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Aug 01. 2022

잔존과 소멸에 관한 노트


1. 투사 원근법의 시대를 선형적 시간과 인간적 시각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수직 원근법의 시대란 비선형적이고 기계적인 시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계라는 표현을 완전히 중립적으로  사용한 건 아니다. 기계적 시각이라는 말이 중립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항상 무언가를 드러냈다. 카메라의 평면적 시각은 모든 화면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서 역설적으로 그 무엇도 아닌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기계적 시각이란 자유의지를 뜻했고, 인간의 시선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시선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자유의지란 독립된 요소들이 다시금 독립된 요소를 구축해가는 과정, 혹은 주체가 관계를 맺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정해진 미래에 대항하는 게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포기한 노예이기만 할 뿐이었던 셈이다.


가령 그림은 밑에서 아래, 혹은 그 반대로 바라볼 때 단순한 하나의 평면으로만 보인다. 라깡은 세상을 바로 그렇게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의식에 비집고 들어갈 틈새를 제공해주었다. 이 경우 틈새는 세계이지만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 지옥이나 천국처럼 그림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식되는 실재를 뜻하는 게 된다. 이 실재는 죽어서나 갈 수 있는 곳이었고, 바꾸어 말해 실재는 우리들의 현실을 ‘봉합’했다. 사람들은 지옥/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오히려 현세에서의 불합리를 잊을 수 있었다.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노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수직 원근법의 시대는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봉합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현실이 동시에 부상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절대 모든 현실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은가?

 

벤야민이 사진을 두고서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열어준다”고 말했던 대목을 떠올려보자. 사진적 이미지의 평면은 여기에 담긴 게 하나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여러 다른 상황과 사건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사진 이미지는 순간을 시간의 흐름 안에서 빼내오는 게 아닌, 여러 다른 것을 한 자리에 구축하는 방식으로 실재를 드러낸다. 이 대목에서 잔존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잔존’은 소멸해가는 도중에 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이 드러나며 구축된 것을 뜻한다. 전진하기에 소멸하는 게 아닌, 소멸함으로써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에 포커스를 맞추려면 다른 나머지를 관찰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사실. 따라서 이때의 소멸은 정말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것과의 연결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일이다. 잠시 멀어지기만 할 뿐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현실을 잊을 수 없고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잔존이라는 말이 왜 패주와 같은 부정사가 아닌 긍정사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한다. 만약 잔존을 전자로 이해한다면 미래는 어둡고 암울할 테다. 허나 후자로 이해하면 잔존은 세계에 녹아들어 가는 우리를 수면으로 끌어내어, 우리의 자아에 신체라는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세계와의 분리된 감각을 유지하게 해준다. 결국 잔존은 감각들을 조합해 주체가 입주할 수 있는 형상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주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상적 신체, 신체는 감각의 집결지라는 점에서 여러 감각기관이 구성된 하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는데, 자유의지를 두고서 영혼의 DNA라고 지칭했던 대목을 떠올리면 신체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선택하고 그것을 수행하고 감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한 구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모든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들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의 이미지로 끝나지는 않는다. 가령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볼 때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서지만, 영화 한 편이 다 끝났을 때 각자가 떠올리며 구상하는 결말은 다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을 별개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별개로 분석된 여러 요인을 영화로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란 기본적으로 분해라기보다는 구축에 가까운 원리를 토대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몽타주라 말하는 결과물이 도상, 형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디 위베르만에 따르면 도상학이란 잔존을 긍정하고 이를 수면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이 잔존은 “없던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해석학”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드러내는 ‘긍정’의 힘으로 작동한다.


