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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8. 2022

죽음을 겁낼 권리


지난 2월 24일 새벽,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 사실이 슬픈 이유는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두 번째로 주목받은 전쟁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전쟁에 관심이 쏠릴 때, 일각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나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문제 등에는 침묵하던 국제 사회가 강대국 사이의 문제에만 관심을 내보인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 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먼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두보이며, 이들이 패배할 경우 다음은 자기들 차례가 될 것이라는 EU 측의 계산이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겪어본 바가 있기에 이들에게 우크라이나는 일종의 ‘입술’ 같은 것이었을 테다. 한편으로는 중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한 신냉전 시기의 자유주의 진영이 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 등의 나라는 지리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들의 이념에 따라 움직인다. 즉 진영으로 얽혀있기에 자기들의 일부가 위험하면 그쪽을 지원해주고, 반대로 우리가 위험할 때는 같은 진영으로부터 지원받는다. 


70여 년 전에 전란을 겪었던 한국으로서는 남 일 같지가 않으리라 생각된다. 6.25전쟁 때 한국 측에 도움을 준 서방진영(주로 미국)의 논리는 자유주의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러시아의 반대권 행사로 무산되었지만 한국전에서는 UN이 참전했고, 이들 대부분은 미군이었다. 한편으로는 북한을 도왔던 중국의 논리가 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EU가 보여준 것처럼 북한이 무너질 시 자신들의 턱 밑에 적국이 생긴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EU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 참전을 못했다는 점뿐이다. 어쨌거나 우크라이나 침공이 우리에게 말해준 분명한 사실은 젊은 세대가 겪은 첫 번째 전쟁(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여러 장소에서 걸프전이 시사하는 바를 배웠지만 그 의미를 섬세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중계된 전쟁이라는 등의 수식어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교과서적인 것으로만 남았다. 카메라 끝에 렌즈가 달리고 전쟁이 마치 게임처럼 변해버렸다는 식의 비판 말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1990년에서 32년이 지난 2022년의 우크라이나는, 이라크의 현대전이 아닌 그보다 이전 시대의 재래식 전쟁을 수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개전 열흘째(03.06)의 전황에서 ‘현대전’이라는 말은 미군을 가리키는 고유 용어임이 드러났다. 1990년과 2003년에 이라크에서 있었던 일들은 그로부터 20여 년 지금에서도 여전히 현대전을 가리키는 고유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현대전이라는 말은 일종의 고유명사가 되었고 이는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게임’이라는 말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 게임이라는 말에는 긴장감이 없다. 게임은 죽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최초의 게임인 PONG이 동전 수집기로 첫선을 보였던 것처럼 ‘Continue’라는 말은 게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마찬가지로 걸프전에서 미군의 사상자는 아군의 오폭을 제외하면 단 3명에 불과했다. 적군을 수만 명 죽인 것에 비하면 경이로운 교환비로, 말 그대로 ‘게임’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즉 이 전쟁에서 미군은 비디오 생중계와 같은 통신기술 말고도 ‘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맥락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 이 전쟁은 두 가지 의미에서 게임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우크라이나 측의 결사항전 의지이다. 코미디언 출신으로 화제가 되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는 말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리더로 자리 잡았다. 이 말은 마치 게임과도 같은 현대전에서 그러한 전쟁을 겁낼 권리가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현대전이라는 말은 압도적인 무력 차나 기술 발달의 결과물을 기대했던 러시아 측이 아니라, 그러한 위기로부터 자신들을 발견해낸 우크라이나 측에 적용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통해 기억을 하나로 응집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들의 염원을 하나로 모으고 있다. 두 번째는 이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들에 관한 것이다. 아랍의 봄 사태에서 트위터와 같은 인터넷 매체가 민주주의의 수호와 세계인의 결집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저널리즘이 아닌 하나의 게임처럼 소비되는 일이 있었다. 전쟁의 사건사고에 배팅을 하는 사설토토와 같은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흥미와 희열을 가져다주지만 이 모든 감정은 죽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게임이 지닌 불멸의 속성은 분명 사진이나 영화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게임이 지닌 불멸의 속성은 자신이 흘러가는 시간에 속해있지 않음, 즉 동시대에 속하지 않음을 전제하기에 발생한다. 우리가 잠시 현실을 살다 와도 게임 속 데이터는 그대로이며, 접속하지만 않는다면 이들의 시간은 있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바꾸어 말해 게임은 ‘기록’의 산물이다.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는 것을 점수매겨 순위를 기록하게 하는 것도, 세이브와 로드를 도입해 게임의 진행상황을 기록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말이다. 즉 게임을 하다가 캐릭터를 삭제하더라도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게임은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 본인이 된다. 캐릭터는 이들 시간의 어떤 선상을 살아가게 해줄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캐릭터는 시간 안에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좌표계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기억은 모두 바깥의 플레이어에게 있다. 


