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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2. 2022

운송수단은 어떻게 오배의 가능성을 끌어내는가


우연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연은 사건이 될 수 없다. 우연은 우리에게 잘못 배달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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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에 관해 이지훈이 데리다를 언급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내가 유독 관심을 두던 개념이라 더욱 그랬겠지만, 데리다에서 아즈마 히로키로 이어지는 ‘오배’는 확실히 하마구치를 설명하기에 유용해 보였다. 먼저 오배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개념은 몹시 간단하다. 오배는 ‘오배송’을 뜻한다. 한번 문자로 쓰인 이상 읽는 이에게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피할 수 없고, 이는 코드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종국에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문자를 변형한다. 가령 들뢰즈의 푸코 해석이나 지젝의 헤갤 해석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차이의 연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믿었던 데리다에게 오배란 거진 오해의 연속을 뜻했다. 그러니 어떠한 오해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라면 이는 충분히 ‘오배’라 부를 법하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몇몇 영화들에서 일상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메르에게서 영향받은 여러 작가들, 개중에서도 홍상수나 하마구치에게 오배 개념이 통용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역시 필연이다. 


다시금 오배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자면. 이어서 아즈마는 이러한 오배에 긍정성을 부여하고자 시도하면서 ‘우편’이라는 비유를 든다(『존재론적, 우편론적』).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 일화를 ‘오배’하면서 “편지는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아즈마는 오히려 그러한 오배가 ‘의도하지 않은 소통’이기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낳는다고 말한다(『여행객의 철학』). 아무런 맥락 없이 마주하는 정보는 본래의 뜻과는 별 상관없이 수신인의 현 상황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아즈마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회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러한 오배를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게 아즈마가 말하는 ‘비일상’으로의 여행의 논지이다. 즉 오배를 기다리지 말고 직접 나서 유도하자는 것, 아즈마가 말하는 여행은 ‘능동적 오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오배가 일상이라면 비일상이란 비-오배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왜 하필 비일상은 능동적 오배가 되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오배를 구성하는 핵심 요인이 ‘연속’이 아니라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가 의도치 않을 때 우리는 그걸 일상이라 부르지만 오해가 의도적이라면 이는 비일상이 된다. 가령 새로운 만남을 위해 동호회에 가는 일 등이 바로 비일상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마구치의 <우연과 상상>은 왜 오배일 수 있는가. 첫 번째로, 우연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일상성을 띤다는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연은 우리가 예측 가능한 범위 밖에서 닥쳐오기에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의 성향을 띤다. 이 경우 비일상이란 ‘안쪽’으로의 일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깥’을 지칭한다. 예컨대 비일상은 반일상이 아니며, 되려 일상의 바깥을 가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상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즈마는 여행 또한 일상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일상의 연장선으로의 비일상을 논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마련된 비일상의 자리,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사건’이라 부르는 예외성을 우리의 삶에 편입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두고서 우리는 우연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는다. 우연은 어디까지나 첫 만남에서만 허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무언가를 마주한다는 ‘사건’은 얼마든지 반복사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건’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사건이 우리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정함으로써 이를 하나의 잡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가령 노이즈 낀 전파는 선명하진 않지만 라디오 우퍼를 통해 나름대로 들을만한 소리를 내어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에서 잡음은 오배를 유도하면서 그러한 우연을 상상가능한 영역으로 옮긴다. <우연과 상상>이라는 제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그러한 점일 것이다. 우연은 상상의 영역에 있을 때 비로소 오배의 가능성을 남긴다. 이를 통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가능해지고 어떤 사건이든 얼마든지 상상의 영역에 있다고 여길 때, 삶은 조금은 더 여유로워진다. 말하자면 (능동적) 오배란 ‘바깥’을 상상의 범주에 넣는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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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런칭한 사이게임즈의 [말딸]은 경마를 소재로 한 육성 게임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게임이 말을 의인화한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서라면 ‘달린다’라는 소재가 다소 도박이라던가 하는 것에 더 가까워진다. 가령 우리가 달리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용례가 ‘인생’이라던가 ‘노력’이라던가 하는 수사어구인 것에 반해, 말들이 ‘달린다’라는 표현은 어딘지 모르게 ‘도박중독’스럽고 ‘표박’스러우며 심지어는 택시의 요금 계산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말을 두고서 어떠한 비평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말은 그냥 말일 뿐이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달린다’와 ‘운송수단’을 겸하는 생물이었음을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말에 관한 한 가지 판단을 해볼 수 있게 된다. 경마라는 것에서 ‘달린다’가 트레이너의 노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운송수단’으로서의 말은 도박이라던가 표박이라던가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만 남는 걸까. 바꾸어 말해, 이 트레이너들은 확률을 조련하여 그것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확률을 조련한다는 말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 


