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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6. 2022

비평의 아마추어리즘화는 키치의 일종


무언가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게 키치라면, 비평의 아마추어리즘화는 키치의 일종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키치는 기술복제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해 오늘날에는 ‘유사(pesudo)’에 만족해버리는 이들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비평가’라는 단어가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 정말로 ‘비평가’인지를 모르게 되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무엇이 원본인지를 모르게 된 기술복제 시대의 일면이 비평계에 적용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혹자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말하면서 비평에 원본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진리’를 찾아 떠나는 이들의 여정에 물을 끼얹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의미하게 따라할 뿐인 게 아니라면, 비평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비평이라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원본일 수밖에 없다.


허나 원본이라는 말이 아우라와는 동떨어져 버린 이 시대에 원본의 가치는 증명하는 것도, 증명받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그런 점에서 비평이라는 행동은 점점 더 키치에 가까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딱히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끌고 올 생각은 없지만, 절대적 진리에 가까워질 수 없다는 현실을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태도로 일관하는 걸지도 모를 노릇이다. 말하자면 ‘키치’의 ‘비-진지함’이란, 진지함에 반대한다기보단 진지함이란 개념을 알 수 없게 된 오늘날의 현실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주제에 비견될 현실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보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 책이든 인터넷 강좌든 정보에 대한 접근법은 모두 재화와 관련 있다. 간편히 말하자면, 기술복제시대엔 정보도 그렇게 된다. 원본과 복사본의 가치를 논하는 일은 예술 작품을 원본으로, 그에 대한 비평을 (아우라의 필사라는 면에서) 복사본으로 가정할 때 비평의 키치화로 이어진다.


무엇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진리’를 뜻한다면, 진리를 알 수 없게 된 세상에서 ‘키치’란 선택이 아닌 필연일 것이다. 하지만 아우라를 가진 원본이 박물관에 틀어박히는 한편, 그런 원본을 모방한 저급 양산품은 세상의 다방면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혹자는 비평계에서 이미 진리화된 몇몇 사실들을 두고서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선생님의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키치라는 말을 생각하면 이러한 모습은 진리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자신의 진지함에 대한 선언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즉 진지함에 대한 거부는 오히려 진지함에 대한 선언이 되는 점, 바꾸어 말하면 이는 비평계에서 ‘비-진지함’이라는 말이 ‘선생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주변부에 머무르는 것을 지칭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비평의 키치화라는 말은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은, 진지해지고 싶지 않은 이들의 일면일 수도 있다.


*


무언가에 대한 희소성이 감소할수록 그에 따라 가치도 줄어드는 건 시장 경제에서의 일반적인 상황이다. 헌데 이에 따르자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된 오늘날의 현실은 오히려 글의 가치를 줄어들게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즐길 시간이 없어서 결국 무언가를 보길 포기해버리듯, 쏟아져나오는 글들을 다 읽을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 요컨대 글을 쉽게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무관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가 양산되기에 오히려 중요한 정보를 놓쳐버리고야 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글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는 글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얼마나 쉽게 접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된다. 여러 중요한 일을 하는 사이 시간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 자리에 한번 앉았을 때 큰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 짧고 가벼운 이야기 등.


이런 시대에선 만듦새가 곧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만도 아니다. 동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들을 봐야만 대화에 낄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엉성함은 넘길 수 있다. 가령 유튜브 등에서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뜬 맥락 없는 쇼츠를 떠올려보자.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진 않지만, 이것들이 다른 것들의 중핵으로 자리하기에 이를 알아두면 즐길 수 있는 게 많아진다. 바꾸어 말해 어떤 정보든 간에 자신의 특성을 감염시킬 수 있는 정보가 등장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완전한 창작이 아니라 감염의 형태로 창작이 이루어짐으로써, 새로운 콘텐츠를 양산하는 일은 이전 시대에 비하면 몹시 쉽다. 혹자의 말처럼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이 풍조는 시간의 집중과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원액에 가깝다. 그렇다면, 너무 농축되어 맛보기가 꺼려질 수도 있는 이 원액의 농도를 조절하는 게 대중화의 관건이 될 테다.


