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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3. 2022

해적질에 관한 단상: 정품이라는 신화


마테리알에 연재되는 한민수의 ‘해적질’ 시리즈를 읽었다. 처음에 나는 한민수를 마테리알의 공개 이벤트 홍보 포스터로 접했는데, 이름 옆에 아무런 직함이 없어 의아했었다. 이에 댓글로 문의하니 마테리알측에서는 “기대하시라 후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답변을 들었을 땐 조금 황당했지만, 한민수의 글을 읽고 나니 아무쪼록 그가 자신에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게 이해됐다. “나는 해적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서두에는 그 어떤 직함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가 활동하는 사이트는 ‘씨네(아)스트’를 닮은 ‘씨네스트’이므로 영(화)광으로 불리는 일이 오히려 영광인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광이라는 말이 해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일은 좀 이상하다. 해적이라는 말이 비합법적인 경로로 무언가를 갈취하는 일을 뜻한다면, 영화를 보는 방법이 불법만 있는 게 아니니 영화광이 꼭 해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한민수가 말하는 해적의 의미란 밀수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밀수는 합법적인 루트를 거치지 않고서 물건을 들여오는 일을 뜻하는데, 사실 밀수는 그 당의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가령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인조 혈관을 밀수하는 모 의사를 떠올려보자. 이 행위는 위법이지만 한편으로는 위법성이 조각나기도 한다. 같은 논리에서 영화를 밀수하는 일을 위법성 조각에 빗댈 수는 있지 않을까-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합법적으로 감상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불법으로 본다는 말은 마나토끼나 애니24 같은 사이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영화를 산업이나 콘텐츠가 아닌, 예술과 감상 활동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위법성 조각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바로 이때 해적이라는 오명은 사라질 것이다.


다른 한편 나는 해적이라는 말이 단순한 감상 활동에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덕구도 잘 지적했듯이 영화광에게 해적질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와 만나야겠다는 도착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도착은 사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매료되어 이끌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위해 금기를 위반할 때 이 사랑은 병리적인 게 된다. 다만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그것을 기리고, 보전하고, 기록할 요령이라면 이 해적질은 허락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 영화 수집광이 하드디스크에 영화를 물리적인 파일의 형태로 간직하려 든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원초적인 면에서의 ‘본다’는 말에 충실한 처사다. 자막이 있으면 영화를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게 맞지만, 사실 영화의 본질은 사진이자 연극이라는 점에서 자막은 부가적인 요인일 뿐이다.


한때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더빙이었지만, 영상에 목소리가 결합하고 나면 자막이 아니라 영상 자체를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영상 자체에 목소리가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자막을 만들어가는 시네스트 커뮤니티의 기능은 사실 밀수라고 보기 어렵다. 훗날 영화 속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미래가 오더라도 영화에서 자막은 보존되어야 할 게 아니다. 소설처럼 시작 언어가 글이라면 이런 문자까지 포함해 보존하는 게 맞겠지만, 영화에서 자막은 어디까지나 보는 이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것일 뿐이다. 자막이 없어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될 요령으로 자막을 찾는 일은 당치도 않다는 소리다. 밀수라는 말이 무언가를 들여온다는 맥락이 더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네스트는 해적이 아니다. 시네스트는 영화광 사이트다.


