잊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양측의 예우를 차리는 영화다.




하지만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억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향해 달려가던 즘에 슬슬 나오기 시작했던 말이 “영화가 너무 많아서 어디를 진입지점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고민이기도 했다.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가 런칭한 현재에 그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데어데블>, <호크아이>, <로키>, <팔콘과 윈터 솔져>, <완다비전>, <에이전트 카터> 등. ‘유니버스’라는 이름으로 뭉친 이 이야기들은 작중에 등장하는 사건과 캐릭터를 면밀히 엮어냄으로써 짧게 지나가는 인물이라도 간과할 수만은 없게 했다. 이들 드라마를 굳이 챙겨보지 않아도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이해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는 게 사실이나, “한 편의 영화만으로 기승전결이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게 전통적인 영화 이야기 작법이었고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영화는 대개 좋은 평가를 못 받는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마블 영화들은 이를 잘 지켜왔고, 큰 줄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알아서들 챙겨보도록 ‘서브’의 성격으로 제작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렇지만 <엔드게임>의 3페이즈 이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멀티버스를 다루게 될 다음 4페이즈는 ‘필연적으로’ 복잡해질 운명을 타고났다. 한 명의 캐릭터가 여러 개의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하지만 약간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이 설정은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if’의 범주를 넘어선다. ‘if’라는 수사가 우리의 미래, 그러니까 하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반면 멀티버스 개념이 상정하는 건 그 무엇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하나다. 이렇게 보면 꽤 들뢰즈스럽기도 한데 멀티버스엔 반복이 없다. “이 세계에선 이 세계만의 법칙”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유성을 체득하는 멀티버스에선 원형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왔다고 선언하는 일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뉴 유니버스>의 모랄레스 마일스와 <노 웨이 홈>의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외견만을 공유할 뿐 서로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양쪽 스파이더맨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다르게 말해 각각의 스파이디 마다 고유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면, 이는 이 스파이더맨 프렌차이즈들이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멀티버스’는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는 OSMU와는 다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엔드게임>의 이야기가 다루었던 시간 개념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도 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질 때, 사건을 따라 두 개의 세계가 분기되어 나온다. 새로 생겨난다는 점에서 생성이기는 하겠지만 더는 이전 세계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으므로 반복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멀티버스는 거의 데리다적인 개념에 더 가깝다. 겉옷을 풀어 헤치면 그곳에는 또다시 새로운 의미가 발견된다. 그래서 이런 스파이디가 있는 반면 저런 스파이디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해체의 논리가 갖는 장점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 원점은 알 수 없지만, 이미 설정이 성립된 순간부터 그들에겐 고유성이 성립하게 되므로 구태여 그걸 증명해낼 필요가 없다. 그런 고로, 어떤 면에서는 근래의 할리우드가 추구하는 PC적 정체성에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방법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리부트라는 게 전대를 부정하는 방식이라면 소위 말하는 ‘원작’의 팬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으나, 멀티버스라고 말하면 전대는 부정되지 않으므로 딱히 반발할 거리가 없다. ‘원작’을 해친다는 말로 PC를 거부하는 게 불가능해지고, 이는 다양성이라는 말이 ‘멀티버스’라는 말에 접속되는 계기가 되어준다.




2.




