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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9. 2022

네트워크 안의 해적: 이곳에서, 숭고를 실현하다

콜리그에 투고한 열 네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696607




마테리알에 실린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에서 정경담은 웹하드 키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테리알에서 초대한 해적민수에게 편집인은 ‘네트워크를 항해하는 해적’이라는 이명을 붙였다. 그리고 이 발표에서 해적민수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해적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해적이라는 말은 위의 주제들에서 오용되거나 오인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전에서 해적은 공해 상에서 다른 배를 약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존재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마테리알 측에서 해적민수에게 그런 이명을 붙인 것에는 네트워크가 공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 항해는 디지털의 네트를 뜻하는 것일 수도, 혹은 일본 만화 <원피스>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어쩌면 둘 다이겠지만, 여기서 해적이라는 말이 사용되기엔 해적 자체에 내포된 부정적인 느낌이 너무 크다. ‘배’에 대한 법적인 취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배’는 해당 선박의 국적에 따라 별도의 영토로 취급되는데, 해적이라는 말이 위협적인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의 주권 침해를 뜻해서다. 말하자면 해적이란 떠다니는 영토에 관한 한 가지 위협이었고, 이 점에서 해적은 근대 사회에 들어와 다른 맥락으로도 변형된다. 그건 바로 대열차 강도다. 근대에 열차란 단순한 운송수단에만 불과하지 않고서 식사나 숙박이 제공되기도 하는 등의 영토이기도 했다는 점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침략 행위는 ‘하이재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결국 해적이라는 말은 하이재킹을 수행하는 집단으로서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고 본다. 



물론 열차 강도로서의 하이재킹은 민간에서 제기된 한 가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이재킹이 움직이는 영토에 관한 탈취 행위라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배, 자동차, 열차, 비행기 모두 운송수단에 해당하고 이런 운송수단을 납치한다는 건 운전자와 그 안의 승객 모두를 인질로 삼는 행위다. 바로 그렇기에 영화라는 무빙 이미지는 하이재킹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테리알이 이를 의도했는지까진 알 수 없지만, 네트워크라는 장소성을 제외하더라도 해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건 바로 그러한 하이재킹이다. 무빙 이미지가 이미지의 운송수단이라면, 그 운송수단이 네트워크 안에서 하나의 고유영역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침범은 하나의 ‘대결(Duel)’이 된다. 그리고 다시금 열차 강도의 시대로 돌아와서, 이 대결은 법보다 자유가 우선하고 개인보다 권리가 우선하는 의식이 된다. 



이러한 의견은 마테리알 측에서 언급하는 해적이라는 말이 모종의 아나키즘으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도 합당해 보인다. 만약 해적질이라는 행위가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의존한다면 네트워크는 그저 단순한 지명일 뿐 공동체 의식은 아니다. 분명 네트워크가 상호 간에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긴 해도 이들 해적은 결코 한자리에 모일 수 없다는 점에서 공동체가 될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해 피어교환이라는 형태로 운영되는 파일 공유란, 그들 각각이 서로 넓게 ‘산포’해 있을 때만 가능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거리두기, 그렇다면 여기서 해볼 수 있는 생각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어떻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갈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다. 해적들은 왜 ‘그’ 영화를 보고 싶어할까? 아니, 어쩌면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영화가 특정한 제도와 방식에 독점되는 일을 경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무정부주의,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표본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라는 말은 모든 형태의 권력과 제도에 반하는 것이므로 이를 해적의 뜻으로 삼을 수는 없겠고, 그보다는 반대 방향에 있는 의지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한다. 가령 유운성이 말하는 역량주의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왼쪽 글은 “밀수꾼의 노래 - 「영화 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이후,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이며, 학술검색 서비스에서 논문으로 내려받을 수 있다. 오른쪽 글은 “오늘날의 시네필리아”이며, 그의 비평집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의 1장이다.














