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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0. 2022

영화이론에의 매혹은 무엇을 위해

*콜리그에 투고한 열한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638325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꽤 흔하다. 영화를 좋아하다 보면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영화 이론이 모든 길의 중심에 서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를 제작하던 이들은 영화를 더 잘 찍고 싶어서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영화를 더 잘 보고 싶어서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 순서만 좀 바뀔 뿐, 이들 모두는 영화 이론을 거쳐 무언가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영화 이론을 공부하고 나면 과연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사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을 때, 그걸 더 잘 다루게 되리라는 점은 쉬이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선 영화를 예술이라고 지칭하던 말에 제동을 걸게 된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길, “영화는 문맹인 인민들에게 글을 대신해 감흥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영화는 한 편의 시와도 같으며, 이는 운율(편집)과 심상(몽타주)으로만 구성된다. 즉 언어 이전에 영화가 존재한다. 따라서 영화는 딱히 공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잘 전달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그렇다면,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영화 보기를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인 과정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한 가지 의문점을 남긴다. 공부한다고 해서 영화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면, 영화 이론에의 매혹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과정일까?


영화 이론은 영화 보기를 위해 요구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영화 이론 공부가 일종의 수행이나 의식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론은 영화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보고 듣는 자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뒤늦게 “그래, 그렇게 해야 했어.”라는 식의 후천적 이해를 하듯이, 영화 이론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과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말하자면 영화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결코 ‘발명’된 게 아니다. 영화 관객으로 다시금 ‘발견’되는 것에 가깝다. 미디어 고고학에서 동굴 벽화를 태초의 영화로 재발견했듯이, 영화 이론은 우리의 지난 삶에 대한 고고학적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런 가정에는 삶이 영화로 등치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영화 같다’는 수사적 표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기억을 기록하는 방식,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영화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가장 처음으로 지적해볼 수 있는 건 역시 시간관념이다. 영화 필름의 1초는 우리 세계의 1초와 정확히 일치한다. 표면적으로 영화와 우리는 같은 시간에 속해 있고, 이는 회화나 사진과는 차별화되는 영화만의 고유 속성이다. 즉 영화는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동시대 의식을 달성한다. 그리고 이 동시대 의식은, 영화가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이를 관람했던 시간을 함께 끌고 들어간다.


유기물의 관점에서 영화는 우리의 지난 과거를 현재로 지속시키는 힘이 있다. 영화 이미지의 잔영은 우리가 시간을 삼킨 후에도 소화되지 않고 남은 잔여물이다. 문제는 그렇게 삼켜진 영화가 생존을 위한 지방과 동력을 제공하는 근육, 둘 중 어느 부위로 공급되는 지다. 만약 영화가 지방이라면, 우리는 ‘이미지’의 고갈 사태가 닥쳐올 때 이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다. 반면 영화가 근육이라면, 우리는 이미지의 고갈 사태에서 척박한 땅을 개간할 힘을 얻게 된다. 시간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러한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영화는 우리에게 전략자원이다. 영화는 우리 삶에서 과거로 뒤처지더라도 그 자체로 과거가 되어버리진 않는다. 과거와 미래 양쪽 모두에서 우리는 자신으로 존재한다. 즉 우리는 항상 현재를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현재 그대로인 채로 과거에 남겨지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현재를 돌아볼 권한을 얻는다. 이때 중요한 건 그런 돌아봄을 행하는 ‘나’, 행위 주체이다. 영화를 보며 얻는 몇몇 기시감은 이렇게 형성된다. 우리는 언젠가 내 몸을 이루었던 것, 언젠가 내 몸을 이루게 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을 성상화의 화가에 빗대었던 사실처럼, 영화는 이미지를 깎아 세계를 그려내는 조각 예술이기에. 말하자면 주체는 삶을 성찰하기 전에 이미 삶을 선험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영화 매체와의 일치점이 있다.