이 긍정이라는 말은 위베르만에게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짧게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위베르만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 아우슈비츠와 같은 역사적 이미지가 완전한 허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도 지적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가 완전히 ‘볼 수 없는’ 이미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영화가 마땅한 본질이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가 구축의 결과물이라면, 다시 말해 여러 관계의 산물이라면 이렇게 사변을 통해서만 고찰되는 영화란 주어진 것도 정해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의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결국 영화란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것이 소멸을 암시하진 않는다.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관계 안에서는 무언가를 소멸시킬 수도, 자기 자신이 소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소멸로 이해하는 일은 대개 영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하는 경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영화를 소멸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주변환경에 의해 반박된다. 사물이 썩는 것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현대 사회에서는 시간조차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물은 우리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건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죽음이 아닐까? 사람들은 “끝장나버렸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하지만,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주체의 소멸이다. 이른바 “주인은 없다”는 담론이 긍정사로든 부정사로든 팽배한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고 오직 노예가 될 뿐인 가능성만이 존재하니 말이다. 단순한 이치지만 이는 무언가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라는 맥락을 다시금 강조한다. 이를테면.


밈, 영혼의 DNA. 리처드 도킨스의 밈(Meme)은 개인의 의지가 어떻게 사후에도 계승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개념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밈은 생물은 아니지만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를 갖고서, 이를 토대로 자신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리한 방향’을 찾아간다. 가령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1부에서 6부에 걸쳐 강조되는 죠죠 가문의 ‘황금의 의지’를 떠올려보자. 6부의 마지막 결말은 죠죠 가문이 몰살되는 것이지만, 이들 사후에도 황금의 의지는 (죠죠 가문에 속하지 않는) 엠포리오에게 전승됨으로써 푸치 신부를 물리치게 된다. 이 밈은 ‘생물학적 계보’에는 관계없이 전승되며, 자기만의 방향을 갖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밈이란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주인’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3. 잔존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주인 따윈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점과 주인은 소멸할 수 없는 존재라는 두 가지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 주인은 소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소멸/죽음/종말과 같은 마지막 자리가 아니며, 모든 축으로 뻗어 갈 수 있는 자유의지의 평면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시간이 선형적인 게 아니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결론이 미리 예견되기도 했다. 20세기 과학의 최대 성과로 불리는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가 배운 건 빛의 속도가 곧 세계의 속도라는 점과 빛의 속도보다 세계가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고, 이 말은 곧 우리 자신보다 더 오래 사는 것들을 걱정하기보다 그저 우리 자신의 자리에 충실한 게 더 옳다는 뜻이었다.


심우주를 관측하는 일이 천체의 시간이 아닌 관측자인 우리의 시간을 따르듯, 이미지의 평면은 과거나 미래라는 하나의 축을 공유하기보다는 사방으로 뻗어 나갈 평면을 공유한다. 회화의 시대에 원근법은 유일한 인간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증표로 여겨졌지만, 카메라가 발명되고 나면 원근법은 포커스와 같은 촬영기술의 하나로 전락하고야 만다. 달리 말해서 오늘날의 수직 원근법은 인간이 보는 것 이상을 본다는 점에서 인간이 무엇이든 볼 수 있도록 화면 속에 사물을 구성하는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상문화는 무언가를 보도록 강조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보는 능력보다 더 많은 이미지가 쏟아져나오는 현실에 처해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소멸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며,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보아야 한다는 강박은 ‘하고 싶다면 해야 한다’는 개인의 선택권을 박탈한다. 무언가를 잊어야만 비로소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강박, 이는 20세기가 낳은 선형성의 강박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자유의지란 소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를 동반하니 말이다. 고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게 온전히 자신의 자유에 따른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자유의지가 밈이라면, 그 DNA는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유는 부자유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잔존도 소멸의 산물이다. 자유가 구제의 감정인지 아니면 기회의 추구인지를 구분하기 힘들듯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소멸 속에 잔존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거나, 잔존 속에서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나머지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잔존은 신체, 특히나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의 신체가 아닌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맥락에서의 신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가령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잉여분의 신체,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서 감각의 분배,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에서 도출되는 기계적 신체를 떠올려보자. 첫 번째로 쓰레기, 많은 이미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듯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이 정크 타임을 두고서 “결말이 시작을 앞서는 것”으로 설명했던 대목을 떠올려보자.[1] ‘쓰레기’란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간다는 것은 자칫하면 추락의 불길한 암시로 이해되기 쉽지만. 오히려 이는 자유낙하라는 맥락에서의 무중력 상태, 무언가가 될 수 없지만 무언가가 될 이유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멸이 곧 잔존인 셈이다.


