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Sep 24. 2022

비평의 측은함과 연구의 처연함


개인적으로 비평이라던가 평론이라던가 하는 것을 고민할 나이는 지났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어떤 이야기를 써내릴 것인지에 관한 고민만이 남아있다. 근래에는 되려 비평과 연구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이 둘을 정의하기란 쉽다. 비평이 문학적 의미라면 연구는 학술적 의미로 볼 수 있다. 허나 정의내리기 쉽다는 게 이 둘을 다르게 보도록 해주는 건 아니므로, 우리는 비평과 연구를 줄곧 같은 선에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연구란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능력으로, 비평적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가 시작되기란 어렵다. 비평도 마찬가지인데, 비평이란 시선을 보내는 능력이라서 어떤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를 끌고 가기 어렵다. 이처럼 비평과 연구를 구분 짓는 일은 엄밀하지가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어느 쪽의 성향을 더 드러내는지다.


연구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시작에서 끝으로의 선형성이 강조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연구에는 늘 발단과 전개 그리고 위기의 서사가 있고, 어떻게 보면 연구야말로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이야기 작법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구를 하나의 서사시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만들 때는 뭔가의 이유로 불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것이냐, 를 생각하면 좋다.”는 문장을 떠올려보자. 행복한 결말을 끌어내려는 시도란 불행에 빠진 이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연구에 해당한다. 같은 맥락에서 세간의 혹평을 듣는 작품을 옹호하는 일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연구에 해당한다. 이때 혹자는 옹호가 바로 비평의 역할이 아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텐데, 확실히 이 말은 옳다. 


비평의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있다. 다만 연구와 비평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연구가 시작에서 끝을 향한다면 비평은 결론에서 시작점으로 역행한다. 연구가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능력이라면 비평은 이미 어떤 결과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 비평이야말로 직관을 더 잘 수행한다. 그래서 비평은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는 관점처럼 비치곤 한다. 이 정당화하는 관점에서 결론은 일종의 목격담과도 같아서 그것을 직접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단지 묘사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고로 비평이 사변론이 되고 마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결론’이라는 것은 이미 도출된 결과가 아니라 시대를 잘못 맞춰 도착해버린 탈구된 시간을 뜻한다. 이 탈구된 시간이 바로 도착하는 것과 도래하는 것 사이를 여는 사건인 것이다.


비평이 이러한 사건에 해당한다면 이것은 결론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도착하는 것도 결론이고 도래하는 것도 결론이라면, 우리는 그런 결론을 비집고 들어갈 힘을 가져야만 한다. 연구가 도출된 결론에서 출발한다면, 비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것 사이에서 출발하게 된다. 비평과 연구는 양쪽 다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런 주어진 것을 구세계로 삼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구세계라 해서 이를 완전히 무덤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연구가 우리의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거두는 일이라면, 비평 또한 우리의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거두는 일이다. 연구가 낡은 것을 줄곧 고쳐나가 점점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비평은 이미 낡은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잘못된 시대를 타고났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연구가 처연함에서 시작한다면 비평은 측은함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연구가 항상 당사자의 입장에 선다면 비평은 조력자의 입장에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평은 항상 주인공일 수가 없다. 비평은 편지처럼 항상 어떤 자리에 도착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비평은 살해당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기도 하다. 누군가 연구를 두고서 항상 전대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고 가정할 때, 비평에는 그런 가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대신 비평은 늘 항상 자신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영화는 비평과 더욱 친연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음악과 미술은 특정 사조의 연속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여태까지 영화는 그 안에서 살해의 눈길을 보낸 적이 없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거나 혹은 너무 흔해 빠진 게 되어버려서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져만 갔을 뿐이다. 