비슷한 이유로 손희정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보며 들었던 의문 하나가 있다. 손희정은 이전에는 페미니즘이 대중문화에 종속되었다면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대중문화가 페미니즘에 종속된다고 말한다. 대중문화가 페미니즘을 선도하는 상황이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이고, 따라서 이를 리부트로 지칭하겠다는 건데 여기서 내가 지적해두려는 건 리부트라는 표현이 정말로 적절한지다. 문화 연구를 하면서 나도 생각해본 부분이었으나, 리부트라는 표현을 콘텐츠가 아닌 사회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유는 꽤 간단하다. 리부트는 한 번의 ‘꺼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한 번 껐다가 다시 켜는 작업이 ‘리-부팅(re-boot)’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리부트엔 단절이 필연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견지하는 입장과 그 맥락이 같지만 손희정은 그 단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냥 어둠이 있었다는, 성서와도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손희정은 문화비평가가 아니라 과학자일 수도 있다. 어떠한 현상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원리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물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고서 그걸 응용하는 경우는 우리 현실에서 생각보다 많지 않다. 허나 그럼에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리부트가 무대 삼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자 현재이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금’ 한 번 껐다 켰을 때도 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전과 같은 ‘나’라고 볼 수 있을까?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도라에몽의 ‘5억 년’ 버튼에 관한 철학과 교수의 답변을 담은 짤이 돌아다닌 바 있다. 그 숙고를 대강 설명하자면 이렇다. [눈앞에 5억 년 버튼이 있고 이걸 누르면 1억 원 정도의 돈이 통장에 입금된다. 그러나 대상자는 버튼을 누르는 즉시 아무것도 없는 공의 영역에 내쳐지며, 이 상태로 5억 년을 보내야 한다. 이후 시간이 끝나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을 때 대상자는 자신이 5억 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그냥 입금된 결과물만 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교수님의 답은 “버튼을 누른 순간 이전 세계의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이다.”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일화는 우리가 리부트라는 말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첫 번째. 리부트라는 말이 어떠한 순간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 리부트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이전과 이후의 내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는 이를 근거로 리부트라는 말에 반대 의사를 표했고, 이 물음은 이제 멀티버스 개념으로 향한다. <노 웨이 홈>과 같은 협업 영화는 하나의 IP를 토대로 한 여러 판본의 스파이더맨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데, 사실 이들 영화 사이에는 명백하고 뚜렷한 단절이 자리한다. ‘죽음의 댄서’가 있는 한편 ‘어메이징’한 친구도 있고 ‘급식을 먹는’ 꼬마도 있는데 이들을 단지 스파이더맨이라는 말 한마디로만 퉁치기엔 곤란하다. 이들 영화마다 각 팬이 있으며 서로 공유하는 스파이더맨에 대한 이미지가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그들 이미지의 ‘전과 후’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노 웨이 홈>에 등장하는 두 명의 피터와 세 명의 악당들은 서로 각기 다른 시점에서 불려왔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시간적인 틈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처지에 있는 우리와 영화 속에서 우리의 처지를 대변하는 각각의 피터들에게는 그러한 틈이 없다. 악당들끼리는 자기네가 어느 시점에서 왔는지를 일일이 통성명하지만 이 피터들은 뜻밖의 재회를 즐기기만 할 뿐이다. 이를테면 죽음의 댄서는 자신의 지도교수와 눈물 어린 재회를 하고, 어메이징한 친구는 혼쭐냈던 친구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화해하려 한다. 이 악당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행복’해지지만, 영화 안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건 결국 피터’들’이다. 말하자면 이 피터들은 시간상으로 단절을 겪지 않아서 한차례 단절을 겪고 끌려온 그들 악당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단절에 대해 말해보자. <노 웨이 홈>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팬들을 끌고 오는 방식은 세 명의 피터가 있는 시간대에서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눈물겨운 재회에서 팬들은 이들이 지금까지 스크린 안에 살아있었음을 느낀다. ‘그곳’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다시 만났다. 마치 어릴 적 보던 곰돌이 푸가 뜬금없이 내 집 앞에 나타나는 것처럼(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2018), 그곳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길이 연속될 때 단절에 대한 의식은 나름의 합리성을 얻는다. 분명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출발과 도착이 있는 상태에서 그사이의 공백은 우리의 멋진 상상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노 웨이 홈>의 빌런들은 그들이 죽던 바로 그 순간에 이곳으로 끌려왔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들은 그저 죽임당하는 위치를 갱생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영화의 서사적 작법을 위해 끌려왔을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면 죽음의 순간, 즉 단절이 일어나고 나니 어느 순간 리부트된 세계에 도착한 게 되어버린다. 요컨대 이 리부트된 세계는 그들의 갱생을 위해 마련된 단절의 순간을 묘사한다. 악당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갱생하고 다시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비평에서 ‘리부트’라는 것의 의미가 그렇게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리부트 자체만을 놓고 보면 단절의 순간을 눈속임 삼아 자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담론을 재편하는 다소 편리한 방법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멀티버스를 가정할 때, 리부트라는 말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비평에서 우리가 설득하고 바꾸어 보려는 게 바로 담론이라고 가정해보자. 리부트된 세계에 끌려온 악당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설득하려 드는 일은 어떤 면에서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이 악당들이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위기의 싹을 미리 잘라버려야 한다고, 누군가를 죽인 이가 편한 꼴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죽이려 들 때 그 악당은 멀티버스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금 등장해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가 매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해버리는 일은 그냥 무책임한 일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어디까지나 당장의 일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때 어떠한 담론을 흐름에서 빼내어 이후의 시기에 데려다 놓는 일은 그 중간 과정이 명명백백하게 검증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이전에 죽어버린 것들의 넋두리를, 지금 이곳에 피어나는 유령의 신음만을 듣게 될 뿐이다.




3.




하지만 비평의 멀티버스를 상상하는 일은 정녕 가능한 일일까.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은 마치 이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존중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리는 비겁함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명 ‘스파이더맨’을 보고 있지만 서로 관심 있어 하고 떠올리는 대상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듣는 것에 불과하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서로 다른 ‘스파이디’를 떠올리며, 자신이 손에 꼽는 모에 포인트도 확실히 다를 테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것을 사랑하는 우리는 이 하나의 현실을 헤쳐가기 위해 어찌 해야 할까. 우리가 사는 현실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 무턱대고 재부팅 버튼을 누를 수도 없다. 5억 년 버튼처럼 나 혼자만 겪는 고통이라면 모를까, 현실은 <엔드게임>의 잃어버린 5년처럼 모두가 일제히 사라지는 마법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멀티버스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는 단명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멀티버스에서 우리가 배운 교훈은, 이 세계가 어떤 형태로든 서로 이어져 있으리라는 점이다. 콘텐츠 회사들은 이들 세계관을 하나로 잇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 노력은 비평의 멀티버스를 상상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많고 다양한 이들의 세계를 하나로 모아 같은 세상에 뛰어들 수 있게 해주는 것. ‘어메이징’한 스파이더맨이 쫄딱 망해서 그 흔적을 지운 새로운 스파이더맨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노 웨이 홈>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멀티버스를 즐길 수 있는 건 오직 그 모든 일들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점, 이 역사에 벌어졌던 건 리부팅이 아니라 ‘다른 한편에는…’이라는 가정임을 명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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