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Mar 22. 2022

소비할 권리와 책임질 권리


1.


세상이 점점 바뀌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꼭 긍정적이기만 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소모되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이 과정에서 최초의 ‘하나’는 그 의미가 약화하거나 퇴색된다. 독재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 독재자는 구시대의 단점들, 적폐나 폐단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구원투수 성격으로 세상에 등판한다. 그러나 본래의 시간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자신이 소속되었던 시대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고, 이는 현실과 판단 사이에 괴리를 낳는다. ‘독재’의 문제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 있었던 삼성전자의 GOS 논란은 그와 같은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이후 삼성으로 축약). 삼성은 S10 이후의 자사 기기에 의도적인 성능 제한을 검으로써 발열과 배터리 수명을 일괄적으로 통제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크게 볼 때 이 논란은 2016년의 갤럭시 기기에 탑재된 Game Optimizing Service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논란이 된 건 S10 시리즈 이후의 기기들에 더 심한 제약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삼성은 발열이 비교적 심한 최근 기기들만이 아닌, 더 이전의 구형 기기들에도 동일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소비자들의 불만을 샀다. 기기 각각의 상황에 따라 성능을 제약하는 것이 아닌, 일괄적으로 적용된 성능 제한 정책은 사실상 세부적인 이해나 고려 없이 해당 조치가 이루어진 듯 보였다. 즉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을 넘어섰고, 이에 불만을 품은 한 유저(네모난꿈)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후 지난 2월 유튜브 채널 ‘오목교’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GOS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인터뷰에 참여한 개발자의 “안전에는 타협이 없다.”는 발언이 있었고, 이는 안전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한다는 논란으로 이어졌다. 특히 S22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와의 인터뷰는 삼성 측의 검수 아래 이루어졌기에 실질상의 공식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반발은 더욱 거셌다. 이전에 노트7 폭발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만큼 이해된다는 입장도 있었지만, 확실한 사실은 최신 플래그쉽일수록 더 많은 성능을 제한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채택하는 AP의 성능이 애플 기기의 성능을 한참 웃돈다는 점이 더해져 소비자들의 빈축을 샀다. 같은 돈을 내고서도 더 적은 성능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미 있는 것마저 제한해버린다면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개발자의 해당 발언이 게임 시의 발열을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기기 자체의 방열 처리에 대한 책임론이 일었고 이는 다시금 삼성전자의 최신 추세인 ‘원가절감’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S20 이후로 이어지는 삼성 기기의 원가절감이 소비자들의 빈축을 샀던 반면, 이러한 원가절감으로 인해 성능에 대한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금 ‘성능에 대한 논란’은 소비자들의 울화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삼성은 이후 2차례의 GOS 관련 공지를 내고, 비교적 빠른 시기인 3주가 지나 GOS 관련 완화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heavy한 작업에 대한 소비자의 needs’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거나, 내부적으로 GOS 사태를 Local issue로 바라본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대응에 오점을 남겼다. 


