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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7. 2022

실패할 운명: 불균질한 지점이 더 많다는 사실의 대전제


씨네21에서 진행한 [2022 상반기 한국영화 결산]을 읽으며, 실패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의 단락에서 출발해보고자 한다.



“<범죄도시2>나 <한산: 용의 출현>보다 <외계+인>과 <비상선언>이 훨씬 더 얘기하고 싶어지는 영화라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외계+인>과 <비상선언>에 이야기해보고 싶은 불균질한 지점이 더 많다는 사실의 대전제는 이 영화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성공을 설명하기란 어려우나 실패를 설명하기란 쉽다, 고 송경원은 말했다. 아마도 이는 그것이 실패해서 나빠 보이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못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즉 ‘실패’라는 프레임을 먼저 씌운 채로 들어가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인 ‘왜’의 의미가 상실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왜 실패했는지를 알아야만,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비로소 실패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고, 그건 대개 여러 옹호를 뒷받침하지만, 영화의 실패란 결국 패배가 아니라는 점에서 성공과 덜 성공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씨네21은 작가라는 말이 남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김병규는 작가의 의미란 스튜디오와 같은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를 장악한 수완가이지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서 배를 가라앉힌 선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작가란, 실패의 운명에 놓여있는 사람이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니다. 작가에게 영화란 실패하거나 덜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다음으로는 김철홍이 <비상선언>에 대해 쓴 씨네21 8월 31일자 이다.



<비상선언>을 포스트 세월호 영화로 진단하는 이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은 “구조의 실패”라는 점이었다. 김철홍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 실패했고, 구조의 실패를 보여주기도 한다. 양측 모두에서 실패한 구조, <비상선언>의 이야기는 구멍난 서사에 현실의 자리를 대입해오는 편리함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편리함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사회적 불안함의 지층이다. “아빠, 우리 그냥 내리지 마요.”라는 문제적 대사가 포스트 세월호 시대에 어떤 문맥으로 작동할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대사는 영화 내내 진행되는 눈물겨운 생존기를 단 한 번에 엎어버리면서, 비상해야만 하는 재난영화를 추락의 서사로 탈바꿈시킨다. 이때 “조건 없는 탈출에 관한 조건 없는 거부”라는 대목은 다시금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왜 구조에 실패해야만 했을까? ‘실패의 운명’을 운운하는 건 너무 매몰차고 싸늘한 비관론일지도 모르겠다. 세월호의 맥락을 떠올릴 때 실패의 운명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되고 말며, 이는 정해진 미래가 확정된 과거로서 변모하는 과정에서의 루프가 되니 말이다.

 


우리는 어차피 살아남을 거니까 험하게 굴려도 된다, 혹은 우리는 어차피 죽을 거니까 희망을 말해도 된다. 양쪽 모두 전반부의 서사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를 토대로 후반부의 반전을 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필연성이 개연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개연성은 운명이라는 말을 설명하기엔 맞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연성은 설명의 고리에 속해있다. 운명은 설명의 고리 밖에 있기에 오히려 더욱 필연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운명은 정해진 미래로도 확정된 과거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의 시대는 가히 실패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전후 관계를 짜맞추는 일이 아니라, 제한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실패를 하고자 하는 시대가 바로 실패의 운명이다. 이게 바로 <비상선언>의 구조가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개연성”이 아닌 필연성에 의존하는 이유이다. 세월호 사건이 너무 말도 안 되어서 전후 관계를 짜맞춰야만 했다면, 포스트 세월호 서사에서 이 영화는 그런 설명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포스트 세월호 서사란 설명에 대한 강박증을 안고 있는 서사다. “왜”라는 물음을 해소하는 게 포스트 세월호 서사의 목표이고, 이 과정에서 인물은 그 자체로 조명받기보단 그런 상황에서 선택지를 강요받는 주체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즉 상황이 ‘왜’를 이해하는 것에 소모되는 반면 정작 인물이 던지는 ‘왜’라는 물음은 부재하거나 상실되어 있다. 따라서 위 송경원의 지적은 작가론 이외의 대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실패의 운명에 처한 인물이란 정해진 미래도 확정된 과거도 될 수 없기에, 되려 “지금이 아닌 언젠가의 시공간에서 지금 여기”인 것처럼 묘사하는 판타지가 될 수 있다. 실패의 운명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20세기에서 이데올로기의 벽이 사라진 21세기에 새로이 등장한 자기 위치 구획의 방법론이다. 2022년의 한국영화를 해피엔딩에 빠졌다고 비판하는 대목이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해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그렇다. 그 해피엔딩은 ‘왜’라는 물음에 억지로 답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스튜디오(…)’와 같은 제한된 상황에 있는 이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피엔딩이란 아무도 상처받지 않은 채 끝나는 환상의 세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해피엔딩이란 왜라는 물음에 억지로 답하는 세계를 뜻한다. 왜 자신이 불운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에 마땅한 이유를 부여함으로써 어떠한 의문도 남지 않게 해버리는 방식이 바로 해피엔딩이다. 노엘 스미스 또한 “멜로드라마의 중요성은 그 이데올로기적 실패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멜로의 정서가 형성되며, 이는 곧 통할 수 없는 공간을 통하게 하는 방식으로서의 쾌감을 형성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영화란 것은 방탈출 같은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방탈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범주로 자신의 존재 공간을 축소하고,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을 즐긴다. 이국적이고 낯선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여행과 비슷하나, ‘왜’라는 물음을 던질 때 곧바로 촉각적 피드백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게 바로 방탈출인 것이다. 2022년도 한국 영화도 그와 유사하다. 이것은 실패를 통해 자신을 좌표화하려는 시도이다.