자막을 만드는 일이 왜 밀수인가? 자막을 만드는 일도 결국 해당 파일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걸 고려하면, 자막이라는 건 더 많은 사람이 이걸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유인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더 많은 사람에게 이를 전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유와 독점으로 이해되는 해적은 아닌 셈이다. 만약 우리가 해적이라는 말을 밀수로 파악한다면 영화광은 밀수자다. 그러나 해적이라는 말을 자본의 축적과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범죄자다. 콘텐츠 산업의 논리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무엇이 정품인가’를 규정할 때 통용되는 논리가 독과점을 구성하는 것에 사용된다면 해적질은 그에 흠집을 내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헌데 그렇다면 콘텐츠 산업의 논리와 예술 작품 사이에서 저작권은 어디에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바로 고다르에게 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을 만들 때 가장 애를 먹었던 게 바로 저작권이라고 한다. 저작권 때문에 발매를 포기할 생각도 했다는 그에게 이런 프로젝트가 완수될 수 있었던 건 그가 독과점을 주장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영화의 언어는 고유할 수 없다는 그에게 영화는 유동하는 이미지였고 따라서 이미지의 조합은 언어가 될 수 있었다.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영화는 달리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는 고다르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중간마다 짧게 들어가 있긴 하지만 고다르 본인에 따르면 딱히 불어를 몰라도 상관없다고 한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긴 바란다-그리고 무엇이 거기에 있는지는 온전히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자막도 영화를 해석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의 의미를 조합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작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자막을 제작하는 일 자체만으로는 저작권에 위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책임은 자막을 배포하고 내려받는 과정에 있다. 토렌트 프로그램 사용에서 문제되는 게 피어교환이듯 자막을 사용한다는 건 영화 이미지의 좌표값을 현실세계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문제시된다. 내려받는 일이 곧 업로드하는 일과도 같다는 점에서 이 해적질은 단순히 무언가를 들여오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바로 이 부분, 그래서 나는 해적이라는 말이 낭만적으로 이해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자막 같은 건 아무런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막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즉 그들과 영화와 우리 삶 간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 경우 자막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애호 그 이상이다.


물론 토렌트 등지에서 오래된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경험은 나에게도 익숙하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를 보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이에 대해 금동현은 한국영화에서 사라진 오래된 영화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정전에 올랐지만 이미 소실되어버려 다른 텍스트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영화들에 대한 언급 말이다. 이렇게 영화를 후천적으로 구상하는 일은 그 이미지를 문자로 기록하고, 이를 다시금 분석한다는 점에서 원전에 대한 해적질과도 같다. 영화 자막 번역가가 영화 영상을 보지 않고 번역 작업을 하는 판에 영화에 대한 문헌학적 발굴이 영화 영상을 경유해야만 하는 이유는 꼭 없다. 그렇게 본다면 자막은 모종의 고고학적 맥락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테다. 토렌트를 통해서라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건 말이 단순한 해적질이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방법이나 수단이 아닌, 그냥 ‘보고 싶다’는 마음 자체다. 다만 그 방향이 미래가 아닌 과거일 뿐이다. 그 점에서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해적질을 하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와 브런치를 동시에 운영하는 입장에서, 네이버는 정돈되지 않은 글을 올렸다가 별도의 고지 없이 글을 합치거나 수정하곤 한다-네이버 쪽은 마치 실험대처럼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마다 가끔은 나 자신이 시간 여행자처럼 느껴지곤 한다. 게시물을 언제 수정했는지는 별도로 시스템상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시점에서 과거 시점의 게시물에 침투하는 일은 일종의 시간여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헌데 이 시간여행이 과거에서 기록된 역사를 바꾸려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역사와 기록에 관한 해적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서 무언가를 현재에 들여오는 일, 그러니까 이 밀수는 역사에 정사는 없다는 것 즉 ‘정품’이란 없다는 점을 전제하기에 가능하다.