그런데 이는 영양소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닐까. 물을 너무 많이 타버리면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평을 예로 들자면, 이를 더 쉽게 가공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쭉정이처럼 변해버릴 우려가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만듦새에 관한 가치는 여전하지만 오히려 그런 만듦새를 소화할 수 있는 쪽의 시장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좋은 상품을 알아볼 심미안을 지닌 대중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게 맛있는 음식인지는 다들 알지만, 구태여 시간을 내느니 적당히 타협해버리자고 여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지만 굳이 원본을 보러 프랑스로 떠나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림을 익히는 것에 지면은 별 상관없기 때문이다. 맥락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한 편의 좋은 글을 읽기 위해서도 그만한 노력을 투입하는 이는 위와 같은 ‘굳이’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같은 정보라도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곧 돈인 시대에 정보의 영양가는 편리함을 위해 얼마든지 소모될 수 있다. 채소 샐러드나 멀티비타민 알약이나 결국 같은 영양소일 뿐이라고(섭취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비평에서 글이라는 형식이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된 건 영상 매체가 더 쉽고 빠르고 재밌기 때문이다. 딱 잘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문자라는 형식은 인간이 살아가는 3차원 즉 ‘시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기에 오히려 동시대에 소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한다. 시간의 도입과 함께 영화 매체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던 사례를 떠올려보자. 우리에게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표현하면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알아서 흘러간다. 그래서 시간 하의 인간은 수동적이 되고야 마는 반면, 글을 읽을 때는 가만히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글은 지평선이 아니라 평면에 자리하므로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열심히 땅을 파볼 수밖에 없고, 이는 즉 ‘능동성’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근래에 비평의 쇠퇴 풍조는 반지성주의와 같은 맥락보단 그냥 섭취 방법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하는 비평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오디오-비주얼 에세이와 같은 형식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오디오-비주얼은 글로 써야 할 것을 말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구술의 성격을 띠며, 문자보다 세밀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특유의 직관으로 인해 갖는 디테일이 있다. 시간의 주름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영상 매체는 이점이 있고, 이러한 점은 즉 시간을 무화하는 평면성의 매체인 글과는 다른 형태의 인식론을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우리가 비평에 기대하지 않는 진지함은 이미 다른 형태의 진지함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절대적 진리를 양산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는, 특유의 간편함으로 인해 무거운 현실 사이에 침투할 수 있는 감염의 양상 말이다.


일전에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두고서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듯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은 단지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 양쪽 모두로도 작용한다. 이를 따르자면 오늘날의 비평은 우리가 당장 해내야 할 수행의 과제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현실에 혁명이 일어나길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비-진지함이라는 말은 그런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처음에 비평의 키치화라는 말은 비평이 너무 많이 생산되는 시대에 절대적 진리가 소멸하고, 이에 따라 처음부터 주변부에만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등단을 목표로 하기보단 트위터나 블로그 공간 등지에서 활동하고, 주류 담론이 어떻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허나 바꾸어 말해 이는 ‘진지함’이라는 중심부로 들어가기보단 주변부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사명이라는 점이기도 하다. 만물을 관통하는 이론 따윈 없지만 서로를 통해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


언제든지 모이기 쉽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게 되었다면, 한자리에 모이지 않아도 혁명을 일으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방법은 차라리 키치가 되는 일이다. 키치의 특징 중 하나는 중심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중심을 영유한다는 점인데, 자신이 소속된 공간, 그러니까 주변부를 통해 확립되는 키치의 정체성은 주변 지대의 안정화를 동반한다. 요컨대 더 많은 키치가 생겨날수록 유동적 지대 안으로 더 많은 진리가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세상은 인간 사이의 결합을 통해 안전망으로 발전한다. 이는 탈중심화를 꾀하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관련 있지만, 너무 많은 문제를 상대해야 하는 우리가 그 모든 일에 적용될 만한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어디가 중심인지도 모를 상황에서는 당장에 소속되어 있는 곳을 점령하는 일이 곧 전체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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