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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7. 2022

오픈 스페이스, 오프 더 스크린: 영화화된 제도 문화


2022년 4월 18일, 정부의 거리두기 정책이 2년 1개월 만에 해제되었다. 코로나19가 범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이 2020년 초였으니 이제 막 2년이 지난 셈이다. 여러 번의 변이를 거친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표준을 따라 살상력은 줄이되 전파력이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엔데믹을 바라보는 이 시점은 살상력과 전파력이 절묘하게 교차해가는 데드 크로스 라인일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보다 친근함이 더 높아지는 이 시점이 ‘종말’에 대한 상상과 결부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코로나(19 범유행) 이후에도 재택근무를 지속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생각할 뿐 “코로나는 끝났다! 만세!”라던가 하는 식의 가정법을 사용하진 않는다. 과학계도 코로나19는 일종의 풍토병이 될 것이라 말하면서, 그에 대한 증거로 스페인 독감(1919)이 현존하는 독감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현실을 언급한다. 코로나19에 진정으로 종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으며, 우리가 해야 할 건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출구전략일 뿐이라고 말이다. 


종말이라는 말은 뚜렷한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과 공존해야 한다는 현실을 의미한다. 이런 현실에선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을 줄곧 해버릴 수밖에 없다. 어떠한 형태로의 이별이나 실패에도, 우리는 끝내 이후의 삶에 남겨지고야 마니까. 결국 이 ‘끝장’이란 건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게 끝장나버렸다 해도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엔 변함이 없다. 종말이라는 말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가 계속해서 이후를 살아가며 그러한 시절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일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끝장’이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점이 되어버린다. 완전히 치워버릴 수는 없지만 이를 기억하며 줄곧 나아가야 한다는 점은 마치 라깡이 말하던 결여의 정의와 닮았다. 그 종말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에 줄곧 남아있으며, 때로는 꿈과 같은 곳에서 무의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우린 괴로움을 느낀다. 이 결여는 채울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나눌 수 없기에 해결되지 못할 문제인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끝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를 부여잡고 일어설 수 있는 것만 같다. 채울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다면, 우리는 그걸 품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끝장’이란 나눌 수 없는 잔여에 비견될 수 있다. 이에 따르자면 종말이라는 말은 특정한 순간을 지칭한다기보단 매 삶에 찾아오는 위협의 부상을 지칭하는 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서 이후의 삶을 예견하는 하나의 증표가 된다. 


다른 한편,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보다 공존의 논리가 더 우세해지는 시점에서 축제는 다시 열리고 있다. 음식점의 24시간 영업 허용이나 각종 행사의 오프라인 개최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 올해는 2년 만에 전주국제영화제의 주요 상영이 오프라인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영화관람이라는 행위에 사람들이 보내던 우려를 생각하면 오프라인 상영이 갖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영화를 한곳에 모여 보아도 좋다는 말은 집합금지 명령의 해제를 뜻하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영화 이미지에 대한 응결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감상이 보편화된 시기를 두고서 집중 분산과 이미지 파편화를 우려하던 이들의 의견을 떠올려보자. 영화를 사고하는 일이 흐릿해진다면, 영화 이미지 또한 조각나버릴 수 있다고 혹자는 말했다. 이제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펼쳐진 미래를 비관했다. 이 점에서 오프라인 영화 상영의 재개는 영화를 기억하는 행위의 재개이기도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에는 탐탁치 않은 면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온라인으로 영화를 보는 일은 영화에 대한 기억력의 손실과 정말 연관이 있을까? 오프라인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집중력의 향상과 연관있는 게 사실이다만, 원하는 만큼 돌려볼 수 있는 디지털 파일이야말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암기하기엔 더 쉬울지도 모른다.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일이 개인의 포착 능력에 달렸다고 가정한다면, 영화라는 건 애초에 디지털 파일과도 같은 형태로 우리 마음에 기억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곳에서 멈춰 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게 바로 디지털이니 말이다. 


