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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2. 2022

무장소의 장소성, 유사-시네필의 시네필리아화

1.


유운성이 말하길 유사-시네필(pseudo)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이론을 앞세워 영화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들에게 날을 세우는 종교적 순결주의, 다른 하나는 영화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이론과 사유 전반에 관심을 두는 학문적 딜레탕티슴이다. 이 중 후자에 관해서는 평소에도 줄곧 고민해왔던 점이라 괜스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가령 “언제든지 교체, 변경, 추가, 삭제될 가능성이 있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이론을 위해 시네필리아는 하나의 틀, 즉 하드웨어로만 남는 것”이라는 대목이 그렇다. 진짜 관심사는 따로 있는데 이를 위해 영화를 도구로 악용할 뿐이라면, 시네필이기 전에 그냥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근 몇 년 동안 내내 해왔던 고민이 그렇다. 영화에 푹 빠져 영화를 이루는 물질과 질료들, 배우라던가 촬영장소라던가 감독이라던가 하는 구성물들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영화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한 편의 영화(Film)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일반적인 의미로 본다면 이들이 바로 시네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뒷전으로 하고 굿즈나 수집하러 다닌다거나, 영화 관람 자체를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사랑하는 것은 내 삶과는 맞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항상 영화를 찾아다니는 시네필들의 마음이 궁금하고 또 그걸 질투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심리란 뭘까? 아니,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 걸까? 시네필들에게 영화에 대한 최대의 화두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라면, 내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쪽은 이와 마주 본 방향이다. “영화를 본다”라는 말은 어떤 맥락에서 성립될 수 있는 걸까. 사람마다 영화에 내리는 정의가 다를지언정, 그 영화에 대해 ‘보았다’는 말로 자신의 감상을 정리해버리는 일은 몹시 흔하다.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서술할 때는 ‘보았다’는 말로 도입부를 시작해야만 이후의 모든 내용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왜? 영화를 보지 않고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상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아무쪼록 영화를 ‘보았다’고 진술하는 일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시네필이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자신의 감상을 주도면밀하게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글쓰기라는 행위가 시네필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글쓰기란 자신이 느낀 바를 주도적으로 집필해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게 시네필이라는 존재의 당위가 될 수 있을까. 예전에 영화 비평이라는 행위를 두고서 “영화를 찍을 재능이 없는 이들의 한계”라고 비난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비평가는 기생충이라는 평가의 연장선에 있는 이 비난은 자신이 본 것을 받아 적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는 믿음이 그 전제에 깔린 듯하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때는 자신이 ‘본’ 무언가를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형태로 구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보았다’는 말에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영화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해서 합의된 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선주자들의 토론회처럼 “선생님께서는 이 OO를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말 그대로 영상 매체를 눈으로 보는 게 영화를 보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벤야민의 말처럼 물질의 표면에 ‘쓰인 것을 읽는 것’이야말로 ‘보았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정의가 복합적인 만큼 영화를 보는 일에 관해서도 우리는 시각의 문제로만 이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문제는 영화가 예술사의 한 부분에 자리한다는 점이며, 이는 즉 시각과 재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보았다’는 말이 예술사에 대한 의도적인 오용이 아닐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보았다’는 말을 재현의 논리와 연결해버리면 영화는 결국 현상학적 잔존의 결과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와 동시에 현상학적으로 변해버린 영화는 개인의 감상과 주관을 모두 주어진 세계의 결과물로 치환해버린다, 고 비판한다. 유운성이 말하는 유사 시네필의 사례 중 전자가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영화에 대한 믿음을 무언가로 증명하려 하는 일 자체가 앎에 대한 무지의 행위라고 말이다. 그러나 만약 시네필이 무언가를 ‘본다’는 사람이라면 유사-시네필이란 유사-재현의 행위라는 말에 다름없게 된다. 그리고 유사-재현이란 것은 잔잔한 수면만을 볼 뿐 그 안의 폭풍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에 들어가는바, 영화를 더 잘 알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모험을 떠나보아야 한다는 탐험의 논리로 이어진다. 시네필들이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그런 모험에 필요한 장비를 챙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운성이 말하는 두 번째 유사 시네필의 사례가 생겨난다. 모험 자체를 즐기게 되어서 어느덧 영화는 일종의 장소에만 그치게만 되는 경우가 있다. 승패가 아니라 희열감을 위해 전투에 임하는 전투광처럼, 유사 시네필은 영화를 자신을 위한 도구 삼는다. 