몇몇 영화 작가들은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우연이 자신의 영화 안에서 다시금 운명이 된다고 믿었다. 즉 ‘우연’이 ‘운명’이 되는 것에는 이를 자신이 길들였다는 모종의 절차가 필요하다. 더 넓은 곳에서 이를 바라보자면 여기서 우연을 길들이는 건 아무쪼록 카메라일 것이다. 카메라는 시간의 흐름을 포착 및 기록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볼 수 없는 비가시 영역을 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카메라의 능력이란, 우연이란 게 단지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그 흐름을 읽어내는 자는 충분히 이를 조련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영화 작가란 우연을 길들일 요령으로 카메라를 도구로 응용하며, 이를 통해 우연을 다른 이에게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빙 이미지로서의 영화 매체를 지적해보고 싶다. 이미지가 ‘달린다’는 형태가 바로 영화라면, 기본적으로 영화란 노력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다. 허나 영화를 우연의 운송수단으로 이해할 때 영화의 겉은 도박이라던가 표박이라던가 하는 부정명사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그 안의 이야기를 강조하면서, 숏이라던가 구도라던가 하는 테크닉은 모두 도박에 가까운 무언가-확률론으로 변질되고야 마는 셈이다.  


확실히 이 말을 마냥 틀렸다고 만도 보기 힘든 건 ‘키노-아이’라는 카메라의 기술론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어서다. 카메라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고의 폭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카메라가 이미 그곳에 갈 수 있다고 가정해야만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있음을 전제하게 된다.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찍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니므로 ‘발견’일 지언정 ‘발명’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연’이라는 말은 이미 운송수단으로의 영화 매체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영화가 ‘달린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안에 탑승한 이들을 대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달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영화는 우연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 우연을 초과하고자 노력한다. 밖에서 ‘우연’으로 주어지는 어떠한 마주침이 아니라 그러한 만남 이전에 자신의 능력치를 올려두어야만 비로소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운명과 사건의 관계를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으로 운명이란 것은 우리의 노력 이상에 자리한 무언가로 여겨지고 있지만, 달리 보았을 때 이는 우리가 걸어야 할 정도를 뜻하기도 한다. 가령 모든 인간의 운명은 결국에는 죽음이다. 이 사실은 모두가 예측 가능하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력 이상이지만,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늘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에 대한 한 가지 제언이 되기도 한다. 그 말인즉슨 운명이란 우리의 인식 밖에서 들어온 우연과는 달리 어떠한 흐름 안에서 미리 예지될 수 있는 성격이라는 점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연을 운명으로 가공하는 작업은 그 흐름에 있어서 무엇보다 ‘대비’로의 측면이 강조된다. 물론 무엇이 정도인지에 관해서는 저마다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허나 정도란 게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가 된다는 식의 문구로 읽힌다는 점만큼은 확고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간에 이미 발견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이러한 운명과의 만남은 어떠한 ‘사건’ 이후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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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해서 운명이란 사건 이후라는 점에서, 또한 우연이 진행되어 운명이 된다는 점에서 우연이 사건을 만나 운명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그 자신이 운명이 되기 위해 무빙 이미지라는 개념으로 자신을 탈바꿈시켰다, 는 게 우리의 결론이다. 정확히 말해 이 탈바꿈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행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으며 그저 발견한 것을 길들여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화란 결국 무언가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올라탄 우연을 조련해 그것을 하나의 운명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에 가깝다. 여기서 조련이 바로 사건에 해당한다. 영화에서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일은 현실에서 발견한 우연을 예지의 성격으로 돌리고자 하는 ‘운명’으로 변환하고자 기획되는 것이다. 하마구치의 <우연과 상상>을 여타 다른 일상 장르와 구분하는 것에는 이런 전제가 필요하다. 단순히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곧 사건이고, 이를 토대로 ‘일상’이 분화되어 나온다고만 말하기에는 그 적용의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우연성, 특히나 일상에서 우연이 발휘되는 건 ‘영화 이전’에서 이미 사건이 발휘되어 온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케 하지만 하마구치는 오히려 ‘영화 이후’에서 사건이 발휘되어 온다는 점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는 하마구치의 영화가 늘 파국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하마구치의 영화는 이미 현실에서는 한참 이전이 되어버린 파국이 영화 안에서는 도래할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아사코>의 대지진이 남기는 대전조라던가, <드라이브 마이카>의 마지막에 구태여 코로나19라는 현재 시점의 상황을 지정하는 것이라던가 하는 점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난다. 하지만 좀 전에 오배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지적했듯이 ‘바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상상할 수 있음에 대한 한 가지 제언이라면, ‘파국’이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안쪽에 있기에 예측가능하고 대비가능한 성격이 된다. 즉 파국이라는 말을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서 출발시키는 것은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자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이렇게 보면 하마구치의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힐링캠프다. 