영화란 이미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할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미래를 선취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나빠지는 질적 시간의 어떤 양상이고, 우리가 자아라 부르는 것은 세계를 사고하기 위해 깎여나가는 주체의 한 모습에 불과하다. 즉 주체는 집중이 아니라 탈락을 통해 태어난다. 그래서 삶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삶은 우리가 가진 것을 깎아 내려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작업이 아니니 말이다. 결국 영화와 삶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창조가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점일 테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확실히 미래로의 진보나 희망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미래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직조하는 것처럼 이해됐기에. 헌데 삶이 우리가 가진 것을 그저 깎아갈 뿐이라면, 최초에 우리가 가졌던 재능과 힘들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영화의 경우, 필름 속의 내용물이 세계 밖에서 왔음을 추론하기란 몹시 쉽다.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생각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으로 영화 서사의 개연성을 확보한다. 비록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형되었다 한들, 이 모든 이미지의 원형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던 게 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영화는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려 했다. 영화는 자신의 한계가 바로 주어진 것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영화가 완결된 형태로 주조된 필름 공예품이듯이, 인간의 삶이란 최초에 완결된 것을 두고 싸우는 치열한 자리 경쟁이다. 이런 생각은 운명이라던가 재능이라던가 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에서 이 말은 그 용례가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현재가 중앙에 놓인 의자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시간의 경과에 맞춰 자리를 쟁탈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많은 장면은 우리가 이미 예지해보았던 것이고 단지 시의적절하게 현실로 구현되기만 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놀이가 경쟁이 아닌 게임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점이다. 게임적 세계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적 세계에서 죽음의 의미란 캐릭터 개개인의 사멸이 아니라 세계의 바깥, 게임을 꺼버린 모니터의 외화면이다. 그리하여 이 놀이에서는 자리에 앉지 못했다고 해서 사라질 인격 따윈 없다. 플레이어는 이야기의 바깥이 아니라 모니터의 밖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세계의 표면에 자리한다. 그리고 세계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게임이란 것은 계속해서 해나갈 수밖에 없는 전진의 메커니즘을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말은 영화가 쓰러트려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이 있다는 말은, 모든 영화엔 끝이 있고 이들 세계는 결국 ‘종말’이나 ‘파국’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영화는 주어진 세계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컨대,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도록 설계된 게 바로 영화 매체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서사의 형식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운명을 그곳에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용사인 우리는 정해진 결말에 도착하게 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을 쓰러트린 후에야 비로소 영화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결말이라는 말은 곧 죽음이라는 말과도 같으므로, 우리는 주어진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꺼져만 갈 뿐인 세상에서 죽음은 주체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현재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한다. 영화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우리가 영화의 결말을 미리 엿보았더라도 그런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추론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즐겁다. 어떤 결말을 마주할지가 아니라,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를 따져 묻는 것도 중요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결정론을 따를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는 방식이나 시간은 각자 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각자 다른 환경에 놓여있고 그렇기에 상대방의 삶을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된다면, 모든 영화 비평은 각자 다른 관람에서 이루어지므로 상대방의 감상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가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자리하듯이, 우리 또한 영화의 어떤 순간 안에 자리할 수 있다. 오히려 영화 매체는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을 더 알 수 없고 이는 인간 삶의 덧없음보다 개개인의 의지에 더 중점을 두게끔 한다.


불교에서 윤회를 강조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직 죽음만이 운명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운명 안에 갇힌 현세 안에서는 다음 세계의 축조를 위한 에너지를 쌓는 것만이 가능할 뿐, 그 안에서 저항하는 일은 불가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미 삶이 결정되었음을 논하기보단, 이미 정해진 결말 안에서 어떤 의지를 품고 살아갈지에 중점을 두었다. 영화를 보는 일, 그 비평에 관해서 영화를 어떠한 현상으로 바라봄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는 로라 멀비의 말처럼 인간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명멸하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총몽>의 디스티 노바가 말하듯 “인간 존재는 기억 정보의 그림자일 뿐이고,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신경 세포의 스파크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는 우리의 삶이 하나의 환영에만 불과하다는 점을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과거로 남겨지는 ‘현재’로서 우리의 모든 기억을 하나의 동시대 구역으로 만든다. 우리의 자아는 현재에 쉴새 없이 과거를 공급함으로써만 유지되는 동력기관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지속하는 현재로서 주체의 과거에 놓여있고, 이는 주체로 하여금 그러한 현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현재로 도약하게끔 도움을 준다. 총체로의 미래가 아닌 산발적인 과거에 튕겨 나오는 자신의 현재가 바로 주체의 다층적인 면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건 최대한 많은 기억과 연결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한다. 영화를 두고 기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시네마로서의 뇌도 아카이브로의 전유도 뜻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외장형 두뇌, 즉 통속의 뇌라 할만한 것이다. 우리 자신은 영화를 보았던 시점을 따라 끝없이 지지되고 또 소구된다. 영화는 그 자체로 선험적이지만, 그러한 굳건함이야말로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 준다. 그러니 영화를 더 잘 보거나 찍기 위해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는 말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비웃음을 살 게 아니라 통속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영화를 아무리 공부한다 한들, 이미지로서의 영화는 우리의 눈에 비치는 있는 그대로가 전부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하고 떠올리는 일은 본 것 그대로가 아니다. 영화를 볼 때, 기억은 시간을 따라 과거로 흩어져버리고 이제 우리는 안타까운 현실에 내쳐진다. 이때 현실은 마치 숱한 영화들이 남긴 시간의 잔영처럼 느껴질 것이다.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는 건 그렇게 흩어지는 기억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 고리를 형성해보고자 하는 자기만의 노력이다. 그리고 이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은 기억을 엮어 만든 그물망이 자신의 존재가 바닥으로 추락할 때, 항구적인 낙하를 막아주는 견고한 안전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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