해적민수에 따르면 윗글에서 ‘밀수로서의 비평’이라는 대목이 해적과 연결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나 밀수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만남들, 즉 여정 자체가 곧 자신을 성장시키는 용사의 모험담이다. “영화들이 어떠한 우정 속에 있는지 그려보면서 (…) 그 영화들이 반(anti-) 영화적 내지는 반(counter-) 영화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장치들과 교접하는 수로를 찾아 이동하고 또 직접 파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 모험담은 결국에 ‘당신의 성장은 이미 처음부터 내재되었던 역량이었다’고 선언하는 역량주의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 역량을 “직접적으로 감지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밀수와 같은 형태를 빌리지 않으면 시네필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해 모든 영화는 이미 네트워크 안에 내재하지만 이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일은 모두 해적들의 밀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해적들이 가진 믿음이란 “이미 네트가 모든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일에 다름없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대결이라는 행위는 무법지대라던가 힘에 의한 지배라던가 하는 아나키즘의 원리가 아니라 “의지의 관철과 실현”이라는 맥락으로 읽혀야만 한다. 해적은 무언가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나는 사람도 무언가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그 역량을 실현하는 방식에서 해적은 다른 이의 의지와 부딪힐 수 있고, 이 경우 대결은 불가피하다. 역량주의라는 말에는 이미 모든 역량을 다 해서라도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내재하기에 그렇다. 설사 그게 상대방을 불구로 만드는 일일지라도, 영화를 발굴하여 표면에 드러내는 일은 방해될 수 없다. 가령 특정 예술 영화의 저작권을 구입해 게이트키핑 하는 일도 영화에 대한 보존의 한 면이라고 믿어야만 해적이라는 행동은 가능하다. ‘그’를 인정할 때 비로소 ‘나’도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있고, 이런 인정 안에서 누구의 인정이 더 옳은지를 대결하는 것으로 해적은 완성된다. 



이들은 자신만큼이나 영화 또한 역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 역량을 꺼내어 모든 조합에서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영화가 그 자체로 네트워크에서 소실되어버려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그것 자체로도 영화는 이미 자신의 역량을 실현하는 것이다.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볼 수 있다’는 거짓을 긍정하는 몇몇 영화를 떠올려보자. 요컨대 해적이라는 행위가 의미하는 건 영화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밀수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여러 사건이다.해적들의 하이재킹은 영토의 구획을 넘나들면서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반복한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잦아질수록 영화는 더욱 많은 가능성을 발한다. 제도와 관습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밀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는, 영화를 그냥 있다고 생각하면 그곳에 있는 세상을 그들은 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본다는 것 이전에 존재함이 있다고 믿는다. 



영화가 표면에 드러내어진 다음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고고학적 탐사의 결과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해적에겐 영화가 대상이 아니라 ‘숭고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적, 밀수라는 말 등은 그 본연의 의미로 사용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의미를 배반하면서 상호 간에 대결 의식을 발휘한다고 보아야 한다. 해적의 역량주의는 그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봐야만 한다는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본연의 의미인 숭고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해적은 숭고다. 리오타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숭고란 “의미에 앞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의미가 뒤따르는 형식이고, 이 경우 해적들의 밀수는 “이미 발생한 영화에 대해 의미가 뒤따르는 형식”이다. 이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고 믿기에, 영화를 표면에 끄집어 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를 뒤따르게 하는 ‘숭고’인 셈이다. 