사건에 대한 설명이 여기까지라면, 이후의 해답은 우리에게 있다. 소비자로서 기업에 경고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비롯된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소비자를 개돼지 취급했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오는 중이다. 헌데 그렇다면 소비자는 개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2022년도 1월 20일자,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스마트폰 점유율은 삼성이 18.9퍼센트, 애플이 17.2퍼센트로 1,2위를 다투고 있다. 나머지 회사는 샤오미, 오포, 비보로 중국 내수 시장과 한국에서는 사실상의 비주류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장은 두 개 회사로 양분할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한국의 소비자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존재한다. 삼성이 되거나, 아니면 애플이 되거나(엘지의 부재가 자아내는 그림자는 크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회사는 크게 IOS와 안드로이드라는 운영체제로 구분되기에 어느 한쪽에 익숙해진 소비자라면 쉽사리 다른 플랫폼으로 넘어갈 수 없기도 하다. 즉 각각의 회사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자사의 기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애플과 삼성을 두고서 배짱장사를 한다고 비판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별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다. 물론 독재라는 표현은 세세히 뜯어보았을 때 독과점이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맥락으로 통용되지만, 적어도 이 표현은 우리가 마주할 앞으로의 사회에서 더 많이, 더 자주 인용될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21세기의 독과점이란 필연적으로 생태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생태계라는 말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지만, 플랫폼 경제가 활성화하는 21세기 들어 새로 대두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생태계 안에서 자연과 생물이 순환하듯이 삼성과 애플의 기기들이 자사의 서비스를 중심으로 엮이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소위 ‘연동성’이라 말하는 개념은 휴대전화에 오는 알람이 태블릿에도 오거나, PC에서 사용하는 서비스를 모바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식의 편리함이 있다. 자사의 서비스가 기기들 사이를 이어주고, 이 연동성의 그물 안에서 소비자는 또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게 된다. 이른바 락인(Lock-in)이라 부르는 소비자 종속 효과가 생겨나고, 이는 다시금 전체의 이익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면에서 이것이 해당 생태계에 종속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윈도우에 익숙한 사용자가 맥북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폰에 익숙한 사용자는 갤럭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클라우드에 저장된 앱들의 구매정보와 로그인 암호, 애플 아케이드와 같은 구독 서비스는 갤럭시 기기를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아이폰이 있다면 애플의 에어팟이나 아이패드를 구매하는 게 기기 간의 연동성이나 후처리 면에서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갤럭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양사의 제품들은 점점 더 자사의 생태계 안에서만 사용되거나, 혹은 그렇게 하면 더욱 편리하도록 만들어 자사의 생태계 안에 사용자를 가둬두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생태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밖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아진다. 헌데 그렇다면 GOS와 같은 논란에서 소비자는 어떻게 해야 회사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갤럭시 사용자가 갤럭시 불매를 외친다고 해서 삼성에 유의미한 타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젊은 이용자가 이탈하면 장기적으로 제조사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 있지만(미래의 고객들이 사라진다는), 갤럭시 아닌 안드로이드 제품을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러한 주장이 실현되는 날은 사실상 삼성 그룹이 망하는 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비자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권리조차 이미 선택된 결과 값으로서 살고 있다. 우리 소비자에게는 권리가 있지만 그게 곧 자유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생태계에 종속된 소비자가 권리를 주장할 때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게 아니다. 이 자유는 사실 부자유가 자유로 통하는 상황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거부와 반대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갤럭시를 사용할 권리를 주장할 때, 그것은 아이폰을 사용하지 않을 권리이기도 하다. 반대로 아이폰을 쓴다고 해서 이게 갤럭시에 대한 거부권은 아니다. 이미 갖춰놓은 주변기기나 개인이 처한 환경상의 문제로 특정 기기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별개의 제품은 그것 자체만이 아닌 생태계 전체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아이폰밖에는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폰을 택하는 일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선택권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연동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기기는 자신이 태어난 사회와 소속된 집단에 의해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 안에서의 개인을 닮았다. 특히나 삼성과 애플의 이중 구도는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심화되는 이분법의 논리를 연상케 한다. 


세밀히 들여다보면 2010년대 초반의 김치녀 같은 단어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본격적으로 이분법의 논리가 심화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계급 간의 갈등도 있을 테고 나이의 갈등도 있겠다만, 한남과 한녀, 이대남과 이대녀 같은 단어가 지금의 현실에선 더 눈에 띄는 듯하다. MZ나 386 같은 단어는 적어도 세대 변화를 지칭하는 데 필요했다는 최소한의 논리가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단어들에선 유독 생태계 종속의 논리가 발견된다. 가령 한남과 한녀라는 말은 상대방 성별이 해당 단어를 사용할 때 유독 무자비한 게 된다. 니거라는 단어가 흑인들 사이에서는 허용되는 반면 타 인종들에서는 인종차별 발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난 인종이나 성별을 바꿀 수 없고, 그렇게 살아온 삶과 그에 따른 경험을 바꿀 수 없다. 즉 어떤 면에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 황인종과 백인종과 같은 생태계에 종속되어 있다(우리는 그런 환경 안에서 교육받고 성장한다). 여기에 여러 과학적 지표들은 객관적으로 파악된 지표를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생태에선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한다는 식의 발표를 하지만, 가끔은 이런 발언이 되려 우리를 해당 생태에 머물도록 종속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특정 집단의 행동양식이라고 정해놓은 것은 어떤 면에서 그들이 행동할 자유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부자유를 선택한 게 아닐까? 누군가는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행동하는 이도 있을 테지만, 백래시라는 공학 용어를 사회적 현상에 옮겨다 놓은 몇몇 학자들의 분석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각보다 과학적이고 공학적인 ‘생태계’일 수도 있다. 