*


개인마다 성별과 연령 등이 다를 테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개 해적질이라는 말은 저작권 의식이 희박하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주로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단순히 타인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갈취할 뿐인 일 이전에는 보존의 논리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만이 있었을 뿐. 예를 들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거나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는 일은 아날로그 시대에 흔한 일이었다. 한번 놓치면 이를 감상할 기회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기록은 메모와도 비슷한 성격을 지녔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물이 일종의 ‘잉여’로 진출함으로써 이렇게 사적으로 기록된 저작물을 재판매, 혹은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이들이 생겨났다-게임 데이터를 짜깁기해 만든 이미테이션 게임기나, 불법으로 리핑되어 판매되는 음악 앨범 혹은 한국에서는 정식 루트로 구해볼 수 없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등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원시적인 면에서의 데이터 사회의 산물인데, 아직 아날로그 시대라는 점 덕택에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따라 정직하게 진화해갔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데이터는 곧 자본이자 부이자 권력이기도 했다. 헌데 그렇다면 시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토렌트를 켜두면 자동으로 파일이 더 생겨. 한마디로 파일이 복사가 된다고.” 201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보처리기술 혁명은 크게 인공지능, 블록체인, 암호화폐라는 세 가지 현상을 낳았다. 인공지능은 규칙만 설정해주면 그 이하 단에서는 알아서 학습하는 쪽으로 진화했고, 블록체인은 네트워크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흔적을 남김으로써 데이터의 존재를 세계 자체에서 인증받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을 응용해 탈중앙화를 외치는 것으로, 정작 그 존재가 중앙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세 가지 현상이야말로 해적질이라는 말에 접근하는 세 가지 방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블록체인 기술을 살펴보자. 이미 사라져버린 영화에 대한 연구는 여러 파라텍스트들에 의해 상호검증되면서 ‘정말로 있는 것처럼’ 여겨야만 가능하다. 나운규의 <아리랑> 같은 게 이에 해당한다. 다음으로는 인공지능, 최초의 대전제를 통해 프레임 안으로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이 학습툴은 오늘날의 매체 환경에서 세계를 학습하는 자동기법으로 전유된다. 마지막으로는 암호화폐, 탈중앙을 표방하지만 주변부가 곧 중앙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는 신경망의 작동원리와도 유사하다.


            가정 1: 해적질에서 중요한 건 “어딘가에는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가정 2: 해적질에서 중요한 건 “집단지성을 이용하고 응용하는 방식”이다.          

            가정 3: 해적질에서 중요한 건 “네트워크는 방대해”라고 되뇌는 일이다.          


이 세 가지 가정을 보며 <원피스> 같은 만화를 떠올려도 이해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디지털 시대에 가난이란 '빈곤한 것', 즉 주목받지 못함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했던 게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 팽배한 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마음’이다.


과거에 가난한 이들이 불법다운로드를 했다면 오늘날에 가난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정품 콘텐츠를 의미한다. 히토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라는 말을 분쟁 지역에서의 소외 개념으로 설명했다면, 한편으로 그녀가 말했던 전쟁 극장이라는 말이 ‘스펙터클의 밀수’를 뜻한다면, 무엇이 정말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묻는 OTT 플랫폼에서 나에게 딱 맞는 영화를 찾는 일이란 바로 그러한 빈곤함을 뜻한다. 가령 볼 게 많은데 볼 게 없다는 말은 인공지능 큐레이션 서비스가 개인의 영화관에 완전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살아가는 세계 안에 있을 뿐인 영화를 우리가 마주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이 세계에서 가난이라는 말은 정보의 풍요 혹은 데이터의 범람을 뜻하며, 이는 데이터 세계에서 영화 파일이 무한에 가깝게 복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할 수 있는 영화들이 점점 열화되는 한편, 구할 수 없는 영화들은 점점 선명해진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질지도 모르겠다. 기록이라는 게 그나마 미약했던 옛 시절에는 발견되는 영화가 곧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기록되는 오늘날에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게 될 영화’를 발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곳에서 취향은 선제적이며, 해적들이 원하는 건 그러한 네트가 보여주지 않는 세계 바깥의 것을 자신의 안방극장에 가져다 놓는 일이다. 우리는 분명 개인의 취향이 네트워크의 산물이라 배웠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 이유는 바로 오늘날의 네트워크가 미래 방향으로 선제시되는 예측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렌트 서비스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국 정보란 건 어딘가에는 존재하기에 공유되는 것이다. 토렌트가 표방하는 주변부가 한 개 파일이라는 중앙으로 모이는 일은, 이것이 네트워크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임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조차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깥은 없고, 이는 한때 암호화폐가 가져다주었던 유토피아에 정확히 부합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아포칼립스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다고 말했던 마크 피셔를 떠올려보자. ‘보고 싶은 영화’란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에 등장한다. 이른바 ‘취향’이라는 말은 사실 영화가 사라질 것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탄생한 용언이다. 한편으로는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같은 리스트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왜 볼 수도 없는 영화를 두고서 글을 쓰느냐고 물었던 시절도 있었다. 이처럼 모두가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독점에 관한 질투와 시기, 혹은 그러한 가난에 박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해적질에서 취향이 곧 부의 척도가 됨을 보여준다.