말하자면 게임이 지닌 불멸의 속성에서 죽지 않는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기억이다. 게임이 지닌 수행적 측면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과거에 기억을 보존하던 위치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물질적 매체였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에게 기억의 보존 의무가 위탁되며, 이는 게임이 쉴 새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다르게 플레이어만큼은 그런 죽음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즉 죽을 수 없음이라는 말은 ‘죽음을 죽음 할 수 없음’이라는 이중 피동사다. 그리고 이는 사라짐에 대한 사라짐의 불가능성, 즉 ‘잊을 수 없음’을 뜻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면 전쟁의 참상은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전쟁의 이미지라는 게 파괴된 거리와 늘어진 시체 조각이기에 겉으로 드러내거나 공유할 수 없기도 하다. 맥락이 배제된 시신은 고깃덩어리, 혹은 살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기에 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백번의 소문보다 한 장의 이미지가 더 큰 호소력을 갖는다.


물론 지금 나는 전쟁에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사망한 군인 사진이나 불타는 시가지의 모습을 자주 들여다보아야 함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젤렌스키의 말처럼 우리에겐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모 사례처럼, 다른 나라의 전쟁을 그저 게임처럼 대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 죽음이란 되돌릴 수 없고 그래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은 그러한 죽음이 벌어진 무대의 바깥에 선 우리가, 적어도 플레이어는 아니더라도 관찰자로서 할 수 있는 참여수단 중 하나다.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우리가 그러한 기억에의 망각이 이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죽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잔혹한 것만이 전쟁의 참상이라 여기지만, 오히려 그렇게 자극적인 면을 내세우는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감각을 무뎌지고, 또 죽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통각은 게임을 많이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억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앗아가게 될 테다. 


게임을 많이 하면 사람을 잘 죽이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일지를 잘 알고 있다면, 전쟁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참혹한 이미지에 무뎌진다는 말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칼에 많이 찔린다 한들 세계가 잔혹하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결국 무뎌져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다. 우리가 전쟁에 관심을 갖는 일이 꼭 사망자 규탄, 현지 파병,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 등의 집단행동으로만 나타날 필요는 없다. 히토 슈타이얼이 말하듯 우리는 너무 “과한 세상에서, 인터넷이 죽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전 지구적 시대에 지구 너머의 사건은 유튜브와 같은 대안적 매체에 의해 끊임없이 밀접접촉되지만, 별 다른 알맹이 없이 껍질만으로 다가오는 이런 이미지의 소비 속에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기억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란 그러한 이미지의 전쟁일지도 모른다. 걸프전에서 전쟁은 티브이를 통해 생중계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전쟁을 생중계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기에 역설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으리라고 말하는 일은 우리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그러니 우리는 늘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사실과 지우고서 매번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넣는 일은 지식의 부재로 이어지지 않는다. 젤렌스키 말처럼, 죽음이라는 개념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죽음에 대항할 수 있다. 죽음도 불사하며 전쟁에 임하겠다는 젤렌스키의 말이 우크라이나의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건, 대통령의 리더쉽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 때문이기도 하다. 게임에서 ‘죽는다’라는 말은 캐릭터가 실제로 죽음으로써 현실의 플레이어에게 영항을 미치는 것이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리는 일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으로만 지향된다면, 그 실체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의식을 집약할 곳을 잃고야 만다. 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그런 죽음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즉 죽음 이외의 것들을 죽임으로 인해 다시금 죽음으로 후퇴할 수만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죽음은 기억할 수 있는 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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