2. 


아무쪼록, ‘세계’라는 말보다 ‘생태계’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세계라는 말은 단순한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공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계라는 말을 설명하려면 여러 법칙들을 들고 와야 하지만 생태계라는 말을 쓴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서로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게 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지 법칙이나 수식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생태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관계 설정만이 아니다. 생태계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하나는 생태계 안에 종속되는 일이다.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라는 말로 지적하였듯,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계층 안에서의 주어지는 여러 사회적 조건들을 내재화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계급 구조는 삶의 여러 단계를 계단화하여 계층 간의 이동을 힘들게 만든다. 말하자면 아비투스는 사회 안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들을 종속시키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었다. 다른 하나는 생태계라는 말이 직시하는 창조의 논리다. 생태계라는 말은 하나의 구로 덮인 세계를 염두에 두는 바, 이렇게 완벽하고 정교한 관계들을 창조해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누가 이 생태계를 만들었을까? 내가 지금 말하려는 건 창조론, 종교학이 아니라 생태학에서의 창조론이다. 예를 들어 2019년에 윤지선이 게재했던 논문 ‘관음충의 발생학’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았다. 이 논문은 완전한 창조론이라는 비판을 받아 끝내 게재가 철회된 바 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이 주장을 통해 모종의 생태계를 구축하여 그에 따른 종속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생태계의 구축 말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태계는 이미 만들어진 것에 대한 관찰과 기록을 뜻하지만,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생태계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종속과 유지의 논리를 따른다. 전자의 경우, 생태계는 자연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이미 소속된 것에 대한 고찰이라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신이 소속된 장소나 집단을 생각해보는 일은 바깥에서 이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많은 주관을 품는다. 쉽게 말해 생태계 안에서 우리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생태계 밖에서야 생태계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생태란 직접 그 안을 살아본 이만이 경험할 수 있는 모종의 형식이다. 살아가는 모양에 대해 기술한다는 건 곧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고찰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가 하면, 당연히 이 과정은 어느 정도 한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한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세상의 일원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게 한다.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보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세계는 그런 몸을 비춰보는 거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살아가는 몸은 단순히 나 자신의 내면에서만이 아니라 그런 세계를 살아감으로써 완성된다. 이 점에서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이들이 노리는 바가 명확해진다. 페미니즘 운동의 유구한 문장을 바꾸어 말하자면, “생태는 주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듯, 우리는 개인의 살아가는 방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생태계의 구축이라는 말이 특정한 생태에 우리를 종속시키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사회는 점점 그러한 생태 구축에 연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갈라치기’라고 부르는 일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표현조차 어떠한 함의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라는 개념이 점점 더 갈라지고 세분화한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취향에 밀접하게 다가서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이러한 일은 확실히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이렇게 점점 집단이 세분화할 때, 우리는 더 많은 동료를 얻는 게 아니라 잠재적인 적대자를 얻게 된다. 문화적 다양성에서 파생되는 유전자의 상호교환이 아니라, 더 많은 이교도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성전에 이른다. 그와 동시에 파생되는 수많은 갈림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미래를 꿈꾸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탐색을 좁혀본다 한들 전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치 지젝의 책 제목처럼 이들에겐 “나눌 수 없는 잔여”가 있고, 이러한 잔여분은 개인의 생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아무리 차이를 좁히려 한들,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고. 2030과 5060, 여성과 남성은 서로의 처지에 공감할 수 없다고. 이러한 유물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어진 비관적인 현실을 피해 달아나도록 한다. 그리고 이렇게 도망친 이들이 도착한 곳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다. 디시인사이드, 루리웹, 펨코, 여성시대, 더쿠, 해연갤, 이러한 커뮤니티들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질상의 게토로 전락한다. 이러한 게토에서 사용자는 자신의 생태를 유지할 요령으로 생태계를 구축한다. 