모험, 혹은 여행의 특징 중 하나는 장소가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 삶의 주변부, 흔히 일상이라 말하는 것에서 장소는 자신의 통제하에 놓여있는 공간이다. 반면 여행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장소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장소에 자신의 통제권을 넘겨주는 행위다. 비유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화를 본다는 말을 그런 맥락으로 사용하고 싶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자신을 자신이 보는 풍경 안에 데려다 놓는 것, 즉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잘 보기 위해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일이란 떠날 장소에 대한 사전 답사, 혹은 배경 지식에 대한 학습 정도로 볼 수 있을 테다. 헌데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장소에 대한 사전 준비를 하는 게 나쁜가? 알 수 없는 사고의 위협이나 장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고자 미리 공부를 하는 일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장소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을 때는 그저 흔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전혀 새로운 광경으로 보이는 사례를 우리는 몇몇 알고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듯, 어떠한 형태로든 관광이라는 행위에 담긴 의미란 단순히 ‘보고 싶다’는 선에만 그치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예전 시대에 사람들은 바닷가의 해변에 서서 건너편의 대륙을 상상했다고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상상의 영역에만 그쳤다. 하지만 글로벌리즘이 보편화된 오늘날에 대륙의 경계는 무너졌고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건 오직 언어뿐이다. 이는 곧, 영화의 장소적인 속성보다 언어적인 면의 대두가 도드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에 지역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이제 매체가 아닌 정치적 담론의 형태와 결합하고 그 외의 부차적인 속성은 모두 영화 언어의 역할로 환원된다. 사실 이는 존 포드의 서부에서 앙드레 바쟁의 「영화 언어의 진화」가 쓰일 무렵에 이미 진행되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 지역성(locality)이라는 말이 안(제1세계)과 밖(제3세계)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만 환원된다는 점에 있다. 예전 시대에 우리는 장르라는 말을 선호했지만 오늘날에는 속성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장르라는 말이 하나의 대분류라면, 속성이라는 말은 일종의 단자처럼 꺼짐과 켜짐의 스위치로 보인다. 즉 이 영화엔 어떤 게 있고 없다라는 식으로만 작품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체계는 단일하지 않다. 그 안에 수많은 스위치의 조합이 이 영화 언어를 구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유사-시네필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생겨난 이유는 단순히 영화 이론, 혹은 영화학의 안착과 연결된다고만은 볼 수 없다. 영화 이론을 더 잘 접할 수 있게 된 오늘날의 환경이 그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영화가 더는 장소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영화는 의미를 품지 못하게 되었고, 공동체를 이륙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가나 단체라기보다는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운성이 말한 유사-시네필의 두 가지 형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면으로 연결된다. 첫 번째, 영화에서 종교적 순결주의라는 건 오히려 자신을 종교적 순수성에 귀의하게 한다. 그 장소,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인 무장소성에서 자신이 발견한 어떤 ‘밝음’을 하나로 총괄하는 주체, 어둠 속을 횡단하면서도 그 안에 밝게 존재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종교적 순결성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를 도구 삼는 딜레탕티슴적 시네필의 사례는 영화와 삶의 대결이 아니라 바로 그 영화 안에 자신의 삶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에 귀인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를 자기 삶의 일부 삼는 게 아니라 영화의 분열에서 자기 주체의 환영을 목격한다. 


