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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6. 2022

제도는 어떻게 억까를 양산하는가


윤아랑이 크리틱칼에 쓴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에서 인용한 문장 하나를 살펴보자. “서브컬처를 제물로 제도에 입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혐오감을 느낀다. 서브컬처를 가져옴으로써 제도 내의 비평체계가 얼마나 빈수한지 드러내는 시도에 적극 지지한다.” 이 말은 현 마테리알 편집인 중 한 명인 금동현이 한 것인데, 맥락을 살펴보면 이때의 서브컬처란 자연스레 ‘비주류’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주류라는 말은 ‘바깥’이라는 기준 아래 놓인 것이다. 주류(인사이더)가 있으면 비주류(아웃사이더)가 있다는 점, 달리 말하자면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의 몇몇 위성도시가 생겨난다는 점. 그래서 이때의 서브는 외곽이라는 말보다는 주도심을 보조하는 부도심으로의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바꾸어 말하자면 주류가 비주류를 만들어낸 것임에도 이 둘은 경직된 관계로 사유되고 있다. 우리가 ‘제도’라 부르는 것의 정체란 바로 이러한 경직된 관계를 뜻한다. 변하지 않는 게 있고, 진리라는 건 인류 사유의 결정체이므로 구태여 건들거나 따로 도전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


주도심이란 진리인가? 확실히, 현대 이전의 몇몇 도시는 문화의 메카가 되곤 했다. 여러 지식인들이 활동했던 파리나 베를린 같은 도시를 떠올려보면 제도가 ‘특별시’로 이해되는 일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에 문제 되는 건 기존의 인프라가 집중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수도권 집중화가 심해지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제도’라는 건 어느 정도 경로의존성이 있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제도를 설명하기엔 서브컬처라는 말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쳐버린다. 직역하면 (부)문화가 되어버리는 이런 단어에서는 늘 따라가야하고 모방해야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지향성만이 남는다. 마치 원본을 대체하려는 가품처럼, 아쉬운 건 너희들이고 심지어는 가짜에 불과한 저급함이라는 조롱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도심은 주도심의 과밀을 해결할 요령으로 생겨난 것이지 주도심에 진입하지 못한 패배자들이 머무는 곳은 아니다. 서브는 주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일 수도 있다. 또한 그때마다 넘나들어야 하는 경계는 들뢰즈식의 탈주선이 아니라 그냥 말이나 배경 등으로만 구획되는 가상의 선분에만 불과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꽤나 고리타분하니 만화 <총몽>의 설정 하나를 인용해보고 싶다. <총몽>의 무대는 자렘이라는 공중도시와 그곳에 물자를 공급하는 하층민의 도시로 나뉜다. 자렘의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인 삶을 영위한다면 하층민들의 도시에는 개성이 강한 여러 사람들이 있다. 이런 구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자렘’에 소속됨으로써 고유의 개성을 잃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 선별되는 건지를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등단제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제도를 자렘에 빗댈 수 있다면 우리는 “서브컬처를 제물로 제도에 입장하려는 사람”에 혐오감을 느낄 이유가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된다: 제도란 분명 있다. 제도란 저 위의 공중에 떠 있는 도시고, 서브컬처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이 대목에서는 자렘이 정말로 살기 좋은 도시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고, 그저 서브컬처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음과 동시에 그런 것들이 상승해가는 지대라는 점이 중시된다. 하지만 자렘의 사람들에겐 정작 자신의 인격이 자렘 그 자체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있다. 생체두뇌가 아니라 두뇌칩으로 대체되어버린 인격, 생체주류를 대체해버린 기계보조장치, 휴머니즘을 넘어선 포스트휴머니즘. 여기서 자렘은 오히려 ‘서브’라는 백업장치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제도에 관한 내 생각은 오히려 서브컬처가 제도를 백업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서브컬처는 주류에서 분화해 온 아종이라는 점에서 주류를 계승하고, 그 기원을 기억하는 게 아닐까. 오늘날의 우리가 닭을 보며 공룡을 연구하듯이, 이런 맥락으로 제도를 바라보면 오히려 제도로 돌아가는 일이 ‘퇴화’라는 점을 알게 된다. 엄밀히 말해 퇴화라기보단 퇴행적 진화라고 보아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주장의 논지가 변하지는 않는다. 나는 금동현의 주장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우리가 제도를 서브컬처의 파생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동의한다는 말과 꼭 같아야만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제도 바깥의 순수한 위치 점유”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순수’라는 말의 위상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령 푸코는 “인간에게 기원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미 시작된 것을 배경으로 해서”라고 지적한다.” 내게 이 말은 “기원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서브컬처는 이미 시작된 제도를 배경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소리로 들린다.


