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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0. 2021

비평가라는 기생충에 관한 단상

문득 예전에 보았던 <기생수>라는 만화가 떠올랐다. 이 만화의 핵심 줄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어느 날’, ‘기생생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소위 말하는 기생과 지배에 관해서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나 <더 씽> 같은 고전 영화를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에서 인물은 쥐도 새도 모르게 괴물로 바뀌어 있곤 한다. 그러나 이 만화의 핵심은 ‘기생과 지배’가 신체 전부를 대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컨대 신체의 일부만이 기생 당할 수도 있으며, 기생 당한 사람이 기생하는 신체와 대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때 기생 당한 신체는 나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아니라고 보아야 할 테다. 기생 당한 신체 부위가 본래 내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 신체 부위의 통수권은 기생 생물한테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숙주가 기생 부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기생 생물이 전적으로 숙주에게 협조하는 덕분이지 숙주의 완전한 통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평가는 기생충”이라는 문장은 그러한 관계를 전제한다. 비평가가 예술작품에 기생하는 존재라면, 예술이 비평가를 통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비평가가 예술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에 협조하지 않는 비평가는 이 사회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취한다. 비평가는 고도로 발달한 변장술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흔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섞여든 비평가는 예술의 전복이 아니라, 자신의 허기를 달랠 요령으로 약간의 것들을 섭취한다. 이들은 자신이 예술이라는 생태계 전체를 멸종시킬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생존만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여기서 생존이라 함은 동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동물로서의 비평가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예술을 잡아먹지만 인간의 탈을 쓴 비평가는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예술을 살려놓는다. 


만약 기생 생물이 고도로 발달한 변장술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사회에 숨어든 기생 생물들을 쉽사리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서술해보려 한다. “고도로 발달한 비평가는 예술과 구분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야기의 방향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비평가가 아니라 예술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꺼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기생 생물을 배제하려 드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비평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다. 여기서는 기생 생물로 비평가를 묘사했던 본문의 서술에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한다. 기생 생물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단어인데, 피하면 피했지 그게 되고자 하는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생 생물이라는 게 일종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지만, 자연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듯이. 비평가 또한 예술을 지배하지만, 예술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비평가가 언제 무슨 이유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예술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인 만큼 비평가의 등장도 꽤 오래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떠한 신분으로서 기능하게 된 건 그게 하나의 직업이 되었을 때부터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비평가의 등장은 예술이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게 된 시점과 일치한다. 아마 본격적으로 비평의 파급력이 생겨나게 된 건 회화나 조각처럼 일부 귀족들의 독점적인 예술에만 그치던 때가 아니라, 오페라와 같은 대중극이 융성하던 16세기 유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는 19세기에 들어서 뮤지컬이라는 형태로, 20세기에 들어서는 공연장의 형태로 확장되었을 테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비평가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상업화하는 어떤 흐름에 편승한다고 볼 수 있고, 동물이 되거나 인간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이 사회 안에 녹아들 수 있는 셈이다. 


쉽게 말해 이것은 예술을 통해 직접 돈을 버느냐, 혹은 그 예술을 돈이 될 만한 것으로 만드느냐의 문제이다. 내가 비평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 돈을 벌 수도 없고, 예술을 돈이 되는 것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즉,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다. 물론 이런 물음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또는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이 선행되어야 할 테다. 자신이 무엇과 싸우는지, 혹은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무의미한 말이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말해보자면, 나는 예술이 뭔지 모른다. 또한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굳이 예술이 없더라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평가라는 기생 생물처럼 예술이 아니라면 죽고 못 사는 게 아니어서, 예술이 어떻게 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남들처럼 멋진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런 걸 할 능력이 안됐다.


세상에는 글쓰기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는 이들을 비평가라 부른다. 이들의 글쓰기는 ‘읽을 만한’ 맛이 난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예술과 비평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즉, 예술을 보는 게 곧 비평을 읽는 게 되고, 비평을 읽는 게 곧 예술을 보는 게 된다. 그래서 세간에는 “좋은 비평이란, 작품을 보지 않고서도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작품을 보게 만드는 글”이라는 말이 있다. 비평이 아니라 예술을 읽었으니, 이제는 눈으로 직접 확인할 차례라는 것이다. 요컨대 비평가들은 고도로 발달한 변장술을 사용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도로 발달한 과학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듯이, 이들의 변장술은 마술의 환영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위대함에 가까우므로 사기극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심지어는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 연모하는 마음은 절멸하는 것에 대한 동경심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예술이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기생 생물이기에, 늘 항상 절멸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그래서 이들의 처지는 항상 처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예술을 잡아먹기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그게 아니면 본능을 억제하고 식성을 바꾼 뒤 인간 사회에 은밀히 숨어들어야만 한다. 쉽게 말해 이들은 완전히 잡아먹지도, 완전히 잡아먹히지도 않는 어중간한 자리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술에 종속되어 있기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데, 이들의 선택은 맹렬하게 타오르거나 혹은 죽음의 진행을 늦추는 것 말고는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은 일종의 결사에 해당하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멋져 보이지만, 사실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 대처하는 명민한 두 가지 방법인 것이다. 만약 이들의 처연함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건 마치 하이쿠의 찰나와도 같은 것일 테다. 이들은 대안이 없는 상황을 빠르게 가속함으로써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마침내 그 속의 찰나를 발견한다. 바로 이 찰나가 고도로 발달한 예술이 만들어내는 희열이다. 실재의 바깥을 엿보려 드는 바깥의 사유이다. 


나에게 비평가의 재능이 없다는 점이 속상하다. 아쉬운 마음이 큰데, 사람들이랑 어울리기보다 조용히 생각하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노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던 듯싶다. 그 대신, 옆에서 사람들을 보조해줄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되길 희망하고 있다. 나는 바깥을 엿보려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작업을 존경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땅의 바깥을 밟고자 하는 수용소의 난민들이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바깥을 들여다보려는 몇몇 선구자들의 작업은, 죽음을 각오하기에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아름답다는 표현은 표면이 아니라 그 내부에 적용된다. 즉, 이들이 바로 숭고인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숭고라는 건 실재의 사막으로 떠나 다시금 우리 세계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 같은 사람이 그런 부류이다. 여기서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실재의 귀환’이 아니라 ‘실재로부터의 귀환’일 테다. 


넘어설 수 없는 것을 넘어선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숭고가 있다. 삶의 여러 순간에 그러한 숭고를 목격했고,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점이 정말로 애통하다. 예술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기생 생물과 그 무엇도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둘 중 무엇이 되어야 할까. 누군가는 기생 생물을 부러워하는 건 아주 커다란 기만이라고도 말할 테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삶의 의미라는 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시기에는, 찰나의 기쁨이 아니라 그런 짧은 것들을 아주 기다랗게 늘려놓을 수 있는 기술이 중요시된다. 실재로 모험을 떠난 우리에게는 그로부터 다시금 귀환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오늘날, 상품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시간을 붙들어 놓는 게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되었으나, 예술사회에서는 여행자의 시간을 벌어주는 게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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