실패는 통할 수 없는 공간에 도전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좌표화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자아는 벽에 부딪혀 온, 거울에 비친, 타인을 통해 야기되는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맥락을 편리하게 빌려 온다는 <비상선언>과 <헌트>에 대한 비판은 다르게 이해될 여지가 있다. 이들 영화가 현실을 대체하려는 시도이기보다, 현실을 축소해 스튜디오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영화는 자신의 세기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실패하는데, 그것은 이미 영화가 이미 그 자체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영화사>에 대해 한 말이지만 영화가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맥락과 일치한다. 핵심은 ‘못’한다는 말이 바로 ‘그럴 수 없다’는 불가능의 지점을 뜻한다는 점인데, 영화의 자동운동은 현실의 지위 자체를 변화시키므로 ‘현장’은 많은 경우 불가능해져 버린다. 고로 영화는 실패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보아도 좋다. 이 운명 속에서 영화의 역할은 이미지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현장에 현전하는 것뿐이다.



오직 현전만이 우리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 실패할 운명이라는 말은 시작도 끝도 없는 바로 지금이라는 점에서 현전을 요구한다. 고쳐 말하자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을 작가로 호명하는 일은 ‘지금이 아닌 언젠가로서의 지금 이곳’을 가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들을 작가로 지지했던 게 아니라 ‘왜’라는 물음에 답을 하고 싶어서 지금 이곳을 낯선 장소로 만들었다. 그렇게 제한된 상황에 놓임으로써 적어도 질문의 여지를 남길 수가 있었고, 설사 그게 여전한 수수께끼라 한들 운명이라는 이름 하에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가령 2020년에 <사냥의 시간>은 모종의 ‘탈출’ 서사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줬다. 헬조선이라는 뚜렷한 시공간이 아닌, 자신을 억까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을 지닌 스튜디오 안에서의 ‘방탈출’말이다. <사냥의 시간>은 확실히 개연성이 약한 영화였지만, 해변에 간다는 인물의 목표를 지정하면서 그 시작과 끝에 필연성을 부여했다. 영화의 청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오히려 도드라지는 건 그 실패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에 실패한 일이었다.



위의 두 영화에 덧붙여서 <사냥의 시간>까지 그런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우리가 논해야 할 건 2022년이 아닌 2020년대일지도 모른다. 포스트 세월호를 언급한 시점에서도 이런 설정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남은 고민은 포스트라는 용어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포스트라는 말이 ‘이후’를 뜻한다면, 그 이후란 건 정확히 어느 시점을 요구하는 것일까? 단순히 세월호의 이전과 이후일 수도, 아니면 세월호로 인해 바뀌어버린,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중적 중첩 상태’ 일수도 있다. 요컨대 이는 고다르 명제의 기묘한 반복처럼 보인다. 이중적 실패, 이것이 포스트 세월호 영화인 이유는 우리가 이 현장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이미지로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아쉬움을 달래보려는 시도는 최근 하마구치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자동차’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시간이 있다면, 자동차의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있었겠느냐는 물음. 우리에게도 스튜디오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영화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묘사하는 게 영화의 역할이라는 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기에 보여지지 않는 것을 현실의 바깥에서 관찰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게 영화의 역할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반영되는지와 같은 리얼리즘의 문제가 아니다. 멀티버스와 같은 개념의 보편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래의 영화는 예측 불가한 문제를 예측 가능한 형태로 제안하기를 선호한다. 완전한 통제는 불가하겠지만 적어도 대략의 구역을 설정하는 것만큼은 가능하다. 이는 해소되지 않는 불안을 안으로 버려두기(격리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영화가 충분한 러닝타임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그런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준다. 그렇게 하는 편이 불안이 ‘있다’고 말하기에, 즉 ‘왜’라는 물음에 답하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해도 말이 되는 상황을 끌어가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설명해보려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패할 운명이란 건 실패가 그 안에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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