어떤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말은 그게 자신의 확고한 취향임을 표현하는 것과도 같다. 반대로 말해 이는 그러한 취향을 내세울 정도로 자신은 (지식이나 자원 등에서) 풍요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배는 뭔가? 성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는 미 서부 개척 시대에 있었던 골드 러쉬다-황금은 진짜로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골드러쉬에서 정말 중요했던 건 그렇게 모여드는 이들의 꿈 자체였다. 즉 해적질이란 자기 취향을 찾아가는 발굴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은 되려 불확실한 자신의 현실을 한 곳에 응축해준다는 점에서 확실함으로 작용한다. 라스베가스가 카지노라는 확률론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사막 속의 오아시스로 만들듯이, 해적질은 토렌트와 같은 피어 교환에 의존하면서 네트워크 안의 자신에 좌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무엇보다 이 가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우리가 그동안 인간의 가치로 표방해왔던 여러 것들이 단순한 데이터로 치환됨으로써 생겨나는 흥미로운 공식이다. 가령 위에서 ‘빈곤한’이라는 말을 데이터의 열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서 사용했던 단락을 떠올려보자. 영화적 감상을 생산하기 위해 그에 따른 설비인 인적 네트워크, 혹은 토렌트나 디스코드와 텔레그램을 비공개로 독점하는 일은 되려 그러한 감상이 있다는 확실함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닐까. 기술복제시대, 그러니까 크게 보면 자본주의 시대에서 아우라의 일회성을 역설했던 벤야민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옳다. 여러 주변 이야기를 거쳐볼 수 있겠지만 확실하게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경험을 바로 그러한 성배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무한으로 복사되면서 서서히 열화를 거치는 빈곤한 이미지는 ‘영화를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게 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러한 재관람의 행위가 첫 만남의 아우라를 깎아 먹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영화를 사운드, 쇼트, 인물 사이의 관계, 내러티브 등에서 더 자세히 볼 요령으로 재관람하지만, 이러한 재관람이 영화에 대한 기술적 이해도를 높여줄지언정 처치 곤란할 정도의 데이터를 안겨준다는 점은 쉽게 간과하곤 한다. 물론, 재관람을 통해 빈곤해진 감상이 딱히 ‘가난’하다고 해서 나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빈곤한 이미지는 세계에 만연함을 뜻한다는 점에서 네트워크 전체로 연결되는, 우주 배경 복사 이미지 같은 흔적일 수도 있다. 이 우주론에 따르면, 관측되어 온 무언가는 항상 과거에서 관찰되어 온 이미지다. 해적질도 마찬가지다. 해적질을 보존이라고 믿는 일은 그와 반대로 ‘잔존’을 쫓는 일이다.


*


OTT 시대에 극장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문제는 이제 좀 시시하다. 이 둘 사이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상호보완적 역할에 가깝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극장에 없는 영화를 OTT에서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극장의 입지 상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이 영화만큼은 꼭 극장에 가서 봐야겠다는 말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의 특수적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극장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해야만 한다’라는 조동사에 가깝다. 극장은 어떤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 영화를 사랑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장소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영화 값이 많이 올랐고, 이런 상황에서 극장은 큰마음을 먹지 않으면 가지 못할 장소가 되었다. 혹자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에 가격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기다리면 무료’가 하나의 소비방식이 되어버린 요즘 ‘극장’은 바깥과 경쟁해야만 한다.


