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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9. 2022

후쿠시마 료타와 헤이세이적 인간

<드라이브 마이 카>의 출구 전략

*콜리그에 투고한 열두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658773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기노는 안다. 그가 침대에서 나와 문을 열 것을 그 노크는 요구하고 있다. 강하고 집요하게. 그 누군가에게는 밖에서 문을 열 만한 힘이 없다. 문은 안쪽에서 기노 자신의 손에 의해 열려야만 한다. (…) 기노는 그 방문이 자신이 무엇보다 원해 온 것이며, 동시에 가장 두려워해 온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기노」


1. 


후쿠시마 료타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원작과 비교하며 쓴 을 보면, 그가 ‘헤이세이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꽤 직관적인 이 말은, 료타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종의 무중력 상태, 출구전략을 암시하는 유비에 가깝다. 분명 한국에서 연호 개념은 익숙지 않고 또 굳이 알 필요도 없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이 말은 료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센과 치히로>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터널을 지나오면 과거의 유산이 기약 없는 현재로 바뀌어 있다. 부모를 잃은 치히로(센)가 당황하자, 하쿠는 그런 센에게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해’가 후지산과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는 상징임을 염두에 둔다면, 센과 하쿠가 함께 바라보는 노을은 일본의 마지막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후지산에 걸린 태양이 뜻하는 바를 기억하자). 


버블경제의 버블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누구나 그게 터진다는 걸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가 없다. 터널 안에서는 작은 소음도 큰 소음으로 반향되어 오기 때문이다. 터널을 지나온 센은 잃어버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 주체가 개인을 호명하는 방식인 이름은 잃어버린 세계의 잡음만을 키울 뿐이다. 그녀는 방향을 찾기 위해 몸의 감각을 되새겨야 하고 이는 곧 신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체는 세계에 굴절된 언어가 회절되어 돌아옴으로써 이름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하는 표면이 되어주니 말이다. 어쩌면 오토모 가쓰히로의 1988년 영화 <아키라>와 츠카모토 신야의 1989년 영화 <철남 테츠오>에의 기묘한 신체 변형이 의미하는 바가 그럴 테다. 잘못 회절되어 온 언어는 이름으로 뭉쳐지지 못하고 애꿎은 몸을 난타한다. 그리고 그 몸은 기괴하게 변형되어버린다.  


이 이름의 재앙은 <치히로> 십여 년 후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 다시금 등장한다. 이때 눈여겨 볼만한 것은 주체가 신체를 다루는 방식, 혹은 여기는 방식이다. 뭔가 어울리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신카이에게도 기묘한 신체 변형이 있어 보이는 건 기본적으로 그가 그리는 인물들이 사춘기 소년소녀라는 점에서다. 사춘기에 급격한 심리적 변화가 찾아오는 건, 그동안 새겨왔던 좌표값이 물리적 신체의 변형으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버리기 때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신체를 형성하는 좌표값이 왜곡되어버린다면 폴리곤은 기괴하게 변형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폴리곤이라는 기술적 개념이 이름의 문제와 연결되는 대목은 무엇일까. 디지털 시대에 새로이 대두되는 개념인 폴리곤은 좌표값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더 정교한 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위치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통솔을 요구한다. 폴리곤을 구현한다는 건 그만한 좌표를 얼마나 동시 연산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주체가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더 많이 습득할수록 구체적이고 선명한 ‘상’을 얻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에 제기되는 파편화의 문제란 파편화가 곧 주체의 선명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헌데 선명함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선명함이라는 것은 촉각에서의 생생함을 시각의 장에 옮겨놓은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폴리곤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세계 안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선명하게 응시되는 자신의 신체”를 상상하거나 구상하는 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구상은 알튀세르가 지적하듯이 세계로부터의 호명, 즉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대목이 위에서 말한 사춘기에서 신체의 문제와 연결된다. 사춘기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세계가 의식 이전에 다가온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세계의 잡음을 몸으로 취하는 시기이자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폴리곤 값이 주어짐으로써 내가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날 생각하는 것 사이에 본격적인 불화가 생기는 시기이다. 프로그래머의 코딩 요구를 본격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시기이며,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연산 능력은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언어를 취할 것을 종용한다. 이 자기만의 언어가 바로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이름인 셈이다. 