미하일 얌폴스키의 말처럼 영화의 형식주의가 현상학적 판단으로의 전회를 위한 발판이었다면, 이 형식주의란 장소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첫 번째 증언이었을 테다. 영화가 묘사하는 현실은 진실이나 허구이기 전에 영화라는 하나의 관문이 되어야만 비로소 양측을 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관문이 의미하는 것은 일종의 문턱인바, 현실과 환상 간에는 전환의 순간이 있으며 이 둘이 무차별적으로 혼합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표현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의 순간임을 말해준다. 어떤 점에서는 다시금 ‘쓰인 것을 읽기’라는 벤야민의 말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순간이란 세계와 주체 사이의 맺음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란 우리가 그 장소에 있음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불투명함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유사-시네필이라는 말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을 대체한다. 영화가 하나의 장소로 파악될 수 없게 되었듯이, 시네필이라는 말도 그 자체로 불투명한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2.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반례로 헤테로토피아를 주장한 푸코의 사례는 이러한 유사-시네필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을 줄지 모른다.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푸코의 이 말은 현실 안에 분명 존재하지만 지정학적인 이유로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장소를 가리킨다. 헌데 이 지적은 흡사 무장소성이 곧 장소성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시네마를 가리키는 듯 보이지 않는가? 장소라는 말을 ‘주변에 보이는 사물을 통해 자신의 현 위치를 규정할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한다면, 별다른 장치 없이 자체적으로 스크린에 현전하는 오늘날의 영화란 ‘무장소’라 부를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온라인상에서의 드러나는 이미지부터 OLED와 같은 발광 소자들의 교집합으로서의 디지털 시니어지가 이에 해당한다. 꺼짐과 켜짐이라는 기본 원리에 의존하는 이 이미지들에선 시각의 밖에서 시각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 ‘드러내어짐(Awakening)’이나 ‘떠올림(Re-call)’의 맥락이 더 조명된다. 이들은 형식을 통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며, 장소를 통해 하나의 주체로 특정되는 게 아니다. 이들은 그저 저승 너머에서 이승으로 불려 오기만 할 뿐이다. 


지옥은 우리가 분명 알고 있는 장소이지만 현실 안에서 뚜렷한 지역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옥은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높이의 고저 차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입선출 형태로 죄인을 분류 및 배치하지는 않는다. 지옥은 연대기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현실에 드러나지 않음을 통해 자신을 현실에 드러내는 헤테로토피아다. 즉 지옥은 은총과는 다른 형태로 세계에 만연해있지만 그 작동원리는 기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작동하는 것이다(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 왜? 지옥이 있으니까). 이른바 무장소성의 장소성, 그렇다면 “시네마는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이기도 하고 그러한 시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에우리디케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날 영화가 촉각성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아지는 건 이러한 규율에 따라서가 아닐까? 문제는 이 제언이 우리가 영화를 고고학의 맥락에서, ‘연대기’로 파악할 때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헤테로토피아를 연대기를 통해 파악하는 일이 가능한지를 먼저 물어야만 한다. 연대기 없는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연대기를 끌어오는 일 말이다.


무장소를 증명하기 위해 장소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은 몹시 아이러니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장소가 아닌 것은 장소가 ‘있던’ 자리에 생겨나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에 자생성을 불어넣을 위험이 있을뿐더러 반대와 모순 관계를 혼동하는 일이다. ‘없음’이라는 말이 곧 ‘있음’의 반대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이 영화 매체의 소멸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은, 기원전과 기원후의 분류만큼이나 영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영화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진보에 관한 믿음이 우리의 세계를 지탱해왔다. 즉 우리는 인간을 세계에 대입했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개념으로 역사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인간’과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영화사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했다.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서 지적했듯 ‘필름’과 시네마를 이어주는 것으로 영화사를 택해버리고야 말았다. 허나 필름과 시네마를 구분 짓는 일은, 자칫하면 필름은 시네마의 일부이고 시네마의 존속에서 필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시각적인 의미에서 필름은 자연을 인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곧 영화를 자연의 반대방향, 자연을 ‘없음’의 위치에 두는 것은 아니다. 만약 영화가 ‘있음’의 장소라면 자연은 ‘없음’의 무장소가 되어 영화의 발생을 곧 기원으로 삼아버릴 것이다. 이 경우 영화사는 제로에서 시작되는 것, 0을 원년으로 삼아 1로 나아가는 여행이 된다. “요컨대 영화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완전함의 추구가 바쟁이 말하는 창조에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시간의 역사 즉 연대기를 위해 영화의 발생을 일부러 원년 삼았다는 의심을 피해 가기란 힘들다. 영화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영화의 발명까지 진격해야 한다는 바쟁의 말은 앞으로 생겨날 미래의 시간을 우리들의 과거 몫으로 남겨두니 말이다. 쉽게 말해 바쟁은 영화 발명의 당위성을 현시대의 진보에서 찾는데, 이는 멈춤이라는 행위가 곧 영화 이전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영화 매체를 역사의 소용돌이 안으로 집어넣는다. 프리즈 프레임의 막다른 골목이 사진적 이미지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처럼, 멈춰버린 필름을 마주하는 것은 다시금 시네마 탄생의 자리, 역사가 끝남과 동시에 새로이 시작되는 자리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의 종말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다시금 탄생의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다시금 시간을 리부팅하는 것, 의도적인 죽음(La petite mort)을 맞이하게 하는 일이 앙드레 바쟁이 말하는 미라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장소와 무장소에 대한 실마리 하나가 등장한다. 시간이 정지하는 자리, 그 막다른 골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아닌 장소다. 그리고 장소가 있기에 무장소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결국 시네마의 유구한 이론, 장치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의 맞은편에 영사기가 있다는 주장은 눈에 비치는 세계가 곧 우리와 세계 사이를 설명한다는 편리함에 의존한다. 허나 세계가 그저 빛의 반향에 따른 굴절 작용일 뿐이라면, 영화를 유물론에 따라 영혼으로 파악하는 일도(에이젠슈테인), 형이상학에 따라 만연하는 빛으로 파악하는 일도(앙드레 바쟁) 모두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관객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세계는 어떻게 장치가 될 수 있을까? 세계는 결코 관객의 무의식을 반영하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가 선험적으로 살아가는 공간이며 이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은 무장소로 남는다. 


