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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4. 2022

정당화하는 관점: 윤아랑에 대한 불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평론가를 꼽으라면 윤아랑과 김병규, 두 명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이 영화매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신진 비평가라는 점에서, 이러한 선택은 보편적인 걸지도 모른다. 또한 둘 다 어떤 형태로든 허문영과 관련 있다는 점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이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먼저 김병규는 디디 위베르만의 『색채 속을 걷는 사람』을 닮았다. 그는 이미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그 점에서 고평가되어야 할 사람이다(나는 김병규가 이나라 연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미지’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택한 것에는 나름의 미안함이 있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그러한 추상에 대한 파악능력이야말로 우리 시대를 돌파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건 윤아랑이다. 김병규와는 반대로 윤아랑은 평가되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왜냐하면 그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국가도 친구도 적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동물, 한편으로는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에’식의 동물. 여기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 순간 ‘동물’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사라지고야 만다. 동물은 정의될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흥미로운 정의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두 비평가에 관한 서술을 도울 수 있을까. 두 사람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 그저 동물일 뿐인 사람이기에 오히려 윤아랑은 단독 서술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든 긍정적으로 들리든 간에 나는 그를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윤아랑이 트위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번 생각한다. 비단 윤아랑만이 아니라 트위터라는 공간이 갖는 강력한 동시대성에 관해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 트위터는 동시대의 확장된 영역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신을 확장하는 것에 몰두하는 가상의 괴물과도 같다. 트위터 공간은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을 매칭해준다는 점에서, 또한 선택적으로 데이터 좌표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종국에는 가상화된 영역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트위터는 그 자체로 통속의 뇌라 할만한 것이며, 이 안에서 사용자들은 전기충격에 의존하는 매트릭스 상태와도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밈이라는 유전자 기계를 언급해보고 싶다. 인간 존재가 그저 유전자를 운반할 뿐인 생체 기계에 불과하다면, 트위터 유저란 문화를 운반할 뿐인 생체 기계 중 하나에 불과한 게 아닐까. 도킨스의 밈 개념은 무엇보다 가상의 인격도 자신의 유전자를 전파할 요령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가상의 인격’처럼 보이는 트위터 공간에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트위터 유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자연의 의지에 휩쓸리는 것일 테다.


하지만 윤아랑은 바로 그점에서 오히려 트위터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윤아랑이 자신의 작업을 두고서 “동시대 문화의 동시대성”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은 처음에 ‘동시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만, 동시대 문화를 파악하는 게 곧 동시대성이 된다면 이런 분석에는 구심점 같은 건 없어진다. 내가 윤아랑을 두고서 동물 같다고 표현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윤아랑은 문자 그대로 야생동물 같은 인상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사람이다. 가령 윤아랑이 등단한 린치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어떤 균열로 인해 양자를 관통하는 짙은 얼룩을 남기며, 린치의 카메라와 붐 마이크 그리고 편집 기계는 끈질기게 그것을 쫓는다. 그런데 얼룩을 쫓으면 쫓을수록 두 세계 중 무엇이 우리가 건너온 ‘그’ 세계였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 세계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세계다운 것이었는지 모두 의문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얼룩이라는 말을 백내장에서의 얼룩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몸’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레 해보게 된다. 아무리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는 것은 안경에 난 흠집과도 같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얼룩은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게 사고의 일환이 아니라 눈이라는 기관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인간의 눈이 구조적 결함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뇌를 통해 이미지 보정을 시행한다는 점을 알고 나면, 우리가 이미지를 보고 판단하는 일은 결국 그 몸의 설계부터 무언가를 보정하고 왜곡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를 판단하고 설계하는 일은 얼룩으로 점철된 게 아닐까? 윤아랑은 이런 얼룩을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혹은 얼룩이 있는 그대로의 시야를 인정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몸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그와 동시에 그는 친구와 적 모두를 자신의 이런 몸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른바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 그도 잘 지적했듯이 지젝의 헤갤 해석이기도 한 이 문구는 당선 소감으로 사용한 “산산 조각난 세계 더 파고들고 부정해야”라는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언가를 긍정하는 일은 부정한 것이 없다면 결코 불가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이 어떤 의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인간찬가’라거나 ‘자유의지’라고 우리가 이름 붙인 이것은 우리가 유전자 운반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서술할 때 비로소 대립항으로 튀어나오는 셈이다. 또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 라는 문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 존재가 결국에는 거대한 자연-동시대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행동은 시작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윤아랑을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결단코 멸칭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윤아랑이 주목하는 포인트의 대부분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격렬히 반대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모순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그의 지향점에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윤아랑이 「필연적인 관계의 지도 - <인문학적 감수성>에서 시작하는 사고실험」에서 서술한 문장을 살펴보자. “캐릭터란 매 칸마다 제시되는 만화적 단면의 합에서 주관적으로 추론된 동시에 각각의 만화적 단면이 하나의 서사에 합류하도록 하는 데 유용한, 특권적인 이중 작용의 ’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만화적 단면은 항시 같은 자리에 정지해 있음에도 서사 속에서 소모되면서 서사로 인해 소모되지 않는, 항구적인 반향의 과정에 놓여있다.” 위에서 내가 가상의 인격이 밈을 운반하는 것에 사용된다고 지적했던 대목을 떠올려본다면, 만화에서 캐릭터의 역할은 결국 어떠한 만화적 세계 안에서 그 의지를 실현한다기보다는 그 의지에 의해 설계된 구성물에 가깝다는 점을 알 수 있을 테다. 비단 만화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논의를 따라가 보자.


