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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31. 2022

영화와 현실의 흔적: 마모에 관하여

근래에는 마모라는 말을 생각해보고 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영원해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서서히 낡아가는 중이라는 것. 여기서 중요한 건, ‘마모’라는 말에 이전이 없다는 점이다. 바위를 예로 들어보자면 우리는 바위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건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즉, 마모라는 말은 계속해서 낡아가는 상태와 과정을 조망하지만 그 이전의 것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은 계속해서 마모되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것을 잊는다. 앞쪽에 새로 생겨나는 내가 있다면, 뒤쪽에는 줄곧 사라져가는 내가 있다. 헌데 이런 식으로라면 나라는 존재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가 의문이다. 이전의 나를 죽이며 이후의 나를 상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줄곧 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기억에 대한 인식인 걸까, 아니면 외견상으로 보여지는 몸에 관한 걸까. 몸을 이루는 기억을 뒤에서부터 차분히 삭제해간다면 종국에는 지금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존재는 사라지고야 만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은 “지금의 내가 연결되었다고 느끼는 만큼의 시간’이 바로 나라는 존재라는 점이다. 지금의 내가 5년 후의 미래를 가정한다 한들, 그 5년 후의 미래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런 계획을 세웠던 나는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렇다면 의지를 실현하는 건 과연 누구일까? 아니, ‘무엇’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과거에서 출발해 온 기억의 흔적을 따라 살아갈 뿐인지도 모른다. 최초에 벌어진 폭발만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우주처럼, 우리는 그저 과거의 관성을 따라 미래로 나아갈 뿐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지금의 우리를 움직이는 건 과거의 나다. 우리는 과거를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거는 여전히 기억의 그림자로 남아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현실은 언제나 기억의 그림자였고 우리는 꺼져가는 빛처럼… 그저 소멸을 향해가는 것일 뿐은 아닐까. 이 말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게 뻗어 나갈 미래를 긍정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짊어진 숙명과 그에 따른 과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처음에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그 점에서 인간 존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영화엔 러닝타임이란 게 있고 이 두어 시간여의 시간은 화면에 담긴 기억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각각의 영화는 모두 시간 안에 고유한 존재, 즉 개별자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늘 시작과 끝을 지니고서 시간 안을 이동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고유한 기억을 품으며, 인간과는 달리 완성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존재란, 정말로 고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모라는 말을 곱씹을수록 내면엔 그런 의문이 싹텄다. 만약 영화 한 편을 생성의 맥락이 아니라 소멸의 축에 놓는다면? 이 영화는 새로운 이야기나 흐름을 선보인 게 아니라 이제 막 사라질 것이 최후의 반짝임으로 명멸한 것뿐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디스토피아는 자원이 고갈되어 인류가 지구를 탈출하는 게 아니라, 새로 생겨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소멸해 가는 망각의 디스토피아다. 입출력의 균형이 무너져버리면 어느 순간 입력보다 출력이 더 강해지는 때가 오고, 그때 우린 이미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면, 이 열정은 금세 고갈되고야 만다. 들이는 노력만큼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일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많은 이들이 처음에 세웠던 목표와는 점점 다른 길을 걷게 되는 현실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아주 굳센 다짐으로 시작했더라도 어느 순간 자신이 본래 꾸었던 꿈을 잊어버리고야 만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처음에 했던 마음가짐만으로 줄곧 추진력을 유지하기란 힘든 법이다. 목표를 향해가는 일은 단순한 마음가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어떠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로부터 계속 멀어지고자 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추진력의 의미에 해당한다. 즉, 추진력이란 반발력인 것이다.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는 이 현상은 무언가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손을 비워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우리가 무언가 되고자 할 때, 이런 마음가짐은 무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것과 같다. 과거의 나, 나약했던 나, 무엇이든 간에. 말하자면 우리의 다짐은 미래로의 목표 설정이 아니라 과거에서 멀어진다는 ‘반발력’의 힘이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려 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멀어지고자 할 뿐이다. 나쁜 과거와 좋은 미래는 기억이라는 점에서 동등하지만,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과거를 지불하고 좋은 미래는 품 안에 간직하고 싶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나쁜 과거를 지불할 때 좋은 미래는 나쁜 과거의 자리로 이행한다. 즉 모든 것이 한낱 과거에 불과하며 우리가 미래를 떠올리는 방법도 바로 과거에 있다. 다른 한편 이런 생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모든 게 과거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단지 과거에서 도망치는 것뿐이라면, 우리의 운명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시작 지점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지는 것뿐이라면, 영화를 보는 일은 결말에 대한 저항, 미래를 예측해보려는 시도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예측될 수 없다. 우리가 미래를 인식할 때 그건 이미 우리의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이때 과거는 탈락된 열정과 같은 방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불결함’이 된다. 