라스 폰트리에의 <살인마 잭의 집>에서 지옥은 가치 판단의 장소라기보다 무빙 이미지의 한 면을 보여준다. 즉 지옥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어딘가로 향해가는 여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란 형식이나 장소, 혹은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저 불려 오는 것, 과정에 더 가깝다. 영화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게 아니라 0에서 1로 향해감으로써 얻게 되는 여러 경험들의 총체이다. 바꾸어 말해 영화, 시네마에는 ‘영혼’이라는 편리한 진술을 적용하는 게 불가능하다. 만약 ‘시네마’를 영혼에 빗대어 진술한다면 우리는 육체와 장소의 선험성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모두와 얽히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진보와 의지의 상징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게 된다. 죽음도 극복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영화의 기계적인 속성에 결부되는 과정은 철학이라기보단 시네필들의 자기표현에 더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무장소성이 영화의 존재론적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만은 볼 수 없다. 앙드레 바쟁에 따르면 오히려 영화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를 애호하는 것과 영화가 존속하는 것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심지어 바쟁이 총체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조차 이것은 완전 영화의 신화, ‘불완전하기에 비로소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진보라는 신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이 문장에서 중점은 불완전도 완전도 아닌 ‘진보라는 신화’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진보란 신화인가? 우리는 보통 영웅적이고 알 수 없는 일, 일어나기 힘든 사건을 두고서 신화라는 수사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허나 모든 신화가 곧 진보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전장에서 목격한 여러 신화는 그 사실만으로 전쟁을 진보라는 맥락에 소속시켜버리고야 말 것이다. 물론 위기의 순간에 발하는 몇몇 능력들이 있을 수는 있겠다만, 필름이 영화의 진화 과정에서 탈락되는 게 필연이라는 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몇몇 인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허접하기 짝이 없다. 또한 디스포지티브라는 하나의 제언이 오늘날 영화 연구의 한 부류가 되긴 했지만, 이조차 시네필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온전히 충족시켜주진 못한다. 디스포지티브라는 매체 연구는 “비평적 판단을 중지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이런저런 작품과 작가에게 모두 제각각 자리를 할당해주는 관제사”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비판을 듣기 일쑤다. 