기다리면 무료, 통칭 ‘기다무’는 온디멘드 시장에서 등장한 판매 전략이다. 기성 매체가 정해진 스케쥴을 토대로 자사의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이에 시청자는 특정 시간에 맞춰 자신의 삶을 조절해야 했다면, 온디멘드 시장은 사용자가 원하는 때에 접속해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즉 주도권을 시청자에게 넘겨줌으로써 방영 시간과 같은 라이프 스타일에서는 점점 멀어지되, 개개인의 성향과 취향에는 더욱 다가선다는 점에 그 이점이 있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게 바로 웹툰&소설 시장에서의 기다무다. 기다무는 콘텐츠가 올라오는 시점은 불규칙하거나 일정하지만, 이를 무료로 관람하는 티켓을 24시간 순으로 배부함으로써 이용자에게 기다림의 요소를 부여한다. 즉 온디멘드 시장에서 제거되었던 기다림의 요인을 부분적으로 살려냄으로써 먼저 보고 싶으면 그냥 돈을 쓰라는 식의 선택권을 준다.


기다리면 무료라는 말은 단순한 VOD 서비스뿐만 아니라 해적질과도 관련이 있다. 토렌트 등을 통해 유포되는 영화는 VOD로 서비스되는 영상에서 DRM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해적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그게 극장에서 내려와 VOD로 서비스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경우 극장은 ‘먼저 보고 싶으면 그냥 돈을 쓰는’ 장소가 된다. 따라서 해적들에게 토렌트는 불법행위라는 자각보다는 콘텐츠를 즐기는 하나의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물론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라면 별수 없이 집에서만 즐기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극장은 어디까지나 최신, 아트 시네마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수익이 나는 작품을 내걸기 마련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영화가 곧 최신이 아닌 경우 극장에 가는 일은 소수로 제한되고야 만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토렌트를 이용하는 패턴에서 최신 영화가 자리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배급사나 제작사, 극장 등에 타격이 가지 않는 정도의 기성 영화라면 토렌트 이용은 별반 문제 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 경우 해적들은 ‘기존’과의 공존 혹은 생존권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극장에 가는 게 번거로워서가 아니라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가 있으며, 극장에서는 이를 막을 권리 같은 건 없다고 말이다. 확실히 이런 발언은 저작권 등의 이유로 민간에 공개되지 않는 몇몇 영화들에 관해서는 옳은 구석이 있다. 영화가 예술인 만큼 특정 영화를 독점하는 일은 단순한 수익창출 목적을 넘어서 게이트키핑에 비견될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기본 전제는 해적질은 나쁘다는 것이나, 적어도 이런 논리에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오늘날의 영화들은 그 물리적 형태는 몰라도 기록으로 만큼은 플롯이나 제목 등이 남아있으며, 이는 그러한 영화가 세상에 있었음을 증빙하는 자료가 된다. 영화는 제작 시에 많은 자원이 들어가므로 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계획이 필요했고, 이는 곧 영화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기록이 됨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 태생부터 기록이었고 그러한 점에서 ‘볼 수 없는’ 영화는 있어도 ‘기록되지 않은 영화’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보존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지는 게 인터넷 시대의 보존이라는 일, 다른 하나는 남아있는 원본을 확보 및 복원하고 이를 물리적 형태로 보관하는 일이다. 후자는 주로 미술품의 관점에서 영화를 전시 및 보존하는 일이고 전자는 영화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지 상영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이다.


