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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6. 2022

한국 영화의 제로 연대와 비천함

마테리알에 올라온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를 읽었다. ‘2000년대 한국 영화에 대한 언급의 부재’를 논하는 이 자리는 소위 말하는 90년대 시네필을 말하고 있었다. 먼저 함연선은 개인사로든 비평사로든 2000년대 한국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에 대한 이유로 함연선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80년대생에겐 너무 익숙해서 언급할 이유가 없고, 00년대생에겐 아직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전의 일이라 가시권 밖에 있는 영화들. 그렇다면 이제 막 자라면서 영화를 보았을 나이인 90년대생이야말로 이들 영화를 잘 기억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90년대생은 2000년대 한국 영화를 말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해당 발표의 전제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은 시네필이라는 정체성에 던져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발표에서도 언급되었듯이, “2000년대 한국 영화의 소외”란 시네필 문화가 정전을 필두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정전이란 리스트, 바꾸어 말하면 수배목록을 뜻한다. 당신은 보아야 할 영화들을 찾아가 하나씩 깨부수면서 도장깨기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정전 문화에서는 ‘보아야 할 영화’가 있지만 반대로 보지 말아야 할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보아야 할 영화라는 카테고리의 바깥이 미지의 영역으로 자리한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이는 세상에 영화가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강자’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리스트는 초보들을 위한 입문서이면서도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단계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치워야 할 고수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자’와의 대결을 원한다면, 리스트는 편리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는 수단이다. 모든 고수가 리스트에 기록된 게 아니라서 리스트 밖에도 강자는 넘쳐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시네필 문화에서 정전이 갖는 기능을 ‘도장깨기’라고 말하기보단 지질 시대와 같은 구분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문화라던가 어느 감독이라던가 혹은 국가나 연대와 같은 모든 면에서의 지층 말이다. 


다시금 2000년대로 돌아가 보자. ‘2000년대’라는 연도는 마테리알이 비교적 젊은 세대의식을 지닌 매체라는 점에서 귀인했을 공산이 크다. 세간의 분류에 따르자면 MZ라 할 수 있을 세대, 1990년대를 휩쓴 영화 붐이 꺼져버린 토양에서 자라난 세대. 이들에게 시네필 문화는 이미 꺼져버린 촛불처럼 이미 다 끝나버린 하나의 현상이다. 나는 이를 ‘무너진 낙원’이라 부른다. 무너진 낙원은 ‘한때 그것이 있었다’는 점을 알 정도의 잔해가 남은 폐허이기에, 유적의 일종이자 한편으로는 공간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한다. 예술사로 보면 르네상스나 네오 정도의 호칭이 붙을 만한 이 흐름이 바로 2000년대라 생각된다. 가령 우노 츠네히로가 2000년대를 ‘제로연대’라 불렀던 맥락을 떠올려보자. 어떤 사람들은 세계는 1999년에서 끝났고 2000년대부턴 이미 모든 게 끝나버린 상태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네트’의 보급으로 인해 연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제로’는 상대와의 분리를 통해 가능하다. ‘세카이계’나 ‘4차원’ 같은 문화적 코드는 바로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 징후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2000년대 한국 영화에 관심이 적은 것은 정반대로 우리들의 영화가 바로 그 2000년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2000년대 한국 영화를 제로 연대로 지칭하면서 오히려 그게 영년이기에 우리 시대의 보편타당한 척도의 한 기준점을 구성한다고 가정한다. 한국사에서 1945년이 현대사의 영년이듯이 2000년대는 현대 한국 영화의 영년이라고 말이다. 그 말인즉슨 2000년대는 2010년대와 20년대의 주축이 되는 지층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세상과 분리되어야 할 ‘제로’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영화의 2000년대는 우리들이 겪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신화의 장소였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2000년대가 그러한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망실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한국 영화 중에 ‘현대’라고 할 수 있는 시기, 2000년대가 바로 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따로 분리되어 나와야만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두고 싶다.