영화가 하나의 장소로 특정되어야 한다면 그곳엔 공간을 점유하는 주체가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데, 영화는 관객에 의해 관장되는 공간이 아니며 어쩌면 세계의 일부로서 선험적으로 존재해오던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를 노릇이다. 요컨대 영화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완결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응결점이다. 결국 헤테로토피아와 현실을 이어주는 건 그저 믿음에 불과한 듯 보인다. 해변에 선 우리는 바다 너머에 신세계가 있으리라고 그저 믿기만 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건 그러한 무의식을 의식하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무장소를 장소화하려는 움직임이 영화의 종말에 대한 일종의 게토화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의식의 의식화는 고전 정신분석과는 또 다른 맥락을 갖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따라서 유사-시네필의 시네필리아화란 무장소에서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가 죽음에 대한 애호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무장소를 애호한다는 건 필멸자로서의 자신, 즉 영원불멸한 이미지가 아니라 꺼짐과 켜짐을 반복하는 명멸하는 이미지의 사태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3.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신이 죽은 땅에 대해 말한다. 이 두꺼운 책에서 요점만을 말하자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함’의 반대편에 ‘없음’을 두지 않는데, 인간의 본질이 개인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없음’은 ‘존재’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이 존재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무(無)’의 세계는 있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무(無)가 하나의 ‘존재’로 있는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사-시네필의 정의를 ‘무장소 애호가’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순히 영화의 종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혼융되는 이 시대에 ‘죽음’이라는 표현은 특정 불가능함, 형용 불가함 등을 의미한다. 즉 죽음이라는 말은 ‘있음’의 반대편에 있는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영화의 죽음은 ‘영화가 있지 않음’이라는 부재를 지시하며, “있어야 할 것이 없음”이라는 점을 통해 그러한 부재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 부재의 정서는 부재의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러한 부재를 우리 현실 안에 드러낸다. 영화를 정의하기 힘든 시대에 되려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늘어나는 것엔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무장소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유토피아의 성격이 아니라 ‘없어야 할 것이 있음’이라는 헤테로토피아의 성격에 더 가깝다. 현실 공간의 안쪽에 있지만 공간의 현실에서는 바깥쪽에 자리한 이 장소는 오늘날 ‘시네마’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와 유사하다. 이들은 ‘공간’을 점유하려 들지만, 이동성의 발달로 인해 공간의 점유가 사실상 불가해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영화’는 그런 플랫폼을 거쳐 가는 것 중 하나로 전락한다. “영화와 운명처럼 엮였던 시대”는 끝나버렸고, 이제는 만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평생 제 짝을 만날 일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시네필이란 영화와의 의도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영화에 대한 애호만을 본다면 그렇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시네필은 영화관이나 영화제처럼 영화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는 운명처럼 엮이기를 기대하는 일이 막연한 욕구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줄곧 만남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높은 행동력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남을 추구하는 것만이 곧 시네필의 증표인 것은 아니다. 장소가 사라진 현실에서는 어디에 가야 영화를 만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람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와 장소상실』에서 오늘날 장소는 좌표 그 이상의 것이며, 위치를 점하는 것들의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시네마는 영사기와 관객, 스크린 등의 장치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볼 수 있는 장소, 혹은 그들과 관계하는 방법에 관한 의미 있는 현상에 가깝다. 우리가 영화 부재의 증표로 ‘시네마’를 꼽았을 때, ‘시네마틱(영화적)’이라는 말은 ‘없어야 할 것이 있음’이라는 유령의 수사였고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보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대외적으로 그 사실이 공표되지는 않거나 또는 지양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적 순간’ 혹은 결정적 순간이라 부르는 것을 느껴 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대개 냉소 섞인 비웃음일 것이다. 단순히 허세를 부린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지만, ‘시네필’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런 시네필을 지향하려는 태도가 뜬구름처럼 느껴져일 수도 있을 테다. 운명 같은 만남을 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망상하지 말라고 말하는 현세대의 연애관처럼, 시네필이라는 말은 영화와의 만남이 불가해짐이 아니라 영화와의 관계 맺음이 정형화된 시대에 정말로 낭만적인 게 된다. 예컨대 시네필이라는 존재의 멸종은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오늘날의 현실과도 관련이 있는 셈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돌려 말하지 않는다면, 영화와의 관계는 헤퍼졌다. 한 편의 영화가 소중했던 시절은 소위 말하는 MZ 세대라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시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므로 앞으로도 다시 오지 않을 세기에 이미 끝나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는 일상의 여러 면에서 익숙하고, 체화된 채로 우리 곁에 머물렀고 끝내 우리는 ‘모든 곳에 있는 영화’를 지칭할 말조차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영화가 모든 곳에 있다면, 그건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를 특정할 방법이 없다면, 그러니까 영화를 겉으로 구분할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영화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영화는 무장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영화라는 장소에 머물렀지만 오늘날에 영화는 다른 무언가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인문학을 배우고, 컴퓨터 코딩을 배우며, 밈을 소비할 요령으로 관람하기도 한다. 또한 한 편의 영화는 본편으로만 감상되지 않고 주변부의 것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이는데, 이는 한 편의 영화가 갖는 확장성이라기보다 무(無)를 채워넣으려는 마음가짐에 따른 물 붓기의 행동에 더 가깝다. 