그렇다면 헤이세이 시대에 이름의 문제가 부각되었던 건 어떤 이유였을까. 일반적으로 신체는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 안에서 자신을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종의 사진기라고나 할까, 이때 이름의 역할은 그런 사진들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 타임라인이라던가 하는 것일 테다. 즉 이름은 신체를 구성하는 폴리곤이 하나로 응축되는 ‘자아의 지점’임과 동시에 외부 세계의 무질서를 내면세계의 질서로 정렬되는 응축점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름의 문제란 무질서를 질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의 오류, 혹은 혼돈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이는 신체가 생성이 아닌 배척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변환은 주체가 바로 세계-내-존재, 좌표의 정렬을 통해 폴리곤을 형성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왜 하필 디지털인가”라는 물음에도 같은 이유를 들어 대답할 수 있다. 헤이세이라는 시기가 디지털 시대의 본격적인 성립이라는 점을 제하더라도 우리는 들뢰즈의 리좀이라던가 하는 용어가 난무하는 포스트 포스트 모던을 떠올릴 수 있다. 


헤이세이적 인간은 탑을 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무너진 탑을 바라보는 존재다. 헤이세이 시대란 폐허를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폐허를 ‘살아가게’하는 이들의 시대다. 말하자면 이것은 재난과 상처의 시대, 회복의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을 좇는 ‘상실의 시대’이다. 물론 폐허라는 말은 굳이 메타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폐허는 정말로 폐허일 수 있다. 당장 <센과 치히로>를 돌이켜봐도 우리는 폐허가 되고만 유원지의 풍경이 도입부에 제시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하마구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사코>(2018)는 그 자체로도 좋은 영화지만 2011년을 알고 있다면 영화 속의 미스터리가 맥없이 풀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영화가 제시하지 않는 바깥에 그런 사건이 있었으므로 보통은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감정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이런 사건들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 외부에 제시된 사실들이 세세해질수록 영화 안에 맺혀오는 폴리곤의 외견은 점점 정교해지며, <아사코>의 복제인간들이 그들 사이의 카피본이 아니라 원형에 대한 카피본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사코>는 인물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무대 위에 오르면 더는 자신이 아니게 되는 배우들의 모습처럼, 무대라는 장소에 부속물처럼 딸려오는 인간상은 조명 아래 맺힌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실제로도 헤이세이는 슬픈 사건이 많은 시대였다. 이런 사건들을 해석의 맹점으로 전유해버리는 일을 경계해야겠지만, 잃어버린 세계에서 그런 사건이 갖는 위치는 별개의 좌표값이 된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헤이세이적 인간상’이 하루키의 그것으로 이해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헤이세이에서 탈출한다는 건 “무엇보다 원해 온 것이며, 동시에 가장 두려워해 온 것”이니 말이다. 


무대 위의 인간은 세계에서 구현된 폴리곤 집합체다. 모 SF영화에서 빔프로젝터를 통해 투사되는 사이버 생명체처럼 헤이세이적 인간은 이름을 부여잡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는 ‘사이버’ 세계를 벗어난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이라 할 만하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올라선 인간은 어디까지가 ‘나’라 부를 만한 것일까. 혹자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경계가 불투명하다면 ‘나’라고 부를만한 것도 그렇게 된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란 역설적으로 휴머니즘을 상실해버린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료타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두고서 사용하는 헤이세이라는 말에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있다. 료타가 말하는 헤이세이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풀이되는데, 하나는 좋았던 시절 이후의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이다. 생전에 퇴위한 천황의 시대인 헤이세이란, 끝나지 않는 터널이면서도 저 멀리 보이는 빛을 관찰하는 무대였다. 그런 점에서 터널 속을 가로지르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자동차는 매 순간 빛을 받으며 어둠 속의 자기 형체를 드러내는 폴리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은 무대 위에 서서 로우키로 내리쬐는 조명과 그 아래 선 가후쿠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 둔 일종의 직유다. “해가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되새겨본다면, 이 조명은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 있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가 꺼져버림으로 인해 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폴리곤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드라이브 마이 카>를 두고서 헤이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몹시 적절하다. 당장 <드라이브> 안에서도 나오지만 가후쿠가 겪는 시련은 ‘언젠가 극복될 것’과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 그 둘 사이에 자리해 ‘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2. 