서브컬처가 제도의 후면에 놓이는 건 아니다. 절대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우리가 제도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는 그것을 타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서브’에 의존하는 시한부 인생으로의 ‘제도’로 여기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서브컬처를 가져옴으로써 제도 내의 비평체계가 얼마나 빈수한지 드러내는 시도”는 제도에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다시금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혹은 제도와 결탁해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브’라는 이야기가 ‘제도’라는 기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제도에 연민을 던지고, 손을 내밀고, 화해의 포용을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도 바깥의 순수한 위치 점유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윤아랑의 태도는 그러한 맥락에서의 부정성을 내포한다. 삶을 말하려면 죽음과 함께 해야 하듯, 서브를 논하려면 제도와 함께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도는 타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제도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깥’이 없다는 말은 말 그대로의 포스트를 뜻한다. 바꾸어 말해 ‘제도 바깥’이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게 끝나버린 내부를 상정하는 것이지 진입해야 할 과거 혹은 미래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제도를 말하는 몇몇 담론들은 우리가 오늘날 ‘억까’라고 말하는 것의 실체와 어느 정도 연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유행하는 억까라는 말은 ‘억지로 깐다’라는 뜻으로, 굳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적용되지 않고서 더 포괄적인 면으로 사용되는 중이다. 가령 “세상이 날 억까해”라는 표현이 가능한데, 이는 대개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줄곧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실패하는 경우를 가리키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억까’를 당한다는 표현은 ‘나’에게 적용될 때 필연적으로 그것을 필터링하는 규칙을 수반한다. 가령 게임이라면 확률적 뽑기 시스템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헌데 그렇다면 이러한 ‘시스템’이 위에서 논했던 제도에 등치될 수 있지 않을까? 제도를 구성하는 인과와 논리와 법칙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억까로 느낀다. 확률론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제도를 확률론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윤아랑이 자신을 소개하듯 제도에 속한 이에게서 제도가 확률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오면 기만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다. 문제는 ‘제도’라는 것은 오직 바깥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작 내부는 공허하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는 순수한 의미에서 억까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제도는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순수과거에 해당한다. 베르그송과 들뢰즈에 따르면 순수과거는 “한 번도 현재인 적 없었던 시간”으로, 나 또한 제도라는 것은 한 번도 우리에게 현재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제도는 우리가 아는 역사의 거의 모든 시간에서 극복의 대상처럼 여겨져 왔다. 단지 세대로만 구분할 게 아니라 제도 이전에는 무언가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제도 자체가 하나의 기점으로 여겨졌다. 즉 여기서 제도란 우리들 현재 기준에서 ‘바깥’이었고 이때의 우리는 바깥에서 밀려난 것으로 포지셔닝되었다.


여기서 내 생각은 ‘서브’로서의 우리에게 제도는 현존하는 자신에 구심점을 부여할 요령으로 작성된 기원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컨대 제도라는 건 우리를 억까해왔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억까해왔던 대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신도 노예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제도에 억까당할 이유도 제도를 억까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찾아 하기만 하면 된다. 최근에 내가 씨네스트와 같은 해적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도, 또한 대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동물의 가치를 줄곧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무언가에 반대하는 일이 제도가 아니라 제도를 포함한 모든 것에 관한 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일은 제도의 바깥에 소속되는 게 아니라 친구도 적도 국가도 모두 자신의 바깥으로 돌려버린다는 점에서의 ‘자유’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에 반대할 권리란 무언가에 반대될 권리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결국 자신을 특정짓는 일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다면, 무언가에 반대하지 않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특정되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없다.


그러니까 내 의견은, 자유의지는 허구이며 자아라는 건 두뇌 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제도에 소속되려 하는 게 어떠한 의지라 볼 수 있다면 이때의 제도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허구다. 제도에 맞서기 위해 제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제도가 있으니까 그냥 제도를 깐다고 말하는 뉘앙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제도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구심점 없는 비평 문화에 관해 만들어진 신화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주변부에 머물면서 필연적으로 그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심을 해결하는 것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무언가를 말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영역’을 제도라는 말로 단정해버린다면, 오히려 이 말은 ‘영역’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제도’라는 단어를 통해 굳혀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는 “무언가를 말할 요령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일은 정당한지”를 물어 마땅하다.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줄곧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지정하고, 싸워야만 한다면 오히려 그 물음의 방향은 나 자신에게로 향해야 효율적이 된다. 예컨대 싸움의 이유는 “당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도망쳐서는 안 되니까”가 되어야 한다.


*


동시대인이란 무엇일까? 아니, 지식인이란 무엇일까? 예전에는 영화 한편을 보고 짧은 리뷰를 적는 때가 있었는데, 책을 읽고 생각을 글로 정리하면서부터는 주변에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는다. 딱 이 나이대에 들을 수 있는 소리인 것 같아서 별다른 생각을 하진 않았다. 다만 나 스스로는 변한 게 없는데 주변에서는 자꾸 거리를 두는 게 느껴진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에 갖는 감정과 비슷할 듯하다. 가령 나는 트위터 등지에서 자기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지식인이자, 동시대인이라고 생각한다. 트위터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실소를 터트릴지도 모르겠지만, 트위터가 동시대 흐름을 파악하기엔 최적의 장소라는 점은 확실하다(내가 본 대부분의 급진파들은 다 트위터를 했다). 한편으로 나는 지식인이란 동시대의 몇몇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어떤 (사상적) 단체에 소속되거나 그에 따른 교섭을 수행하는 이들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길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따금 나는 동시대인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극장 밖을 서성이는 관객인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만약 내가 비평가가 되고 싶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언가에 소속되는 일을 거부하거나, 혹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특정 소속 아래 숨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나 혼자만 레벨 업'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것에 소속되지 않은 자기만의 생각이라면, 결국에는 광인의 경우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해서. 이 생각이 그저 흘러갈 뿐인 잡념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항상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지식인에 대해, 동시대인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면 중심에는 항상 온갖 통계 뒤로 숨는 자신만이 있다. 20대라던가 한국인이라던가 하는 보편적 사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모호함을 떨쳐내려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지식인도 동시대인도 아니고, 그저 웹 서핑을 다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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