<우연과 상상>에서는 특히 이 부분이 3파트에서 잘 드러났다고 생각되지만, 그전의 1파트와 2파트라고 해서 이런 부분이 약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1파트에서 사용되는 자동차 내부의 대화 장면이 운송수단이라고 가정할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우연이 일종의 오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썸남이 친구의 전 애인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즉 이 대화는 오배의 일종이고 예측이 불가했다는 점에서 거진 우연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을 때, 친구를 떠나보낸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자동차의 기수를 돌려 불현듯 전 애인의 직장에 찾아간다. 이를 통해 우연은 상상의 영역인 ‘운송수단’에서 ‘길들임’의 영역인 운명 안으로 들어온다. 이 행동으로 메이코는 세상이 자신을 ‘억까’하고 있는 듯한 감정에서 벗어나 자신이 마주한 것을 사건으로 변주한다. 자신이 마주한 것을 사건으로 지정할 때 메이코는 자신이 이미 만나버린 전 애인과의 행동을 운명의 일부로 만들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역행의 과정이 가상의 리버스 숏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파트에서는 주로 교수의 시점에서 낭독자인 그녀를 바라보는 바깥 방향의 쇼트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2파트가 시작할 때 문 안에서 바깥 복도를 엿보는 것으로 시작하던 쇼트와 연결된다. 그러니까 문제는 역시 “무엇을 바깥으로 규정할 것인지는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지 ‘문’을 논할 일은 아니다. <드라이브>의 초반에 집 안에 들어가려던 남자가 아내의 외도를 두고 다시 돌아 나오듯 ‘문’이란 열림과 닫힘이라는 위상학적 계기만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2파트에서 운송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 시작과 끝이라는 계기를 통해 영화(Room) 안쪽의 이야기를 우연으로 지정하는 것은 문이다. 그리고 이 안의 우연이 운명으로 길드는 건 이들 사이의 대화가 이메일이라는 바깥을 거쳐 다른 이에게 오배되었을 때다. 그래서인지 2파트를 다 보고 나면 가장 초반의 이야기는 되려 교수가 해고된 후, 여자가 문을 닫고 나온 후에 말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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