그런데 만약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시간이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바꾸어 말해 시간이 없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마모’라는 말의 중요함이 여기에 있다. 마모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하지만(시간에 따른 좌표값을 없애버리지만) 바로 그 점에서 우리가 나아갈 미래가 ‘정해지지’ 않게 한다. 과거가 없을 때 비로소 미래는 사라지며, 우리를 속박하던 시간관념은 이제 깨어진다(사건은 양자가 대립하는 중간항에 자리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깨어질 때 이른바 ‘바깥’이라 부르는 외부도 사라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보았을 때 다음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마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억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동안 우리를 규약하던 절차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 말은 완전한 망각에 접어들자는 게 아니다. 현실을 폐허로 만들기보단, 미래로의 진일보를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즉 반발심을 갖자는 말이 현실을 다 포기해버리자는 뜻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미술작가이자 미디어 활동가인 히토 슈타이얼이 말하길, 20세기의 미디어 지형에서 가장 큰 변화는 수평 원근법에서 수직 원근법으로의 이행이라고 한다. 지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이들은 항공과학의 발달 덕분에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세계는 입체라기보단 평면에 더 가깝게 사유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발달이 불러온 변화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과거 시대로의 회귀다. 신에 대한 일괄적 묘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투사 원근법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다시금 그러한 일괄적 묘사의 시대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감각의 척도가 다시금 몸이 되었다는 점이다. 시각을 통해 거리를 잴 수 없게 됨으로 인해 몸은 주요한 감각의 중추가 된다. 눈을 통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야의 판판함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몸을 통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추락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역시 추락이라는 말을 창공에의 실패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추락은 몸의 견고함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세계의 완전함과 연루된다. 


불행히도, 항공과학의 발달이 불러온 것은 우리의 미래가 오로지 폐허로만 남을 뿐이라는 결말이었다. 상공을 활동무대로 삼는다는 말은 지상 또한 이제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항공과학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마모의 세계에 다가설 수 있었다. 새로이 생겨난 지구촌이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점점 좁혀나가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의 양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증식하는 기억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즉 우리는 무엇이든 되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너무 많이 마모되어 버려 원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에 회의감이 들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는 상태. 바로 이곳에서 우리 시대의 대안이 싹튼다. 세계를 파국이라던가 소멸이라던가 하는 무서운 말로 설명하려 드는 일은 역설적으로 우리 세계의 지난 기억들을 선명하게 만든다. 무력화된 눈의 세계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건 어떠한 기억 없이 등장하는 몸, 현실에 앞서 미래로의 열린 방향에 서 있는 우리의 몸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몇몇 곤란한 상황 중에는 기억과 연관된 것이 참 많다. 자기 전에 문득 예전에 있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난다거나, 이제는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린 옛사람을 다시금 마주하게 될 때가 그런 부류다. 이때마다 우리는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기억을 마주하는 현재의 자신을 더 원망하곤 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미 있었던 현실의 흔적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기억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미 그것이 흔적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안다. 또한 그런 흔적을 쫓는 이들의 모습이란 과거에 얽매일 뿐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 안에서 과거는 똥이나 오줌처럼 ‘더럽고 불결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에서 떨어져나온 잔흔이라는 점에서, 한때는 생명이었지만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았다는 점에서 아브젝트(Abject)라 부를 만하다. 과거는 항상 현재와 공존하고 있음에도, 말하자면 우리의 몸에 깊숙이 결부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과거에 빗금을 쳐서 한시라도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한다.  


누군가 과거를 추하고 더럽다고 여긴다면 십중팔구는 그에 대한 거부감 탓이다. 우리는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받았고 큰 틀에서 볼 때 이는 위생과 같은 결벽증에 결부된다. 처음 보는 물건에서 낯선 이의 흔적이 느껴질 때 우리는 그걸 더럽다고 생각하며, 이는 단지 사물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이 겪는 삶의 경험에 대해 ‘중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지난 정권의 잔재는 서둘러 치워버리는 게 좋다는 식으로 멀쩡한 물건을 부숴버리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는 아마도 다음과 같다. “기억은 순수하고, 고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순수함과 고결함이라는 말을 오인하고 있다. 만약 기억이 라이프니츠식으로 이해된다면 처음에 이것은 순수하거나 고결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말해, 기억이 단자로 이해된다면 그 순수함과 고결함에 안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을 것이다. 애벌레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처럼,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이합집산이다. 동시에 기억은 어떠한 흔적을 뒤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전진하는 소화계의 연동운동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모든 기억은 고결하고 또 순수하기에 더러움이라는 속성을 ‘획득’한다. 


헌데 기억이 연동운동을 따르는 것이라면, 인간 존재는 그저 흔적에 불과한 게 아닐까? 눈에 비치는 세계가 가장 순수한 기억의 형태에 가깝다고 가정할 때, 그런 형태가 뇌에 저장되는 일은 그저 잔상을 보존 처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흔적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가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자아라고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런 기억의 그림자, 흔적으로만 남은 것들에 대한 목격담에 불과하니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그동안 ‘나’라고 알아왔던 존재엔 구심점이란 게 없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에 대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끝내는 기상천외한 존재에 이르게 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구심점 없이 주변부와 주변부의 계열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은 마치 프리즘처럼, 매 순간 다른 면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겪는 불행 중 다수는 이러한 점에 대한 오인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기억에 구심점이라는 게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기억은 이곳과 저곳에 걸쳐 널리 흐트러져 있고, 그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는 몸은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게끔 해줄 뿐 그 자체로는 어떠한 기능도 없다. 