미디어 콘텐츠에서 유행하는 멀티버스라는 말이 하나의 세계가 아닌, 분열된 몸들의 교집합을 이루어내는 장으로만 사용된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불안정한 몸을 바닥에 정박해 둘 요령으로 커뮤니티에 소속된다면 이는 곧 생태를 그들 세계에 의탁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몸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때 비로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방향이 없다면 우리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광인의 처지를 면치 못한다. 생태와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무엇이고, 이러한 갈등을 조장하는 이들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20대 남성, 혹은 20대 여성이라는 표준 지표를 자신의 처지에 대입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절대 지표로서의 평균은 결코 그 안에 소속된 자신의 생태 모두를 반영하지 않는다. 이대남이 꼭 이번남일 이유는 없고 이대녀가 꼭 일번녀일 이유는 없다. 자신이 몸담은 집단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일은 자신의 생태가 아니라 그러한 생태계 안에 종속되기를 자발적으로 택하는 일, 즉 자신의 처지를 닫힌 세계에 대입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노라고, 별다른 대안은 없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 커뮤니티의 바깥에야 비로소 ‘진짜’ 세상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인터넷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해도 우리의 몸이 현실에 있는 한 사람들 사이의 유대는 ‘진짜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이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라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소속된 생태계에서 이주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겐 다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태계 안에 소속된 우리가 하루아침에 살아온 세계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겨두고 싶지만 나는 이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몸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은 불가한데, 전쟁과 같은 상호 간의 갈등은 이러한 변화를 단기간에 끌어내는 과정에 벌어지곤 한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간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우리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으로써 개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고유 공간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 시대에 연결성이라는 말은 모두와 연결됨으로써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야 마는 일을 뜻한다. 그런 이유로 특정 생태계에 소속된다는 것은 곧 그들 생태계에 자신의 생태를 의탁한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이대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자신은 외부에서 이대남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대남인 자신이 되고, 이대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자신도 결국 그러한 생태계를 통해서만 고찰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커뮤니티의 일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바, 삼성전자 디바이스에서 일었던 성능제한의 일화에는 부당함을 외치면서도 자신이 소속된 커뮤니티에 아무런 의심을 보내지 않는 일은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GOS를 두고서 소비자의 안전을 위함이었다고 말하는 한편,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태계로부터 이것만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일괄적인 제한임에도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생태에 편리하게 다가오는 생태계에 대한 자발적 헌사일 것이다. 정말로 알고 그러했든, 아니면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든 간에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물론 나는 지금 긴급 사태에의 호소, 혹은 협상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망치려 드는 것에 반기를 드는 일이 꼭 바깥세상에 대한 무지, 혹은 파괴의 징조로만 여겨질 이유는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누군가는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그러한 진실 위에 의도적으로 올라탄다. 혹자는 세계와 자기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 그 안에 부유하는 몸을 붙잡고자 특정 생태계에 몸을 의탁하러 들 수도 있다. 위에서 말한 지젝의 책 제목은 바로 그런 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눌 수 없는 잔여’라는 건 세계 안에서 의미 지을 수 있는 것들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을 때 그러한 잔여감에 대한 불안, 여분이나 잉여 가치에 대한 환산 불가함의 신호이기도 하다. 광활한 세계 안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점. 정말로 무서운 일은 이 세상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넓은 면에서 나 자신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일개 개인으로서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에 항의하는 일이 가능한지와 같은 문제.” 의미화되지 않는 나를 의미로 만드는 일에서 사람들이 중점을 두는 건 결국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의미이든 간에, 그 위에 탑승하는 자신은 세계의 공백이 아닌 의미화의 고리 안에서, 생태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좌표로서 그런 생태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의미 지어진 신체는 역설적으로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처지만을 더욱 강조하게만 되어버릴 뿐이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정 ‘잔여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감정들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3.


