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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5. 2022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


<오징어 게임>을 보며 들었던 대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성기훈과 오일남이 구슬치기를 하며 벌였던 설전이었다.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기훈에게 일남은 다음처럼 대꾸한다. “그럼, 자네가 나를 속인 건 말이 되고?” 별것 아닌 대사지만 이 대화는 성기훈의 이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깊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결국 자신을 배반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는 점이다. 물론 완벽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란 굉장히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이따금 나는 완벽이라는 말에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완벽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모난 곳이 없어 흠잡을 곳이 없음.”으로 이해되는데, 무엇이 흠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인간은 없던 흠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있는 흠을 애써 무시할 수도 있는 존재다. 그러니 완벽이라는 말은 무언가에 대한 발견이라기보다 발명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완벽한 지도자를 원하는 이들에 의해 후천적으로 발명되는 철인의 모습처럼 말이다. 


세상은 딱 잘라 나누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온전히 홀로 판단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믿어야 하고 그래야만 그 선택은 의미 있어진다. 하지만 이런 말도 결국 이중적이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바라만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도, 빌 게이츠가 베리칩을 심는다는 말도 어쨌거나 선택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타인의 신념이 그 사람의 선택과 의지가 결합한 결과라면, 우리는 그들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할까. 나는 정치라는 말의 정의를 “이해와 타협, 관용과 화합”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할까.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비투스와 같은 여러 단편적인 사회학은 이런 일을 분석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분석은 현상에 대한 것이지 우리가 사는 현실에 관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많은 것을 얻었고, 반대로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말 한마디에 주목하는 세상과 말 한마디에 갈라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한쪽에 깐부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도 깐부가 있고, 내가 아는 건 너도 알 거라고 말하며 상대방에게 암묵적인 동의와 참여를 요구한다. 어느 가족(고레에다)이 죽은 반면, 어느 가족(봉준호)은 생겨났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가족에 속해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 알 수 없고 모호한 게 바로 가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뉴스 같은 곳에서 가정폭력의 사례를 보면 관계자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우리 가족의 일에서 빠지라는 것. 실제로 가족관계는 겉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도 있어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엔 힘이 드는 감이 있다. 하물며 그 가족의 확대판은 어떨까. 국가라던가 단체라던가 하는 것들은 결국 가족에서 기원한 정치체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몇몇 사례를 접하게 된다. 잘잘못을 따지기엔 딱 잘라 떨어지지 않아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형태가 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관계를 아예 무시하고 가족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남자라면 남자 편을 든다거나 여자라면 여자 편을 든다거나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을 응원하고 일본을 미워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나는 이 말이 정말로 옳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점점 발전하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혼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세기에 발명된 개인주의는 자유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했지만 오히려 인간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서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한 결과는 원리 없이 결과만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이는 이해의 부재로 나아갔다. 우리가 마치 1+1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별다른 고민 없이 서로를 줄 세우고 평가할 수 있는 규칙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할 일이 많은데 이런 것에 투자할 시간 따윈 없다고 말하면서, 그 규칙을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이 잘해주는 것들에 의심을 보내며 가족이라는 말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건네는 말은 결코 진심이 될 수 없다고. 그런데 어쩌면, 사람의 기분을 조금은 더 낫게 해준다면 그거대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상황은 그리 좋다고 볼 수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운 마음이 생겨야만 비로소 상황은 긍정적이게 된다.


근래에 내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의 지크,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 나오는 사토코다. 이 두 사람은 작은 면에서든 큰 면에서든 가족을 배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파국의 상황으로 기수를 몬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에서 내가 가족에 대해 정의했듯이 이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논리를 구성하는 한편, 이율배반적인 점이 있기도 하다. 일단, <스파이의 아내>에서 조국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 되겠다는 남편의 말은 가족의 논리를 세계 전반에 확대 적용한다. 마찬가지로 <진격의 거인>에서 민족의 재생산을 막아 세계를 구하겠다는 지크의 말 또한 가족의 논리를 세계 전반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다. 세세히 보면 다르겠지만, 이들 모두는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신이 소속되어야 할 곳을 분리해 바라보고 있다. 즉 가족의 지향점이 다르고 그래서 이들은 사회에서 배척받고, 위험분자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한국인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사토코가 옳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그녀가 처한 위기가 진정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지크도 그렇다. 위험요소를 지닌 유전 형질을 대대로 물려받는 민족이 있다면, 그들이 택해야 하는 건 그들 가족일까 아니면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으로서의 가족일까. 이 경우 “나만 살고 세상 다 죽기 vs 나만 죽고 세상 모두가 살기”라는 극단밖에 남지 않는다. 세계 시민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결국 지크의 판단은 옳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파국의 미래를 마주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지닌 소년이 있다. 에렌은 형 지크와는 정 반대로 “나만 살고 세상 다 죽기”를 택한다. 그는 친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목표를 위해 친구들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에렌이 틀렸고 지크가 옳다고 말하겠지만, 요즘처럼 깐부가 요구되는 시대에 에렌을 두고 마냥 욕할 수만은 없는 듯하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딱히 구분 짓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걸 두고 씨름을 했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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