*


비천한 영화는 있는가. 누벨바그 갤러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댓글에는 꼭 “히갤로(히어로 갤러리로)”가 달리곤 한다. 일종의 밈이자 현실이기도 한 이런 모습은 영화를 보는 것에도 어떤 위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시네필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시네필은 상업주의에 찌든 영화가 아니라 예술 영화를 지향한다고, 저열한 상업영화에 맞서 영화관에 예술을 입점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몇몇 이들의 그러한 반응은 함연선의 오픈스페이스 발표에서 모 청중이 발언했던 바를 되새기게 한다. 미술사는 늘 이전 시대에 대한 살해로부터 출발하지만 영화사는 그 모든 영화를 살릴 수밖에 없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고. 그렇다면 타이타닉의 사례처럼 여자와 아이를 먼저 태우는 식으로 우선도를 배정하는 일이 충분히 있을 법하다. 어쩌면 우리의 착각은 그러한 우선도와 위계 사이에 있지 않을까. 어떤 영화에 더 비중을 실어주는 일이 과연 그 영화를 ‘구해야’한다는 마음에만 머무르는 걸까. 모두가 구하고 싶다면 그걸 구하는 건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게 아닐까. 


이에 대한 증거로는 영화는 늘 위기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느 예술이나 위기론을 설파하긴 하지만 영화 매체는 그 자신의 단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형태를 잃고 있다. 오늘날 영화는 ‘정해진 시간을 지녔고’, ‘그 안에 정해진 이야기가 있고’, ‘움직이는 형태의 이미지 혹은 꾸러미’라는 점에서 현대 영상 문화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이제 ‘그림 같다’거나 ‘소설 같다’는 말보다 ‘영화적이다’라거나 ‘유튜브 각이다’라는 식의 말을 더 많이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 매체가 시대적 표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불멸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자신을 ‘영화’라고 규정할만한 기준이 불분명해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이야기 작법에서 선과 악의 구분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취향이라는 게, 신념이라는 게 다양한 맥락으로 세부화되는 세상에서 ‘잣대’란 하나로 표준화되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는 선해보이던 게 각도를 조금 달리할 때 악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를 실현하는 게 주인공이라면 영화를 구하는 건 용사인가? 


“왜 이런 영화도 주목받는지”에 반해 “왜 어떤 영화는 주목받지 못하는지”를 불평하는 일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만듦새가 좋은 영화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과 영화의 지명도는 별개다. 어떤 형태로든 언급만 된다면 그것 자체로도 영화는 하나의 홍보 효과를 갖기 마련이며, 바꾸어 말하면 그냥 그 시기에 적절히 언급되는 것들이 정전의 자리에 오른다. 이 점에서 정전문화는 영화 사이에 위계를 형성하는 기능 이전에 그것 자체로 바이러스와 같은 형태를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당신이 ‘정전’이라는 말을 ‘바이럴’ 마케팅과 연결할 수만 있다면, 목록을 보며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을 테다. “모든 영화가 나와 잘 어울리는 건 아니”라고. 그럼에도 이들 영화를 보았다면 우리는 이 목록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정렬된 것일지를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 추천이 만약 누군가의 선정 기준이라면, 또한 우리가 ‘생존’의 기준이 ‘약육강식’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런 기준을 벗어나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보겠노라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진화란 환경에의 적응을 뜻하며, 생존이란 적자들의 전유물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정전에서 가치기준을 들이밀 수 없는 이유는 꽤 명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정전은 살아남았다는 점에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정전이란 영화를 줄 세우는 가치기준이 아니라 “무엇이 생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마다의 답변이다. 이 점에서 나는 어떤 영화를 살릴 것인가의 문제는 구한다는 문제에 관한 것이지 ‘어떤’ 것을 구할 것인지에까지 미치진 않는다고 본다. 가령 조선 시대의 요강이 현대에 와선 유물로서 전시되는 것처럼 ‘정전’은 현대까지 살아남은 것들의 표본이고, 이는 그게 본래 자리했던 지질 시대를 현재에 지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행동이다. 결국 적자생존이란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살아남은 쪽에서가 아니라 그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쪽에서 더 의미 있는 게 되어버린다. 그러니 ‘2000년대’가 정전의 자리에서 빠졌다면, 그 이유는 이곳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어서다. 2000년대가 비천해서가 아니라 한국영화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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