아날로그를 시간의 선형성과 불가항력에 빗댄다면 디지털은 시간을 멈추고, 이어 나가는 절합의 자리에 놓인다. 그러니 영화를 보존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을 때부터 이미 영화는 서서히 디지털화되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대한 기억의 소각으로 여겨졌던 디지털이야말로 영화를 잔존케하는 무대였던 셈이다. 따라서 온오프라인 여부는 기억에 별다른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영화 상영 환경의 여건을 제하더라도 영화의 한 장면을 포획하여 나누는 일 자체가 이미 디지털적이다. 


영화의 죽음이라던가 하는 말이 필름 매체라는 필드에서만 다루어져선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억이라는 말은 멈추거나, 가속한다는 두 가지 분류에서만 생각되어야 한다. 아날로그가 ‘멈춤’이 곧 소멸로 이어지는 시대였다면 디지털은 ‘멈출 수 없음’이 곧 소멸로 이어지는 시대다. 헌데 이러한 논리는 한번 분열된 건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게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디지털이라는 말은 영화에 탈출구를 열어두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디지털 파일을 블록체인 방식으로 인증하여 독립성을 부여하는 NFT를 떠올려보자. NFT는 이것이 분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 NFT는 이것이 분열이라고 말해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갖는 상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화 또한 이미지의 형태로 분열되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하나의 균일한 해석만이 오직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말이 구제 취급받는 세상에서 ‘분열’은 다양성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하나가 되지 말아야만 가치 있다는 말은 몹시 불행하다. 분열되고, 중단되고, 멀어지는 세상이 그렇게 낙관적인 말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코로나 판데믹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은 코로나 판데믹이 상정하는 비대면이 바로 분열과 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이 비대면 사회에 보내는 우려 중 하나는 그곳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하나를 상상할 수 있는 공동체의 붕괴를 우려했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한 다양성을 두고서 영화 공동체의 붕괴라는 표현을 사용해볼 수 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극장에 방문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혹은 영화제와 같은 오프라인 모임이 제한되었다면, 이로 인해 제한된 만남은 하나를 상상할 수 없는 공동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주의의 발달일 수도 있지만 개인일 수밖에 없는 외로운 사회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전쟁이나 재해 같은 사건 사고를 마주한다면, 이 외로운 사회가 불러올 파급력을 상상해보라. 


후쿠시마 료타는 『부흥문화론』에서 일본의 문화는 위기 이후에 부흥하는 과정에서 특히 발달했다고 말하면서, 이를 ‘부흥문화’라고 칭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들의 배후에는 항상 큰 사건이 자리하며, 이에 따르자면 일본의 문화는 부흥의 역사다. 생각해보건대 이런 생각이 꼭 일본에만 적용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료타의 이 말은 무너진 것들 사이에 잔존하는 것으로부터 더 큰 공동체를 끌어낼 수 있음을 지적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코로나 판데믹을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부흥 문화가 아닐까? 발해나 고구려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부흥이라는 말은 ‘잔존’이라는 점에서 이전과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최근 애플티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파친코>의 첫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판데믹이 우리를 갈라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합의하여 패배해버리는 일을 진정으로 경계해야만 한다. 


출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위협에 문을 여는 일은 충분히 불안할 법하다. 다만 어떤 면에서 이는 다시금 오프라인의 입지를 회복하는 일이기보단, 이미 온라인으로 판도가 넘어가 버린 세상에서 새롭게 태동하는 부흥 문화일 수도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기조 문구처럼 우리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인 분열이 아니라 흩어진 생각들을 모아 어떤 대안을 풀어내야 할지를 과제로 주는 것이다. 


고립된 일상이 계속되면서 각자에게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고, 이에 개인의 의견이 발달하게 되었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답은 전통적인 극장 구조에 있는 듯하다. 극장은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영상을 바라보는 구조이다. 하지만 같은 영상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또한, 이 감금은 2시간여의 시간 뒤에 해제된다. 그렇다면 극장을 나온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방법이란, 일종의 부흥 문화다. 


진정한 분열은 하나였던 게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니라 둘이 있어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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