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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9. 2022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

만화 평론가 만남의 날에서 웹툰과 영화의 관계를 생각했다.


세상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은 힘들어지고 있다. 굳이 비평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근래의 세상은 특정성을 잃고 있다. 영화면 영화, 미술이면 미술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대개 디지털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디지털은 일종의 예수님 탄생과도 같아서 자신 이전의 것들을 모두 아래로 편입해버렸다. 예컨대 서로 다른 세기를 갖던 매체들이 하나의 역사로 통합된 것이다. 헌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런 역사를 흑역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흑역사, [건담] 시리즈를 리부트하며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전쟁의 역사’로 규정했던 토미노가 사용한 말. 마찬가지로 우리는 디지털을 매체에 관한 논쟁이 분분했던 ‘이전 세기’를 청산하는 것쯤으로 사용한다. 디지털 앞에서 이전 세기는 낡고, 흐트러졌고, 무용해진 과거로 언급될 뿐이다.


그런데 모순되는 건 디지털 세기의 매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과거를 알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현대의 영화를 비평하려면 영화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듯이, 특정성을 잃어버린 것을 논하려면 특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20세기가 ‘큰 이야기’의 시대였고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그 후의 세상인 21세기는 “이데올로기를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특정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닐까. 가령 이런 식이다. 신진 비평가가 되는 법은 기성 비평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먼저 말해야만 비평계의 선생 문화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해 그런 문화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변명하기 위해 그런 문화를 비판한다.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나는 지금 이들의 모순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소속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그들이 과거를 준거점으로 삼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흑역사라는 문맥을 통해서도 말했지만, 흑역사는 있는 것을 없던 것처럼 만들자는 게 아니라 그러한 역사 위에 우리가 현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점철된 분열의 역사를 덮어씌우자는 게 아니었고, 디지털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의 평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말하는 법을 배우는 건 지나간 역사에 저항하는 것이다. 영화가 죽었다고 말하는 일이 영화사에 기초하는 것도, 비평 문화가 글러 먹었다고 말하는 일이 결국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일이 되는 것도, 이 모든 일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 현재에 혼재하는 현실에 저항할 요령으로 행해진다.


즉 디지털 시대에 비평을 한다는 건 되려 이 시대의 평화로움이 여전히 진행 중인 과거를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디지털 시대의 비평은 디지털을 말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아날로그를 거쳐야만 한다는 한계가 있다. 아날로그는 여전히 진행 중인 과거이며, 그러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늘 마주하는 현실 안에서 미래이기도 한 가능성으로 공존한다. 쉽게 말해 아날로그는 우리에게 과거라기보단 늘 현재를 위해 소환되는 미래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가령 나는 우리들의 현재가 <테넷>에서처럼 이미 결정된 미래와 함께 ‘협공’한다는 점을 가정할 때, 무언가를 말하는 일이 곧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은 일이기도 한 ‘인버전’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확정된 실패가 있어야만 비로소 미래라는 성공의 방향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실패란 무엇일까? 실패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폭발이 아니라 점점 더 자신의 힘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사진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게 특별한 순간이고, 영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게 특별한 시간이라면, 디지털 매체가 뭉뚱그려놓은 시공간에서 특정한 순간과 시간을 분리해내는 일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사진과 영화를 빌릴 수밖에 없다. 과거란 지나간 현재라는 점에서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웹툰 비평은 자신이 출판 만화와는 다른 역사를 지녔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되려 ‘아날로그 없는 디지털 네이티브로서의 출발점’을 지닌다는 막대한 어려움이 있다. 아날로그라는 영역을 실패로 던져두면서 그러한 실패의 과정에서 교훈을 얻은 여타 매체와는 달리, 웹툰은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없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웹툰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 태어난 형식이라는 점으로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스스로 만화와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끊어진 연결고리는 웹툰을 만화의 미래가 아니라 그냥 디지털의 자리에만 둔다. 결국 웹툰은 과거가 없다는 그 사실로 인해 미래가 없는 형식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다시금 첫 문단으로 돌아가 특정성을 이야기해보자. 특정성이란 회전문과도 같아서 먼 미래의 원인을 현재에 두는 반면 근 미래의 원인으로는 과거를 꼽는다. 그렇다면 ‘큰 이야기’라는 먼 미래가 사라져버린 현실에서 무언가를 비평하는 일은 온전히 과거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거는 결국 미래 방향으로 가야만 회전문을 마주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만큼 그곳엔 여전히 미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과거에 얽매이는 일은 그만큼 미래에 얽매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존의 관습들을 지적하며 그에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할 때, 이는 그만한 무게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소환한다. 이상한 점은 근래의 비평이 디지털로 인해 바뀐 환경과 방법론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지금 이로 인해 얼마나 무력한지”와 같은 회의론을 펼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헌데 그런 무기력함이 과연 실패나 패배와 같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까. 나는 앞서 “실패는 힘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실패는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특징짓는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정성일도 비슷한 맥락에서 김동원의 <송환2>가 굉장히 무력한 영화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송환>의 1편과 2편 두 영화는 같은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실패’한 미래를 강하게 암시하지만, 되려 그런 실패는 영화로 하여금 현실을 창조의 영역에 밀어넣는 효과가 있다.


