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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6. 2022

이 시대의 시네필이 지켜내려하는 건


개인적으로 시네필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단 의구심이 든다는 표현이 옳겠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게 시네필이라는 단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좋아하면 좋아했지 굳이 증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 여하튼 시네필이라는 말의 어원부터 알아보자. 흔히 시네필은 1950년대 프랑스 작가주의 영화 열풍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알려졌다. 시네필들은 자신이 발견한 영화의 어떤 경향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고, 이 토론회는 어느 순간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생겨난 그룹을 새로 지칭할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시네필이었다. 즉 시네필은 외부와 내부를 분리할 요령으로 설계된 단어였다. 나는 이 분리가 시네필 커뮤니티의 짙은 폐쇄성과 연결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이 폐쇄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세간에 이 폐쇄성은 일반인과 영화애호가를 서로 분리해 바라봄으로써 영화 예술에 대한 향유와 그에 따른 전반적인 가치의 고양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네필들에겐 ‘대중 문화 산업’으로 인식되는 기존의 영화를 작가주의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는 영화 산업에 대한 이성주의적 비판 즉 “대중을 기만하고 선동하는 허위 예술(아도르노)”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에 시네필이라는 말은 일종의 영화 운동이었고 이는 누벨바그라는 시대적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대로 가다간 ‘영화’가 소멸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이 경우, 시네필이라는 말에 부여되는 폐쇄성은 일종의 무장색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시네필은 몸에 무언가를 두르지 않으면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너무나 가녀렸고 그렇기에 더욱 공격적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영화를 둘러싼 세간의 인식이 변함으로써 ‘폐쇄성’이라는 말을 재고할 여지가 생겼다. ‘작가주의’라는 말이 영화 교과서의 가장 첫 번째에 자리하고 대중 교양의 영역으로 넘어간 오늘날에 영화란 의심의 여지 없는 예술이다. 시네필들이 대항하고 추구했던 목표는 이미 이루어져 버렸고, 본래대로라면 이 집단은 해체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시네필은 여전히 존속한다. 오늘날 시네필이라는 말은, 그들이 본래 대항하려 했던 대중 예술이 형체를 잃은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애호의 속성만을 지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폐쇄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 애호에 관한 것임을 추론해볼 수 있다. 이제 폐쇄성이라는 말은 핍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폐쇄성은 자신이 애호해야 할 것을 지정하는 것에 사용된다.



지켜내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할 규범을 지정하는 것. 나는 이게 오늘날의 시네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유사한 사례는 한국의 독립 영화 담론이다. 한국에서 독립 영화라는 말은 군부로 대표되는 정권에 대항하여 자체적인 미디어를 확보하는 것, 즉 ‘정치적 행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후 군부 정권이 물러나고 영화를 비롯한 문화 전반에 탄압이 사라지자 이들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독립의 대상이 사라졌다면, 독립영화는 이제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그냥 영화라고만 불러도 충분한 게 아닐까? 어쩌면 독립영화는 이제 무언가를 독립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적 취향, 사회적 담론, 광학적 무의식을 발견하여 그것을 하나의 개체로 유지시키고자 한다. 투쟁의 대상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다시금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영화가 그저 대중예술의 일환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게 했다. 계속해서 영화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 신경증은 외상이 사라졌을 때 내면에 깃들어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영화의 예술적 지위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지만, 영화가 예술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끊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화와 운명처럼 엮었던 시대에서 벗어나 영화를 자신과 운명으로 엮을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자 한다. 천편일률적으로 서사를 받아들이던 시대를 벗어나 자기 안에서 세계를 발견하는 시대로 향하는 것, 근대 문학 세계를 가로지르는 이 결정적인 변화가 영화에도 적용된다. 주체는 이제 세계 안에 속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먼저 발견함으로써 세계 안에 있는 주체가 발명된다. 오늘날의 관객은, 영화 안에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추론해보기보단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영화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브컬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데이터베이스론을 주장하면서 장르라는 개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영화 비평가인 유운성도 이와 유사하게 영화는 점점 SNS의 해시태그를 닮아간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의견은 이제 영화에 의해 독립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독립시키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고 이는 오늘날의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영화 관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위는 감독의 의도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영화 한 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영화 비평은 의미를 조합하는 게임이 되어가고 있고, 이곳에서는 텍스트보다 파라텍스트가 더 의미를 얻는다. 텍스트만으로는 풍부한 서사를 만들어갈 수 없기에 그 주변부의 것들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로운데, 이말은 곧 ‘나 자신만으로는 고유성을 획득하지 못하니 주변부의 것을 끌어다 쓰겠다.’는 뜻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네필은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보는 나 자신”에 관심이 더 많다. 영화와 나 사이를 이어줄 어떤 개념적 고리가 요구되며, 이 과정에 끼어드는 건 잡음이다.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한 나머지 잡음이 없으면 세상에 홀로 내쳐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건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극장 안에서 상상적 공동체로 메워질 때, ‘주변부’는 자신의 고유함을 설득하는 논리가 된다. 하지만 극장이라는 공간 밖에서 공동체는 상상되지 못하며, 형체 없는 대중은 만연하는 주변부가 되어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의 고유함을 증폭시킨다. 그 말인즉, 시네필이 점점 외로워지고 고독해지는 건 영화 극장의 쇠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상상의 범주인지를 따져 묻지 않는 일은 오히려 무엇을 상상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즉 상상의 범주가 더 넓어졌기에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게 된다.