소비할 권리와 책임질 권리는 같지 않다. 아니, 이 단언은 사실 하나의 의문문으로 던져져야만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비하는 일이 곧 그에 대한 책임으로 연결되는가?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면 이 말은 옳다고 보아야 한다. 윤리적 소비에서 중점은 무언가를 소비하는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니 말이다. 헌데 윤리적 소비라는 말의 맹점은, 소비 행위에서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 소비를 택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경우 책임은 소비에 따라오는 증정품 같은 것이지 그 자체로 주가 되진 않는다. 말하자면 윤리적 소비는 책임조차 하나의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와 유사하게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는 자신들의 가난조차 하나의 소비대상이 되어버렸음을 한탄하는 구절이 나온다. 가난 속에 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자신의 굶주리고 헐벗은 처지를 일종의 패션처럼 ‘입는’ 사람들의 모습을 경멸한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사람들은 가난을 소비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은 것이다. 가난을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사용하면서도, 그로 인해 정말로 가난에 처했던 이들이 받을 모멸감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헌데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소비에 책임을 지는 일인 소비의 윤리는 성립할 수 있을까? 윤리적 소비가 자신의 소비를 윤리를 통해 합리화하는 일이라면, 윤리란 소비를 위한 소비재에 불과하다. 반면 소비의 윤리는 자신의 윤리를 소비를 통해 합리화하고자 하며, 이때 소비라는 것은 곧 윤리적 행동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윤리라는 것의 기준이 개인마다 다르며, 이에 따라 자신의 ‘윤리’를 합리화할 요령으로의 ‘소비’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난 3월 12일, 개인방송 진행자 침착맨은 디시인사이드의 실시간 베스트 게시판(이하 실베)에 올라온 논란에 입을 열었다. 자신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실베의 논리는 억까(억지로 까내리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때 침착맨이 했던 발언 중에 유달리 인상 깊은 것은 소비와 책임의 논리이다. “이런 짓을 레포츠로 하는 건 좋아. 그런데 자신이 하는 게 정말 억지라는 거. 이거 하나는 알고 계세요. 자신이 하는 행동에 책임마저 저버리지 말라고.” 침착맨의 이 말은 자신의 윤리를 위해 감정을 소비하는 이들에게서 그에 따른 책임의 의무를 일깨워주었다. 감정을 소비하고 나서 책임을 버려 버린다면 그것만큼 이기적인 일이 없다고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소비된 감정이 책임으로 바뀐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이 생겨난 후 우리가 그걸 어딘가에 소모할 때, 소진되고 남은 찌꺼기는 우리 마음에 잔여물로 남는다. 우리가 흔히 ‘앙금’을 남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을 지적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감정을 소비하는 행위에서는 아무런 잔여를 남기지 않아야 뒤탈이 따르지 않는다. 예컨대 감정을 소비하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것을 아무 곳에서나 버릴 때는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무언가에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잔여를 품에 안고 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잔여를 다른 사람이 버려야만 하고, 이는 말그대로의 감정쓰레기통에 다름없다. 헌데 우리가 위에서 ‘잔여’를 두고 생태에 빗대었던 대목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면에서 이는 주체에 관한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태 없는 몸이란 살아가지 않는 몸, 죽어버린 시체라고 말이다.


감정쓰레기통이라는 말은 자신의 내부에 소비된 감정, 잔여를 남기지 않으려는 이들 탓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잔여를 타인에게 넘김으로써 그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비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잔여는 개인의 생태이기에, 마지막 남은 것마저 버려 버린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껍데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삶에는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야 하는데, 일말의 잔여도 남기지 않는다면 그 안에 담긴 삶은 더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그건 어쩌면 사회를 그대로 흡수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사회 분위기에 휩쓸릴 뿐인 인형일 수도 있을 테다. 우리 자신이 ‘나눌 수 없는 잔여’가 되어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쪼개지지 않는 자신이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돌턴의 원자론처럼 우리 자신은 최후에도 쪼개지지 않는 단 하나여야만 한다. 침착맨이 악플러에게 보낸 경고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으로, 잔여를 안고 가지 않는 당신들은 그저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는 텅 빈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회라는 건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생태를 형성하는 공간, 생태계를 의미한다. 악플러들의 자기주장은 그 무엇보다 고집이 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커뮤니티의 주류 의견을 곧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잔여를 갖지 않는 존재란 자신을 환경에 열어놓은 존재, 그 자체로 생태계라 할만한 존재이다. 그 자신이라 할만한 것을 갖지 않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이들에 저항할 때 주체에 들어가는 타격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말그대로 유령 같은 존재, 그렇다면 우리가 싸우는 건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신념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소비할 권리와 책임질 권리가 같지 않다면 무언가를 소비하기만 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무언가를 소비하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블랙홀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으로 치면 돌연변이 세포인 암 덩어리에도 빗대어질 수 있다. 암세포는 주변 세포를 자신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게 아니라 변형된 세포의 DNA가 하나로 모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침착맨의 악플러와 닮았다. 암세포는 정석적인 DNA의 돌연변이이기에 자신을 규정할 만한 기준점이 없으며, 이런 상태에서 암세포는 ‘암’이라는 하나의 증상으로만 진단된다. 암세포는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라 할만한 게 없고, 이는 곧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의견에 휘둘리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앞선 두 개의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집단의 의견에 휘둘리는 일은 곧 하나의 증상과도 같다는 것, ‘잔여’를 갖지 않는 존재는 그저 증상이나 징후와 같은 간접적인 요인으로만 파악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증상으로서의 존재, 증상은 신체 전반의 분위기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사건을 예비함과 동시에 재앙을 경고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악플러들을 두고서 막연히 욕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닥쳐올 몇 가지 불행을 경고하는 하피들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신체에 빗댈 수 있다면, 이 몸이 병들거나 다치지 않도록 건강하게 유지하는 게 바로 우리의 의무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우리 자신을 그 생태계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일, ‘잔여’가 되는 것이다. 