현실을 창조의 영역에 넣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영화가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실패는 재현의 불가능성만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나 이미 실패할 것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거나 열화된 부분의 해상도를 높여볼 수 있다. 정성일이 말하는 실패라는 것은 그런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DOCKINGMAGAZINE에 올라온 이 글에서 ‘실패’라는 단어는 전반과 후반에 걸쳐 정확히 30여번 언급된다. 먼저 전반부. “두 번째 실패. 내 질문은 역사 안에서의 실패가 아니라 영화의 실패에 놓여있다. 과정의 실패. 상황의 문제. 조건의 변화. 이때 영화는 어디까지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가. 이 대응의 과정 자체가 실패로 귀결될 때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와버렸다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가.” 정성일의 이 말은 모든 영화가 애니메이션이 되어간다는 근래의 주장을 연상케 한다.


애니메이션은 완전한 작가의 창작 세계이므로 오히려 자신을 특징지을만한 근거를 잃었다. 영화가 심도나 선형성 같은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는 것에 비해 애니메이션은 평면 위에서 데포르메와 같은 형식으로 혹은 레이어나 되감기와 같은 방법을 통해 시시각각 분해된다. 즉, 우리는 애니메이션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멸실된 게 아니라 단지 생각을 벗어난 것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 작품에 담긴 이야기 또한 그러한 매체의 형식에 견주어 이해된다는 것이다. 영화가 애니메이션이 되어간다는 말은 작품에 담긴 이야기 또한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배치하기 쉽게 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요컨대 큰 이야기의 죽음이라는 말은 사망이라기보단 더는 자연의 섭리와 같은 불가항력이 무색해진 시대, 유전자와 나노 단위의 조작이 가해지는 시대를 의미한다.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끝없이 모핑되고 믹싱되는 리핑의 세계다. 큰 이야기가 무너진 자리는 알고 보면 작은 이야기의 집합일 수도 있고 이런 걸 보기 위해 굳이 몸을 뒤로하지 않아도 마우스 휠을 통해 확대 및 축소가 손쉽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디지털이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마땅히 구분되지 않는 시대로, 우리가 큰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는 건 사실 디지털을 통해 가능해진 더욱 세밀한 관찰의 영역 때문일 수도 있다. 즉 너무 가까이에서 바라보기에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들의 실패는 성공을 너무 가까이서 바라본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웹툰은 미래가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 시야를 뒤로 후퇴시켜야 한다. 성공한 듯 보이는 웹툰의 현 상황은 관점을 뒤로 물려 실패할 때 비로소 미래의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도 김영식을 따라가면 결국 이 영화의 운명은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그때 김동원은 갑자기 그 운명의 자리에 차라리 자기가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실패의 자리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


이제 후반부. 그래서 영화의 실패란, 영화가 정해진 미래를 마주하면서 끝내 자신이 출발했던 지점을 무색하게 하는 합리화의 지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로 특정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과정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만이 남은 세상을 살고 있다. MBTI라는 결정론, 혹은 디지털이라는 만능론. 가끔은 너무 거리감 없는 이 시대가 오히려 추락의 아슬아슬함이라는 실패의 위협을 자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번의 실패가 모든 세계의 끝장으로 여겨지는 삶은 우리를 항상 가장자리, 최전선에 있기를 요구한다. 최전선은 눈앞의 실패가 벌어졌을 때 자신이 지나온 길 모두를 실패로 만들어버린다.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논증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로 되어버린다.


그러니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항상 ‘이후’가 되어야만 한다. 영화, 미술, 문학, 만화 등을 아날로그라는 시절에 빗대어 과거라고 칭할 수만 있다면 실패의 몫은 과거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실패한 과거를 바탕으로 더 나은 현재를 개선하는 것이지 실패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을 말하기 위해 아날로그를 끌고 오는 작업이 특정성에 기여한다면, 선생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선생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는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정된 결과를 실패의 자리로 지정하면서 확정된 과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속내를 드러낼 수가 없다. 요컨대 우리는 그저 실패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해내고 있을 뿐이다. 삶을 마주하는 일은 결국 실패를 통해 ‘나’라는 영역을 특정하는 것들을 깎아내는 작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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