윤아랑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은 “복수의 극적 세계가 같은 차원 속에 존재한다”는 지적인데, 이러한 공존의 모습 자체가 모순들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는 점은 그가 "칸과 칸 사이의 배치가 유기적이고 구상적인 대신 거의 추상적일 정도로 느슨해지고 아예 성격이 바뀌어도 만화가 성립될 수 있다”라고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윤아랑에게서 반복되는 주제인 ‘동시대 문화의 동시대성’이 왜 트위터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쉽게 설명해준다. 트위터 타래는 손쓸 수 없이 잘 멀어지면서도 이상한 대목에서 다시금 재발굴되기도 하는 이상한 연결구조를 갖는다. 이때의 연결은 아예 본래의 맥락과는 별 상관없는 인용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들이 한데 어울리는 배치 구조이며, 결국에는 “아예 성격이 바뀌어도 만화가 성립될 수 있다.”는 대목을 다시금 복기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윤아랑에게서 결여된 것은 만화 매체의 평면성을 동시대라는 단어에 담긴 평면성으로 전도해버린다는 점에 대한 의식의 부재, 혹은 그에 대한 악용의 윤리의식이다. 제목에서 사고실험이라고 써놨지만 친구(긍정)을 말하기 위해 적(부정)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적을 양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태도가 비평가로서 담지해야 할 호승심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팬 개인으로서는 저러다 돌 맞을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윤아랑이 마테리알에서 발표한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에서 “임흥순은 ‘묶기’에만 집중하지 ‘상이한 것들’에는 집중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한 대목을 살펴보자. 윤아랑의 이 발언은 위에서 우리가 해왔던 생각들의 연장선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주체가 포기되고 소거된 것마냥 구는 (…) 불화, 파편성, 가시화, 이런 것들과 엮이지 않은 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주체란 없다”고 말하는 윤아랑의 태도는 다시금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라는 주제의식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주장하고 싶은 건 윤아랑이 긍정을 위해 부정을 소환하는 대목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그의 태도, 결국에는 ‘친구’도 ‘적도’ ‘국가’도 없다는 식의 생각이 자유의지 이전의 주체에 대한 호명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에겐 개인의 취향이 있다. 또한 이 취향은 개인이 살아오면서 처한 상황과 배경에 따라 발달하는 어떠한 삶의 문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자유의지가 허상이라면? 취향이라는 말은 어떠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선택된 어떠한 것을 설명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얼룩진 세상에서 우리의 눈은 어떠한 것을 선택하고, 보정하고, 감각하려 하는 것일까. 윤아랑은 임흥순이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윤아랑의 이 불만은 차이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 말하자면 자연의 어떠한 거대 의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윤아랑의 이 불만이 윤아랑의 동물성을 더 강화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자유의지vs결정론이라는 구도를 세워보자. 자유의지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갈 수 있다는 이론이고 결정론은 그 반대편인 과학의 위에서 모든 것은 이미 유전자에 의해 의도된 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윤아랑이 자유의지에 반대하는 쪽, 그러니까 결정론의 진영에 선다고 가정한다. 이는 윤아랑이 결정론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들 사이에서 이러한 결정을 어떻게 바꿔갈 수 있을지를 투쟁한다는 점에서 동물임을 가리킨다. ‘결정’이란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것을 끊어내어 형체를 굳힘’이라는 문맥을 갖는데, 윤아랑이 지적하듯이 ‘동시대’라는 말이 정작 그 문맥과는 달리 순간에 집착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정’이라는 말은 그러한 동시대 안에서 아직 되돌릴 수 없는 어떠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윤아랑이 소소하게 언급하는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문구가 들뢰즈나 버틀러의 단편적인 몇몇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도 이러한 추론을 강화한다. 가령 버틀러는 「보편자를 무대에 올리며」라는 글에서 ‘특수자’를 보편자로 이해하는 일을 시도하는데, 이 생각은 윤아랑이 차이 자체가 특수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은 차이를 품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을 구태여 숨기는 일 없이 분열 혹은 파열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세계는 동물들의 자연이며 이곳은 생태계이지 과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아랑의 사고는 부분적으로 언더독의 입장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윤아랑이 신진 비평가에서 기성 비평가로 올라가는 순간 이 입장이 어떻게 변할지도 관건이다. 이미 결정된 것들을 토대로 더 큰 결정을 바꾸어 나가자고 말하는 일은 확실히 알차지만, 이런 일은 대개 거대담론과 결탁하면서 소수의 차이를 으깨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말이 이런 일을 가리킨다. 가령 “Give War a Chance”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어떤 이들은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전쟁의 순기능은 하나의 큰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몇몇 분쟁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반대로 몇몇 분쟁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이 오직 전쟁뿐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와 마찬가지로, 차이를 해결할 바에는 차라리 그러한 차이들을 더 큰 차이로 뭉개버리자고 말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윤아랑의 작업은 그런 방향으로 전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동시대 문화의 동시대성”이라는 주제가 동물이라는 인간상과 결합할 때 세계의 얼룩이 아예 화폭을 다 하얀색으로 칠해버리는 일로 대체될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 그러한 금지된 윤리에 대한 매혹이 줄곧 도사릴 때, 선을 두고 줄타기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될 때 윤아랑의 작업이 더욱 매력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내가 윤아랑의 행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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