세상에 만연하기에 되려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종교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허나 종교에서 은총이라는 말이 ‘만연’이나 ‘총체성’이라는 말과 결부됨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는 영화에 종교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지대의 유동성을 정체성의 확립에 대한 불안으로 치환하는 일이 완전히 들어맞는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시네마를 관객과 영사기,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파악하는 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네마를 하나의 형식, 혹은 장치로 여기는 일은 자기반영성과 그에 따른 반향을 이용한다. 이는 영화를 물질의 집약체 즉 총체로 파악하게끔 했고,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논할 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나머지 부분과 그에 따른 고유의 영역, 테두리를 상정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자신의 위치를 특징짓지 못하는 현대 미디어 환경 속에 무력화된다. 반향정위는 신호의 발신지와 수신지가 일치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말이다. 영화의 정의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상황에서 영화가 장치로 파악될 수 없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장소’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되어 세상에 만연하게만 될 뿐이다. ‘영화적’이라는 말이 만연하는 세상에서는 ‘영화’라는 장소가 헤테로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이 장소는 영화사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에서 줄곧 관계 맺어지기에 하나의 연대기가 아닌, 그저 연대(連帶)로만 작동한다. 즉 우리가 말한 운명이란 것은 ‘운명처럼 만났기에’ 연대하는 게 아니라 연대함으로써 운명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직조의 행위이다. ‘무장소에 대한 애호’란 그러한 연대를 의미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화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영화는 주변부에 의존하게 된다. 운명 같은 만남은 기대해볼 수 없지만, 다른 경로로 최대한 많이 관계 맺음으로써 그러한 확률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화하기’라는 건 ‘영화’에 다가서기 위한 발걸음이다. 우리가 영화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하기는 영화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영화와의 운명 같은 만남을 재현해보려는 제의이다. 그러니 유사-시네필이 무장소를 애호하는 건 ‘있던 게 사라지고 남은’ 폐허에 의존하면서 옛 영광을 되살려보려 시도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있음’의 대안으로 영화라는 무장소를 택한다.  


다른 한편 “영화가 관계하는 희망이란 스스로의 사라짐을 통해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유운성은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영화적’이라는 말로 불리는 스펙터클이라는 요소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교묘하게 건드린다. 이를테면 ‘자본은 스스로의 사라짐을 통해 세계를 회복한다’는 식으로 문장을 변형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체제로 굴러가는지조차 모르게 될 때,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전 세계적 문제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주한 시대에서 시네마의 새 체제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게 될 때, 디지털이 가져온 여러 문제는 영화 전반을 총괄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표현에 따르면, 영화와의 운명 같은 만남이 사라지게 된 현실은 그러한 순간이 사라졌다고 해서 슬퍼하기만 할 것은 아니다. 시네필이라는 영화광이 사라진 시대는 오히려 특정 소수의 인물만이 영화에 열광하는 게 아닌, 더 많고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영화에 열광하는 시대다. 즉 시네필리아의 죽음이란 장소의 사라짐이 아니라 무장소의 생성에 중점을 둘 때 비로소 희망적인 게 된다. 


우리가 무장소를 폐허로 이해할 때 이것은 절망적인 대안 없음의 징표가 된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다는 진단이 마치 유령처럼 떠돌듯, 영화의 미래는 어둡고 이제 영화 매체를 특정하는 건 단지 관객과의 관계일 뿐이라는 말조차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마치 전기처럼 만연하는 기술로 이해할 때, 영화는 비로소 바쟁이 말했던 ‘마법’이 될 수 있다. 바쟁의 미라 컴플렉스는 흐름을 빗겨나가자는 탈구된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흐름’으로 이해하는 시간의 개념 밖이 ‘비존재’가 아닌 체화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니 만약 시네필이 찾아 헤매는 게 영화에서의 결정적 순간, 시간이 멈추고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선사하는 시간이라면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성이 증대된 오늘날에 시간이 멈춘다는 말은 정지가 아닌, 정지에 가까울 정도로 빠른 찰나의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성이 증가할수록 우리는 소통의 기회를 더 많이 얻지만, 그런 와중에 깊은 관계를 찾기란 예전 시대만큼이나 어렵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시네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를 ‘없음’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에 두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유사-시네필이다. 단지 시네필들만이 부재의 정서 근처를 어슬렁대기만 할 뿐이며, 운명에의 속박은 이제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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