잔여가 된다는 건 찝찝한 마음을 가슴 속에 담아두거나, 혹은 사회의 중심에 서지 못한 채 주변부의 찌꺼기로 남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잔여가 된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뜻과도 같다. 삼성전자의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하나의 사실은 특정 진영에 잔류하는 일은 개개인의 이념이나 신념에만 따르는 게 아닌, 보다 현실적인 문제의 중심부에서 고찰된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몇몇 생태계에 연루되어 있고 이러한 생태계 안에서 영향받지 않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이따금 이러한 생태계에 어떤 문제가 터져 나올 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하는 일이 곧 다른 한쪽에 반대하기 때문은 아니며, 오히려 여러 다른 상황에 묶여 보다 자기 처지를 보완해줄 수 있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번남은 이번녀에 대한 반대로 생겨난 게 아니며, 페미니즘이 여혐에 대항하여 생겨난 것도 아니다. 생태계 안에서 주체가 생태로 있을 방법이란 그 자체로 잔여가 되는 것, 그는 모든 만남과 어울림을 배제하고서 남은 최후의 자신인 ‘나눌 수 없는 잔여’이다. 잔여가 된다는 건 무언가를 소비하고 남은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밥을 먹었으면 소변이나 똥을 누는 게 당연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잘못을 했을 때 욕을 먹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자신을 공백으로 두는 것, 자신을 징후화하여 생태 전체를 자신을 소개하는 치장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을 두고 주체로 칭할 수 없을뿐더러 그 자신은 더 이상 세상에 남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 하나의 생태계다. 그게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면 우리가 소속되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하나의 땅이든 간에 결국 매 순간 우리는 어느 사회를 살아간다. 이 안에서 우리의 삶은 여러 다른 요인들에 영향받으며 이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 말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 일을 합리화해주지는 못한다. 생태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삼킨다면 그에 따른 잔여물이 생성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를 외면한다면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일 수 없는 상태, 생태계와 연결됨으로써 정작 생태일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특히 이에 대한 좋지 않은 사례 중 하나는 커뮤니티 중독이다. 인터넷에 접속하기 쉬운 환경은 한번에 여러 커뮤니티를 오갈 수 있게 해주거나, 혹은 온종일도 인터넷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작 자신에 대해선 발견할 수 없다. ‘잔여’는 최후에 남는 것으로, 주변에서 줄곧 무언가를 공급받는 환경에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즉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그 안에서 자신을 살아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모종의 생태계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의 자신이란 생태를 꾸리는 게 아닌 빈 껍데기에만 불과해진다. 어쩌면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인간상 중 하나가 타인을 감정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와 연결된 나머지 정작 자신을 모르게 된 이들에게는 감정을 담을 일말의 공간조차 없다고. 결국, 우리가 이런 이들과 소통하려 드는 일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일 테다. ‘그것’은 로봇이니 말이다(사람이 맞습니까? 라는 Captcha를 떠올려보라).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이론에의 매혹은 무엇을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