후자가 ‘후대에도 볼 수 있게 하자’고 말한다면, 전자는 ‘당장에 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느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에 이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차이이지 영화에 대한 저작물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건 아니다. 비슷한 논리로 DVD나 비디오테이프 같은 물리적 매체를 지적해볼 수도 있다. 해적들에게 어떤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은, 크라이테리온이 해당 콜렉션을 만든다는 말과도 같다. 크라이테리온이 해당 콜렉션을 만들고 나면 DVD를 역공학해 이를 토렌트 파일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이는 단순한 영화 파일인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여러 국가의 더빙과 자막, 풍부한 사운드가 결합된 ‘블루레이 원본’이다. 그래서 4K 해상도 등으로 나온 이 판본은 개인이 방문하기 힘든 고퀄리티 설비의 극장을 일부 대체한다-방 안에서 당신은 극장설비 기사가 된다.


가령 오래된 CRT 수백 대를 쌓아 만든 백남준의 디지털 아트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따져 물었던 논쟁이 있다. 백남준의 공식적인 답변은 ‘중요한 건 의도’라는 점이었고 이에 현재는 LCD로 교체된 상태다. 이는 예술의 본질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백남준의 작품은 ‘동시대 미디어 환경’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최신에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에 타당성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 관해서도 이런 점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목표로 하는 게 더 생생한 체험이라면, 동시대의 최신예 기술을 적용한 영화들은 후대에 이를 더 좋게 감상할 방법이 등장했을 때 자연스레 ‘원본’을 포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가령 오래된 영화를 두고서 벌어지는 상영 판본vs원본 필름 논쟁 구도는 영화를 구성하는 게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일종의 표면인 듯 여기는 듯하다. 티브이 방영에 최적화해 색온도가 붉어진 모 영화라던가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 고로 해적질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프로젝션에 대한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4K 블루레이 파일을 내려받아 보고자 하는 욕구는 극장의 큰 화면보다 더 선명하게, 내 앞의 모니터에서 보고자 하는 자기 주도적 상영의 일환일 수도 있다. 드미트리 렌더 같은 프로그램으로 프레임을 조절하는 한편, 영화에 딱 맞는 필터값을 찾아 이리저리 슬라이더를 돌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화광들은 어떤 장치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지를 크게 신경 쓰지 않기도 하지만(그냥 보기만 하면 좋다는),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화질에 집착하는 부류이기도 하다(영화를 더 잘 보고 싶다는). 이는 해적질 문화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영화 파일에 대한 소장 욕구라는 점에서도 신빙성 있다. 물리적 아카이빙이 필요한 이유는 이를 보관하는 일에만 그치지 않고서 그에 조작을 가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글을 유심히 읽은 이들은 이 조작의 행위가 역사적 맥락에서의 잔존과 정품이라는 신화를 경유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영화를 보존하는 일이 곧 영화가 어딘가에는 있으리라는 점을 가정하는 일이지만, 반대로 이게 그런 영화에 대한 하나의 판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방법의 다양화는 극장 또한 수많은 판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었고, 반대로 보면 이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판본 하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영화는 당대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나타난다, 고 우리는 이해한다. 그러니까 그런 영화를 찾아 헤매는 일이 전설 속의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또한 이 경우 해적들이 중요시하는 게 남들이 보기엔 상대적으로 얼빠진 무엇처럼 보이는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하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를 선별하는 능력이 발달이 곧 해적질의 경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한민수가 유효하게 지적했듯이 영화를 모으는 일은 수집 행위와도 같다. 어차피 그 모든 영화를 다 볼 수는 없겠지만, 언제든지 필요할 때 상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수집 행위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시각을 달리해서 볼 때 우리는 ‘무엇을 상영할 것인지’를 선별한다는 점에서 관객 스스로가 일종의 영화제를 열게됨을 알 수 있다-영화제란 특정한 목적과 주제를 가지고서 영화를 선별하는 일을 동반한다. 고로 해적질은 역사에 정사는 없다는 것, 혹은 좋은 영화 나쁜 영화를 마땅히 구분 짓지 않고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해적들은 무엇보다 욕망에 충실한 존재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영화는 작금의 현실에 불려 올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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