4.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쓰레기장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물건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정해진 수명보다 더 오래 잔존한다는 점에서 소멸을 거스르는 ‘장소’에 가깝다. 폐플라스틱과 비닐 등의 잔존 수명은 우리 손에 있을 때 길어야 하루지만 쓰레기장에서는 백여 년 남짓을 썩는다. 특히나 핵연료 쓰레기는 남은 잔존물이 현생 인류 문명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말하자면 쓰레기란 쓰레기로 남았을 때가 비로소 존재의 시작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폐허가 박물관과 같은 단어로 부연설명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 벤야민에 따르면 수장품의 의미는 발견된 순간[즉각]부터 새로 시작된다. 여기서 소멸의 효과는 순간의 후가 아닌 전에 적용된다. 수장품이 과거에 어떤 지위에 있었든 간에 그것은 소멸하며, 이제 수장품은 발견될 수 있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즉각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감각의 형성과 흐름이 발견이라는 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따르자면 잔존이란 소멸 속에서 구성된 감각들이 별개의 기능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하면서, 이를 다시금 소멸이라는 평면 안에서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일이다. 즉 전체가 그 자체로 유기적인 감각을 갖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들이 포괄적으로 모여 구성된 형상이 바로 신체다. 달리 말하자면 이때의 감각은 그 본연의 가치가 재발견된 게 아니라 봉합의 과정이 정반대로 탈바꿈한 것에 더 가깝다. 잔존은 현실에 녹아든 것들의 봉합사를 풀어 이를 앙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정신분석학의 시대에 감각은 외면해야 하고 발견해서는 안 될 실재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감각이라는 말은 발견과 동시에 하나의 기계가 되고 종국에는 신체를 형성한다.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잉여가 곧 소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잉여가 잔여분이라서 쓰레기라면, 현실에 녹아들지 못한 이들이 바로 여분이라면. 빠르게 생산되어 소비되고 남발되거나 심지어는 거의 새것에 가깝기도 한 이미지들은 소멸이라기보다 잔존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은 필름 시대의 영화가 잔상을 토대로 자신을 구축해나갔다는 점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영화는 소멸이 아니라 잔존을 토대로 그 자신의 결말을 향해갔다. 마찬가지로 주인이 모든 종류의 고통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종류의 소멸에 맞서 싸우면서 순간을 긍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소멸의 반대편에서 영원이라는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진 않다. 순간은 별개의 감각으로 저장되어 특정한 무언가를 불러내는 기계이기도 하지만, 결국 순간 사이의 고리는 느슨해지게 되어있다.


[영원]이라는 말은 대개 기억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기록매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순간은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동시에 포착할 수 없다는 게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기계적 시각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평면, 몽타주가 단지 하나의 순간으로만 읽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구성하는 여러 순간들이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쉽게 말해 평면은 별개로 기능하는 독립된 기계들의 구성물이다. 이러한 분열을 겉으로 드러내야만 비로소 우리는 세계와 합일한 우리의 신체에 테두리를 부여할 수 있다. 순간 사이의 고리가 느슨해지는 일이 과거에는 ‘틈새’, 혹은 실재로 불리며 정신병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오히려 세계를 봉합해야만 비로소 우리 자신은 하나의 신체로 남을 수 있다.


[1]디디 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역, (서울: 새물결, 2022) p.421.

[2]히토 슈타이얼, 「완전한 현존재의 공포」, 『면세미술』, 문혜진. 김홍기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1) p.31.



매거진의 이전글 제도는 어떻게 억까를 양산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