‘영화’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란 역설적으로 영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마땅히 구분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요컨대 영화가 죽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타인의 의견을 물으며, 인터넷에서 대중 일반의 반응을 찾아보기도 하고, 영화 이론을 공부해 영화를 분석해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독립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 이 소음은 세상의 잡음으로 편입된다. 목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만 그 목소리가 주목받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렵다. 익명성 아닌 익명성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실현된다. 누군가는 세상이 점점 의미없게 변해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의미로 가득차버려 잡음과 소음을 마땅히 구분하지 못하게 된 상태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을 상상해야 할지를 스스로 지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잡것인지 아니면 작은 것인지를 마땅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고자 의미의 힘을 빌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루세 미키오의 <밥>을 볼 때 그는 나루세가 아니라 #일본영화 #감동적인 #드라마 #고부갈등과 같은 주변부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드는 수많은 생각들, 이 잡것이 작은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세상으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특정한 의미, 즉 ‘특별함’을 부여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정반대로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실질적인 통계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영화가 너무 많이 나오는 현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찾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이때 영화 알고리즘 서비스의 해시태그는 우리가 영화를 찾는 것에 도움을 준다. 즉 ‘좌표’를 지정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어쩌면 영화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이란 한명 한명이 소중하고 각자의 의미가 있는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그 점이야말로 의미의 논리를 부상케 하는 현실이 된다.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가? 이것도 존중받아야 한다면 저것도 존중받아야 하나? 이러한 의미의 모호함은 현대의 악당 캐릭터들이 단순한 ‘악’이 아니라 보다 유려한 입체성을 띤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과거에는 마왕과 용사라는 이분법만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악당은 각자의 의미의 실현하려 들고 이는 곧 ‘선악에 절대적인 구분법은 없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0과 1이 이분법이라고 배웠지만 디지털 시대에 거의 모든 관념과 기계는 0과 1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분법 자체만으로는 선험적 논리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신호가 계속될 때 그 안에서 상상되는 무언가가 새로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제 더는 물질이 아닌 ‘관념적인 무언가’로 변모했다. 토마스 엘세서가 분류한 2세대 시네필에 이어 우리는 이를 3세대 시네필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극장에서의 시네필, 비디오 시대의 시네필, 그리고 이 마지막에는 디지털 시대의 시네필이라는 분류가 자리한다. 스마트폰이 MP3, PDA, 전자사전과 같은 개념을 집어삼킨 것처럼 영화라는 말은 이제 스크린, 비디오, 화이트룸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시대의 법칙처럼, ‘영화적 세계’의 켜짐과 꺼짐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로만 보여진다. 겉보기엔 무의미할 수 있는 0과 1을 수신호로 바꾸면 이제 우리는 백색공해로 가득 찬 세계에 하나의 빛으로 잔존할 수 있다. 오늘날, 영화는 현실에서 소음조차 되지 못한 채 일종의 잡음처럼 여겨지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영화가 그만큼 세계에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고독한’ 시네필로서의 자아는 영화 환경의 쇠퇴 탓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상상적 공동체에 동조함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시네필이라는 말은 오래된 수도원에 모인 비밀 결사를 연상케 했고, 어떤 면에서 이는 영화가 종교적인 맥락으로 이해되는 것에 일조하기도 했다: 어느 늦은 밤, 어두컴컴한 극장 한편으로 작은 빛이 새어나온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자신이 본 ‘환영’을 두고서 진지한 토론에 임한다. “내가 본 게 옳을까?”라는 물음은 일종의 환영주의로서 자기만의 우상을 쫓을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에 다른 점이 있다면 신이 만연하기에 오히려 신이 죽었다고 말할만한 상황에서 우상의 의미란 계속해서 무언가를 죽이려 드는 것으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실로 변환하는 일은 이러한 주변적인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다는 말이 모종의 폐쇄성으로 이해된다면, 이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일은 그러한 폐쇄 상태에서 벗어나 내부를 외부로 개방함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듯, ‘열림’은 ‘닫힘’을 동반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 대한 두 개의 서술법이다. 우리는 영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상상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시간의 순서가 하나의 평면에 늘어놓는 순간이라는 말은 사진에서 영화로 매체의 판도가 이동할 때 잠깐 열세를 보였지만, 모든 것들이 ‘디지털’로 수렴되는 오늘날에 순간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굳건해진다. 특히나 우리는 사진 안에 이미지가 있다고 보았던 사진사의 주요 논쟁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진은 대상을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세계의 안쪽에서 대상을 발견하는 이중성을 띤다. 영화에 대한 시각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영화적’이라는 말은 영화 매체의 성질이 공간에 영향받지 않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것이 보여지는 표면의 질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3세대 시네필의 시대에 ‘영화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존의 영화들이 채택했던 카메라, 필터, 색조, 조명 등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의 외화면은 영화를 지칭하는 것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고 있다. 이게 바로 디지털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결정적인 변화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그 테두리가 사라짐으로 인해 안과 밖을 해체하여 세계와 융합되었다. 즉 영화는 ‘표면’이 되었고 이 표면의 질감을 쫓는 일이 시네필들의 주된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 표면은 우리를 둘러싼 걸까, 아니면 우리가 무언가를 감싸려 들기에 생겨난 걸까. 아무쪼록, 이 시대의 시네필들이 지켜내려하는 건 자신의 눈에 비치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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