미술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매체를 두고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발견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의견을 따른다면, 우리의 몸이 단지 기억의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발견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은 충분히 가능하다. 즉 우리의 몸이 바로 매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몸은 자아와 세계를 중계하는 지대와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떠한 기억은 잊고 다른 기억은 선명히 기억하는 걸까? 그건 바로 세계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별들의 사이가 아무런 운동 작용 없이도 멀어지는 이유가 바로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이듯, 우리의 세계도 살아가며 점점 커지기에 가만히 있는 기억이라도 몸이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기억이 선명하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바로 곁에 서 있는다면 기억의 사이가 멀어지더라도 발밑의 것들과는 멀어지지 않는다. 허나 만약 기억이 영원불멸하다면 우리의 삶은 피폐해져 버린다. 기억이 불멸하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기억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 우리의 삶에는 변하지 않을 순간이 있으며 이는 곧 모종의 ‘결정론’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학자 톰 거닝은 영화를 두고서 “현실의 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영화가 만약 세계의 기억이라면 영화를 본다는 행위 또한 주변부의 흐름, ‘인상들’이라 할 수 있을 테다. 허나 거닝의 지적처럼, 영화에 대한 인상이 현실과 늘 일치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의 삶에서 영화가 항상 ‘과거’로서 관측되기 때문이라면, 기억이라는 건 언제나 현실에 대한 인상 즉 잔흔일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도 현실에 닿을 수 없는, 그저 결정된 운명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죄수의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이동함으로써 그런 기억과 현실에서 멀어질 수 있다. 현실은 변하지 않고 기억도 변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달리 말하자면 이 공간의 척도는 바로 시간이며 시간에 마모된다는 건 바로 그 점을 의미한다. 마모는 우리가 무언가와 멀어지는 동시에 무언가에 다가섬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있는 만큼 바꿀 수 없는 미래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오히려 그러한 단단함이 우리가 나아갈 길의 전과 후를 지지해줄 것이다. 


중력은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동력원이다. 몸을 아래로 잡아주는 그 무게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의 기억도 그런 식으로 점점 가라앉아야만 비로소 제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예컨대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기억은 늘 항상 무언가에 대한 기억이었고 다시는 생기를 띠지 못한다. 흔히들 기억이 ‘마모’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모라는 말은 기억을 이루는 구심점이 있고, 이 주변부가 시간의 영향 아래 점점 깎여나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몸에 대한 불안정,  유동하는 지대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며, 이런 가정에서 기억은 개변의 가능성이 있지만 바꾸어 말해 외부의 간섭에 쉽게 변형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마모’라는 건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해 이전의 자신을 잊는다는 점에서 진보라는 말과 분리가 불가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충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허울 좋은 변명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지구 상의 것 중에는 늘 수평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것쯤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영원한 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의 몸만큼은, 그 자아만큼은 영원하길 바란다. 아마 이런 모순이 기억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모든 기억이 마모의 영향 아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억이 영원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거와 같은 평면에 고정되어버린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언뜻 보았을 때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이 모든 사태는 결국 우리가 몸이라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마치 게임에 접속하려면 자신이 조종하는 캐릭터나 사물, 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억들에 접속하려면 자신을 외견으로 드러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해왔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나’라고 부를 만한 건 그런 기억들 사이를 채운 형체 없는 관계들, 뉴런의 외양에 더 가까운 무언가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기억이 면밀히 얽힘으로써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나’라는 건 사라져가는 기억의 합집합이 아니다. ‘나’는 영원불멸한 기억 사이에 교차하는 것들에 관한 교집합이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근처의 기억들에 위치 정보를 송수신하여 그에 하달받은 좌표로 자신의 지위를 파악한다. 이를테면 사람이 점점 한 사람의 몫이 되어감을 뜻하는 어른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는 그가 이루어낸 기억들의 관계가 사회 전체의 기억, 생명체의 형태를 한 뉴런의 구조에 잘 녹아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어른이 되어 간다는 말은 사회가 요구하는 구조와의 친화력에 관한 것이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부과되는 책임의 총량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있게 해주는 하나의 토대이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는 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여태까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은 유전자 단위에서 사유되어 왔고,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정해졌다는 생각은 우리의 우주를 그저 꺼져갈 뿐인 암흑으로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정된 사건, 기억으로부터 하달받을 때 운명이라는 말은 비로소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립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을 단지 소모할 뿐인 것에 그치는 게 아니길 바란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여러 사람 간의 관계가 운명이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았으면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해, 모든 게 결정되었다는 말은 피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어디까지나 다른 기억들의 헌신 덕택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세계가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안에 내가 있다. 따라서 기억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있을 수는 있어도 좌표계를 형성하는 기억의 가능성에는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 세계가 하나의 닫힌 우주라면 기억들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할 뿐 그 안의 것들은 결코 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이 소중하다거나 하는 식의 말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런 기억들이 없을 땐 지금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를 상상하기란 몹시 어려운 법이다. ‘나’는 결국 어떠한 사건들의 의해 만들어진 좌표, 반향된 세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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