우리는 후쿠시마 료타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재미난 말장난을 해볼 수 있다. 료타-리오타-리오타르라고. 이는 lyota와 Lyotard를 둘러싼 우연에 불과하지만 리오타르가 말하는 “거대 서사의 종말”은 료타가 주장하는 헤이세이적 인간의 배경이 되거나, 혹은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가령 리오타르가 말하는 거대 서사의 종말이라는 게 세계의 빛에서 개인의 어둠(단순자)을 발견하던 시대에서 “세계의 어둠에서 개인의 빛(모나드)”을 발견하는 시대로의 이행이라는 점이 그렇다. 가후쿠의 연극 무대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던 게 베케트의 「고도」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베케트의 극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무대들은 로우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이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세계가 허용한 마지막 지대, 어떤 것이 살아남을 것인지를 선별하는 화이트리스트처럼 보인다. 


헌데 이 화이트리스트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를 모른다. 아내를 잃은 가후쿠의 처지가 정확히 그러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내가 죽자, 그가 알던 이야기의 실마리도 끊겨버린다.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되었고, 가후쿠에게 남겨진 건 점점 마모되어갈 뿐인 이야기의 잔흔이다. 하지만 가후쿠는 이야기 이후의 세계에 살아남았다. 가후쿠는 이제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과 이별하는 처지에 놓인다. 세계는 영원한 반면 그 자신은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기에, 가후쿠는 ‘이야기될 수 없음’을 비관한다. 이는 헤이세이가 왜 상실의 시대인지를 말해준다. 리오타르의 말을 따르자면, 이제 이야기는 어둠과 하나 되어 점점 세계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즉, 덩그러니 놓인 생존자의 시대는 이야기 밖에 있을 것을 명령한다는 점에서 화이트리스트에 해당한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애니메이션 방영분 중에는 끝나지 않는 여름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일화는 영원한 여름이 의미하는 게 시간의 무한함이 아니라 이야기의 ‘상실’임을 말해준다. 너무 많이 이야기되기에 그 의미를 잃어버린 특별함이 바로 일상이라고 말이다. 즉 일상이란 이야기되고 있음을 뜻한다. 일상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상실 이후에야 비로소 조명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잠을 자야 내일이 오듯이, 연극 무대에서도 불이 꺼져야만 비로소 다음 장으로 이야기가 넘어간다. 연극을 볼 때 우리는 연극 무대 이외의 것을 생각해볼 수 없지만, 연극 무대가 꺼지고 잠시 다음 시기를 준비할 때야 비로소 이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가후쿠의 입장에서 연극을 생각해보자. 가후쿠에게 연기한다는 건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음을,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딸 아이가 죽은 이후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에서 내려오지 못하던 가후쿠는 마지막 남은 실마리마저 풀려버리자 가차 없이 그곳에서 내려버린다. 헤이세이적 인간이란 바로 이런 인간상을, 헤이세이란 주인공이기를 강요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헤이세이에서 탈출한다는 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다. 2019년에 개봉한 신카이의 <날씨의 아이>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대사가 “괜찮아”였음을 떠올려보자.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영화의 결말은 그동안 주인공이 되길 강요해왔던 소년만화의 노선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소녀를 제물로 바쳐야만 밝게 빛나는 하늘이지만 오히려 이야기는 그들이 주인공이길 포기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날 때 비로소 어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어떤 면에서 심리 테라피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자신이 이야기를 통제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길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하마구치의 <해피아워>(2015),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이나 <원더풀 라이프>(2001), 범위를 넓혀보면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1995) 시리즈도 ‘심리 치료 교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은 바가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어둑어둑한 배경에 밝은 빛이 내리쬐는 의자에 앉아 모종의 고해성사를 하곤 하는데, 아마도 이런 행위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이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는 특히 헤이세이를 거치며 변화한 주인공관에 대한 단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TVA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1995년에 세기의 대폭발로 끝나버렸지만, 이후 제작된 신극장판 중에서 헤이세이 말에 제작된 <다카포>는 신지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고, 미안하다는 답변을 얻어내도록 한다. 이 대목에서 “에바에 타기를 강요했던 아버지(주인공 되기)”는 “꼭 네가 아니어도 괜찮았고, 너는 그 자체로 소중했다.”고 말하는 아버지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야기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역할에 의구심을 품던 헤이세이가 ‘이야기와 인물 사이의 불일치’를 긍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는 아마도 리오타르가 말하는 거대 서사의 붕괴, 이야기 안을 살아가던 시대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대로의 변화가 전제되었을 테다. 죽고 난 다음(어둠)에야 삶(빛)을 회상하던 시대는 이제 무대를 가리는 커튼 뒤에서 다음 장막을 준비하는 연기자의 시대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가후쿠를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시대에 대해 말해볼 필요가 있다. 가후쿠가 연기를 그만두고 감독 일을 하게 된 건 자신의 이야기를 벗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가후쿠, 그는 딸도 아내도 모두 죽었다면 이미 이야기는 끝나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야기를 끝낼 자신은 없으니 무대에서 그냥 하차해 주인공의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버리고자 했다. 이 가정이야말로 <드라이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가후쿠가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무대가 가후쿠를 거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가후쿠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이 무대는 어둠을 잃고 하나의 빛을 내리쫴야 한다는 점에서 화이트리스트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가 묘사하는 것처럼, 영화는 어둠 속에 드러나는 가후쿠의 하얀 얼굴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가후쿠의 아내는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가후쿠는 이야기보따리에서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하나둘 조합하여 다음 진도를 가늠하지만, 아내가 죽고 난 뒤로부턴 이 이야기는 이어지지 못한다. 가후쿠에게 이미 남겨진 유산이 있음에도 이 유산들에 손을 대는 건 불경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그냥 그 자체로 무대가 되어버린 탓이다. 따라서 만약 무대가 가후쿠를 거부한다면 그 이유는 가후쿠를 주인공으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헤이세이에서의 탈출을 다루는 <드라이브>는 화이트리스트에서 블랙리스트로의 변주를 암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후쿠가 평화의 공원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삽입된 터널 장면은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어둠에 동화되는 가후쿠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게 무대에 서길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이제 가후쿠가 올라야 할 무대는 꼭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는 화해와 공감의 무대이다. 바꾸어 말해,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닿게 하는 것만이 꼭 연기에 해당하지만은 않는다. 이야기를 피해 도착한 곳도 결국 낙원이 되지는 못한다. 