“존재가 일어날 때 사건은 발생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리오타르는 해적들의 밀수에 관해서도 동일한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해적이라는 존재가 일어날 때 ‘영화’는 네트워크에서 발생한다. 달리 말하자면 구해야 할 영화란 해적이라는 정체성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적이 아닌 시네필이 없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시네필들은 밀수를 해서라도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구해야 할 영화가 바로 시네필이라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적을 두고서 ‘영화가 보고 싶은 사람’으로 정의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은 보편적일 수 있어도, 그 실현 과정이 부당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 부당함에 오염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적이라는 말을 더 잘 살펴보려면 해적에서 시네필이라는 용례를 분리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구해야 할 영화가 시네필이라는 존재를 드러낸다고 보아야 한다. ‘해적’은 이들이 시네필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해적’은 영화를 몰래 빼 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밀수 행동이 드러내는 개인의 가치관에 달려있다고. 다시 말해서 해적은 네트워크라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살펴보아져야 한다. 해적이 영토에 대한 침범을 뜻한다면 애초에 해적은 바다에만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영토’란 주권수호의 구역으로서 자신이 지켜내야 할 구역을 뜻하며, 이 경우 사무라이도, 스타워즈도, 옛날 옛적 서부의 인물들도 모두 해적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위해 싸운다는 특징이 있고, 자신이 출몰한 배경을 여기저기 떠돈다는 점에서도 해적의 항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해적이란 “자기만의 영역을 갖고서” 타인과 대결하는 영역 동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네트워크란 연극에서의 무대처럼 배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트워크는 해적이 출몰해오는 공간이긴 하지만 네트워크이기에 해적이 출몰하는 것만도 아니다. 네트워크는 어떤 영화들이 공존하는 장소이며 이 안에서는 그 어떤 영화도 새로 출몰해올 수 있지만 해적들이 이들 영화의 출현을 예견하진 못한다. 해적들은 황야의 총잡이처럼, 그저 서부를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악행에 맞서 싸우기만 할 뿐이다. 



해적문화로서의 시네필도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돌다가 어떤 영화를 만났을 때 이를 자신의 영역에 견주어 평가하곤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즉 ‘네트워크 안의 해적’이란 자신의 배(영역)를 가지고서 돌아다니다가 타인의 영역(영토)과 부딪히는 이들이다. 헌데 그렇다면, 해적이란 기본적으로 네트워크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배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무런 검색어 없이 구글 검색엔진을 사용할 수 없듯, 네트를 항해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무언가 이미 있어야 한다. 네트는 풍경으로서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기도 한 하나의 축약이지만, 항해자는 목적이 없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리고 시네필의 경우는 영화를 위해 네트에 동참함으로써 그 자신을 해적화한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해적을 숭고의 존재로, 밀수하는 인간상으로 정의했던 걸 떠올려보자. 이에 따르자면 시네필이 보고 싶고, 구하고 싶은 영화란 특정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풍경에 가깝다. 



여기서는 풍경에 관한 두 가지 언급을 인용해보고 싶다. 줄리아나 브루노의 경우 “영화는 우리 기억이 가지고 있는 풍경의 구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생산할 수 있는 매체이다.”라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풍경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지각 방식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역전이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구하고 싶은 영화가 풍경이라는 말은 “어떠한 구도를 생산하기 위해서”, 어떠한 구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과도 같다. 물론 여기서 구도라는 말이 구체적인 각도를 뜻하는 건 아니다. 올려다보는 일이나 내려다보는 일이 시선의 문제와 연결되면 이는 결국 지배욕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이 구도라는 말은 영화 작가가 정해진 폭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배치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과 유사하다. 가시거리 안에 보여지는 것들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은 일종의 화폭인 셈이다. 



해적들이 네트워크에서 얻고자 하는 영화를 상상하는 건 네트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수반하지만, 한편으로 이 부담은 자신이 그리는 그림 안에 소속되어야 함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기에 그런 부류의 영화를 보러 간다고 생각한다. ‘자기 취향’이라는 게 있다면 자연스레 그에 끌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시네필은 어떤 취향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기만의 취향이 있다면 누군가는 자신의 영토에만 머무르고 싶지 않아할 수 있다. 그게 침략이든, 여행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들은 다른 이의 땅을 밟아보고 싶어한다. 이는 시네필이라는 인간상이 철저한 문화적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러한 문화 없이는 자신으로 남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네트’라는 건 시네필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무대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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