*


누군가 비평의 처우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이음매에서 빠진 무언가, 어우러지지 않는 무언가가 어우러지는 방식을 떠올려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영화가 꿈이 될 수 있는지, 더 나아가자면 그런 세상을 꿈-영화로 사유할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영화를 기억으로 사유하는 일은 결국 비평이 바깥으로 나설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라는 갖는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가 제대로 된 시간의식을 갖고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반면, 비평은 그런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철학의 시선에 더 가깝다. 비평가는 늘 자신에게로 귀결되지 않을 시간을 경험하면서 되려 그런 시간을 서술해야만 한다는 모순을 맞닥트린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신이 떠올리고 만들어낸 기억의 파편으로서의 꿈을 마주하지만, 꿈의 바깥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꿈은 미래의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앞서 나는 꿈은 바깥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리고 꿈이 바깥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그런 바깥을 다른 것을 경유해 간접 고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기란 어렵다. 헌데 어떤 점을 근거로 우리는 일상에서 영화를 꿈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일단 우리의 꿈이 영상의 형태에서 추체험되는 관찰자의 의식이라는 점이 있을 테다. 분명 자신의 꿈이지만 자신을 관찰자의 형태로 바라보는 이 형식은 비평이 말하는 주변인의 감각과도 같다. 영화는 자신이 특정한 입장으로 들어서 있지만, 그런 자신을 하나의 입장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주변인으로 만들고, 그래서 마치 꿈인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정작 우리는 영화 안에 이미 전제된 시선이 있다는 걸 발견함으로써 자신보다 앞서 있는 자이자 그곳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관객-비평가로서의 우리는 영화를 우리의 꿈으로 여김으로써, 계속해서 자신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신을 미래의 자리에 둘 수 있는 게 아닐까? 미래라는 것은 낡은 것보다 앞서 있는 것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선취한 현재이다. 따라서 꿈이 도착하는 것이자 도래하는 것이라면 비평은 그런 미래를 서술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비평이 서술하는 미래란 영화가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기억이어서 하나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서 출발해 우리에게로 귀결되므로 완전한 바깥으로 사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의 미래일 것이다. 즉 꿈이란 자신을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늘 경계라는 비평적 사유를 동반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유는 경계를 형성할 수 있을 자신의 몸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을 수 없다. 무언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우리가 소위 바깥이라고 말하는 건, 바깥이라는 정의를 통해 경계를 구분 지으면서 동시에 외부에 대한 인식을 심어준다는 특징이 있다. 에너지 엔트로피가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상승하듯 ‘바깥’은 그러한 이동에서 하나의 준거점이 된다. 연구는 실제로 그 자리를 이동한다는 점에서 바깥을 실질적으로 요구하며, 이 경우 바깥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유의 반복 지점이다. 반면 비평의 경우는 꿈을 기억으로 사유하는 일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으로 인해, 바깥은 항상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는다. 요컨대 바깥이 불가능의 영역으로서 가능을 말하는 방식이란 주체를 우연성의 자리인 미래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은 우리에게 늘 읽을거리를 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평은 우리에게 타인이 침투할 수 있는 여지를 늘 남겨둔다. 


이제 우리의 처음 고민으로 돌아가서, 꿈-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써내릴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자. 먼저 무언가를 고민한다는 건 그게 시작될 때를 염두에 두는 것이므로, 이미 진행 중인 일이라면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고민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하는 고민은 늘 무언가가 시작될 때를 지시한다. 인생이 고민의 연속이라는 말은 무언가 시작됨을 뜻하며,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말은 고민하는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 고민이란 대비가 아닌 마주함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헌데 그 말인즉슨 우리가 ‘고민하는 사람’을 정의할 때 그 이야기의 범주가 굉장히 특수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무엇이 시작되고 있을까. 아니, 이곳이 출발점이라면 도착의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고로 우리는 고민하는 사람이 그리는 이상향에 관심을 갖게 된다.


*


고민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는 건 우리가 끝나지 않는 일상에서 무언가 새로운 사건-종결의 지점을 발견한다는 것과도 같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법칙에 따라 시선의 시작점에서 시선이 응집되는 곳에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런 고로 우리가 고민하는 사람에 열광하는 건, 무언가를 끝내고 나면 자연스레 우리가 시작된 곳이 도출되어 나올 것으로 예상하는 탓이다. 이게 비평이라는 행위가 갖는 패배의 성질이 전적으로 미래의 그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넘어야 할 지평은 과연 무엇일까? 칸트에 따르면 희망은 어떤 것이 일어나야 하기에 어떤 것이 있다는 추론이며, 지식은 어떤 것이 일어나기에 어떤 것이 있다는 추론이라고 한다. 비평은 이 둘 다에 해당하지만, 희망의 지식이거나 지식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알아두는 게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지평이라 할 수 있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