평화의 공원이 원폭을 다루는 장소라는 점에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곳에 보존된 검은 그림자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 수 있을 테다. 백색 빛이 만들어낸 검은 형체, 원폭이 떨어지자 증발해버린 인간의 시체가 그림자의 형태로 각인된 계단은 역사적 시간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화이트리스트에 해당한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계단에 남겨지고야 말았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에서 상실되어버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는 역사 안에서 꺼져간 게 아니라 역사에서 밀려나 버렸기에 지금의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다. <드라이브>가 보여주는 상실감이 사실은 영화 안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헤이세이란 역사에서 밀려나 버린 것들, 즉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감정이다. 일어나게 될 현실을 이야기하는 건, 능력의 모자람을 탓하거나 시대와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일이 아니라 그게 이미 우리들 현실 안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하얀 것’을 이야기가 진행되는 세계라고 가정할 경우, 이를 두고서는 너무 강렬하기에 기억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카페 등에서 섞인 소음을 두고 ‘화이트노이즈’라고 칭하는 대목을 떠올려보자). 즉 원폭이라는 사건은 이미 이야기될 수 없는 처지인데, 이러한 점은 평화의 공원이 ‘반핵’이 아닌 ‘반전’으로써 존재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화이트의 반대말은 블랙이 아니라는 점, 전쟁에 얽힌 이야기는 다 사라져버리고 그런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들만이 남았다는 점 말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분명 인과관계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어쩌면 이는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이 설 수밖에 없는 곳을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가후쿠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 건 무대 위에 오르기를 거부해서가 아니다. 헤이세이적 인간인 가후쿠에게는 어디까지가 무대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필요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가후쿠는 안다. 그가 침대에서 나와 문을 열 것을 그 노크는 요구하고 있다. 강하고 집요하게. 그 누군가에게는 밖에서 문을 열 만한 힘이 없다. 문은 안쪽에서 가후쿠 자신의 손에 의해 열려야만 한다. (…) 가후쿠는 그 방문이 자신이 무엇보다 원해 온 것이며, 동시에 가장 두려워해 온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제 가후쿠는 어둠에 자신의 몸을 맡겨야만 한다. 그 어둠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나만의 어둠이기에. 


보론 : 헤이세이적 인간과 리오타르적 상황


이 대목에서 나는 헤이세이라는 말을 보다 넓은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 내수용인 이 단어를 세계적으로 바라본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료타가 지적하듯 하마구치의 영화에 “치유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적 신체’가 있다고 본다면 이는 세계정신과 세계신체라는 면에서 탐구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료타는 “’세계정신’은 있을 수 있어도 ‘세계신체’는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이미 이에 대립하는 영화 한 편을 알고 있다. 바로 하마구치가 기요시와 협업한 <스파이의 아내>(2020)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감독하고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본을 쓴 이 영화에서 코스모폴리탄은 작품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코스모폴리탄이란 그야말로 세계주의, 이를 지향하는 일은 곧 ‘세계시민’이 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파생되는 영화 속의 의문이란 다음과 같다. 사토코(아오이 유우)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의 신념에 동참하길 표하며 말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말하자면 코스모폴리탄적 정체성에 합류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의지의 표명을 지지하겠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만약 전자일 경우 사토코는 세계신체에의 지지, 신체는 한계를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와 세계 안에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때의 ‘스파이’란 국가적 정체성이 아니라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배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치 과거로 떠난 트랭크스가 드래곤볼 세계 전체를 바꾸듯, 이때의 스파이는 그들 자신의 세계에 심어진 미래 타임캡슐 형태의 폭탄인 셈이다. 


유리 로트만의 경우, 폭발은 무질서의 원흉이 아닌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게 하는 결단력이 된다고 한다. 여러 가능성의 형태로 공존하던 미래가 폭발을 통해 하나의 선택지로 결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적 맥락에서 세계정신을 실현해가는 의지로 풀이될 수 있다.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수행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에서 이들 스파이는 그들 자신이 폭발로 이해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즉 이들의 행적은 개인의 삶이 아닌 세계의 맥락에 주안점을 두기에 그 자체로 신체를 초월한 것이기도 한 셈이다. 쉽게 말해 폭발의 순간에는 예외란 게 없다. 그래서 <스파이>에서 세계정신은 세계에 소속된 세계신체를 만들어낸다. 


이를 단순히 후자의 경우로 바라본다면 배우자에 대한 지지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아내’라는 키워드는 <드라이브>에서의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료타는 <드라이브>에서 아내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음(드러냄)을 지적하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치환할 수도 없고, 그 상실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음을 말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드라이브>에서의 아내가 결국에는 ‘가후쿠의 아내’라는 하나의 종속항으로만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가후쿠의 아내는 ‘이야기되기’라는 동사적 상황에 가후쿠를 데려다 놓는 시발점으로만 남아버린다. 이름 하야 사건적 신체, 가후쿠의 아내는 자신이 아니라 이야기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가후쿠의 세계를 폭발시키고, 자기 죽음 이후의 시점으로 가후쿠의 운명을 고정해버린다.


따라서 <드라이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정석적인 해석을 따라 ‘세계정신’으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다. <드라이브>를 세계정신으로 바라보는 일은 ‘헤이세이’라는 거대 서사를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화이트리스트). 두 번째, 리오타르적 상황을 따라 <드라이브>를 세계신체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다. 거대서사가 무너진 세계에서 신체는 이야기되기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세계를 좌표화하기 위해 필요한 송과선이다(블랙리스트). 마지막으로 나는 료타가 말했던 문구를 가져와 다음처럼 수정해보려 한다. “’이야기(아내)’를 다른 무엇으로 치환할 수도 없고, 그 상실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다.” 이렇게 고쳐 써보면 <드라이브>는 ‘헤이세이 안에서 거대서사의 붕괴를 말하는’ 영화임이 드러난다. 거대서사의 붕괴가 이루어진 시기가 바로 헤이세이인 게 아니라, 헤이세이 안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말소가 바로 가후쿠의 처지인 것이다. 


일리야 프리고진은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불가능함을 보여주려는 가능성 자체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드라이브>에서도 가후쿠는 끝내 자신이 아내를 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가후쿠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이야기되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이었다. 세계신체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세계의 좌표이며,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란 무언가에 의해 전해지거나 말해지는 게 아니라 이들 사이의 관계 그 자체이다. <드라이브>가 움직이는 극장이자 무대이자 폐허인 것은 그 때문이다. 폐허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음’을 말해주는 장소니까.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료타의 헤이세이적이라는 말은 그러한 폐허의 지점에서 다시금 시작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신체를 통해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날씨의 아이>의 추락장면처럼 서로를 껴안고 세계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해 수직 낙하하는 일? 혹은 <진격의 거인>의 땅울림처럼 세계신체가 세계의지를 추동할 수 있다고 믿는 일? 안타깝지만 두 작품에서의 두 가지 솔루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인지 헤이세이에 발을 걸친 가후쿠를 조금은 더 따라가 보고 싶다. 실체와는 무관하게,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곳은 폐허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폐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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