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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5. 2022

미래에 대한 선제타격


1. 


몇 년 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만화 중에는 <진격의 거인>이 있다. 시리즈 연재가 장기화하고 대외적으로 일은 우익논란으로 인해 만화를 챙겨보는 사람이 줄어들었는데, 올해 초부터 만화의 최종 장을 다루는 애니메이션 ‘파이널시즌’이 성황리에 방영 중이다.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추천에 귀멸의 칼날과 함께 올라와 있었고, 접근성이 좋아서인지 신규 유입되는 시청자가 많아졌다. 내 개인적으로도 나이가 50을 전후로 한 삼촌들이 두 만화를 챙겨보았다길래 적잖이 놀랐던 경험이 있다. <귀멸의 칼날>은 그렇다 쳐도 <진격의 거인>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힘든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의 순위 지표는 시청자의 연령 등을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좀 전의 사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고, 스트리밍 서비스 순위의 지표로는 여전히 젊은 세대가 주요 소비층이라고 가정하는 게 옳을 것이다. 


확실히 스트리밍 서비스의 순위 지표에서 ‘애니메이션’ 분과의 1~3순위에 자리한다는 점은 그야말로 ‘인기’라 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은 젊은 연령대, 주로 직장인 이전의 학생들이 소비하는 콘텐츠로 여겨져 왔다. 이들 소비자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돈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작품을 불법으로 감상하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근래에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됨으로 인해 한달에 오천원에서 만원 남짓, 또는 다른 이들과의 아이디 공유를 하면 더욱 저렴한 가격에 애니메이션 전편을 몰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는 이들에게도 일종의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위험을 들여 불법 루트를 찾기보다는 앱 하나만 설치하면 끝나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훨씬 편리하다. 구독료도 애니메이션을 서너 편을 보면 사실상 ‘뽕’을 뽑는 수준이고 그조차도 친구들과 나눠보면 더욱 저렴해진다. 그러니 어찌 이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는 3사로, 넷플릭스, 왓챠, 라프텔이 있다. 그리고 세 회사 모두 자사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콘텐츠의 시청 순위만 집계할 뿐, 시청자의 연령 같은 걸 집계하지는 않는다. 시청자의 나이를 알 방법은 성인인지 아닌지만을 확인하는 성인인증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진격의 거인>의 순위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평가는 크게 제한되어 있다. 시즌제 애니메이션에서 새 시즌이 나올 때 순위가 일시적으로 반등하는 경우는 흔할뿐더러, 시청 연령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연령에 따른 사회학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집계 방식을 알 수 없고,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애니메이션 팬들이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바로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플랫폼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를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 공항처럼 어디론가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장소가 바로 플랫폼이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우리가 어느 콘텐츠로든 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플랫폼에 빗대어지고, 이를 운영하는 회사를 플랫폼 기업이라 부른다. 또한 플랫폼의 특징 중 하나는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영화를 보다가 잠깐 끊고 나와도, 집에 있다가 카페에 들러도 예전에 보았던 바로 그 지점부터 시청을 재개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의 핵심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평소 작품을 관람하던 시청층과는 다른 이들을 유입시킨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가 아니었더라면 <오징어 게임>을 접할 외국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격의 거인>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을 둘러싸고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유입 과정이 달랐던 걸 떠올려보자. 평소 일본 TV 애니메이션을 처음 들어봤거나, 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면 ‘외국인’에 비견될 수 있다. 외국인들은 <진격의 거인>이 어떤 만화인지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없다. 최소한의 정보조차 없다는 건 어떤 면에서 별다른 선입견 없이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작품에 대한 물리적인 접근성이 높아지자 그동안 안 봤던 작품들을 굳이 보지 않을 이유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이 선입견이란 것, 작품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가 제거된 상황에서 곧바로 목적지에 다다른 이들에겐 작품 외적인 이슈 등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우리가 유튜브를 보다 문득 누른 동영상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것처럼, 스트리밍 서비스가 제시하는 평탄한 지형은 우리에게 결론만을 제시한다. 


2.


어떤 면에서 이런 이미지는 디지털 시대의 푼크툼처럼 보이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의 의미란 은연중에 나에게 와 닿는 것, ‘찌르는’ 이미지였다. 이미지와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나 자신에게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그 장면이 이해되는 게 바로 푼크툼이다. 이제는 고전에 가까운 이론이지만, 디지털 시대에 다시금 푼크툼을 주목해야 하는 건 평면에서 입체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버츄얼 유튜버 시장에서 주로 적용되는 라이브 2D와 같은 사례는 평면에서 입체가 구현되는 한 가지 기술적 방식을 제안한다. 아날로그 애니메이션의 움직임 구현 기법을 디지털로 옮겨놓은 이 기술은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별개의 프레임을 생성하여 조합하지 않는다. 뼈대가 되는 기본 원화에 동형의 이미지를 부착하고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움직임을 생성한다.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은 관계로 기술에 대한 설명이 틀렸을 수는 있다. 그러나 셀 애니메이션 시대의 기술, 아날로그 원리가 다시금 디지털에서도 부활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깊다. 만약 사진이 아날로그적 매체라면, 같은 원리가 구현되는 디지털 이미지에도 여전히 푼크툼과 같은 원리는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푼크툼은 한 장의 프레임을 수평하게 나열하던 시대뿐만 아니라 수직으로 겹쳐 올리는 입체의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반도체 회로가 평면에서 수직으로 집적되듯, 움직임을 구현하는 방식도 평면에서 수직으로 이동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포토샵의 레이어가 수직으로 작동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작동하며, 마찬가지로 찌르는 이미지는 이제 보는 이의 무의식을 이미지가 의식하는 것 안으로 투입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제 디지털 원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포토샵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보자. 디지털 원화는 배경을 유니티와 같은 게임 엔진으로 만들며, 캐릭터는 3D 모델링의 테두리에 특수처리를 해서 다시금 평면에 고정시킨다. 즉 이 애니메이션은 셀화(평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디지털(입체)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 우리의 무의식을 발견해내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진이 앞뒤 맥락 없이 제시되는 것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의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앞뒤가 잘려 보는 것만으로 상황파악을 해야 할 때, 이러한 영상 콘텐츠들은 개개인의 무의식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의 문맥을 제시해준다. 말하자면 콘텐츠가 개인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르는 면을 발견하게 해줄 뿐이다. 


즉, 이런 과정은 우리에게 이미 ‘있다’는 점을 전제로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있음’은 결론으로 먼저 제시되는 디지털 시대의 추천 서비스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추천 서비스는 개인에게 ‘있음’으로 추정되는 요인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작동하므로 일종의 결정론에 가깝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할 것이고 따라서 이를 추천한다는 식의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선제적으로 타격하며, 이는 곧 “어, 알고 보니 나 이런 거 좋아하네.”라는 자화자찬으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진격의 거인>이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지표에서 상위권에 자리한 게 그러한 심리에 대한 자극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격의 거인>이 크게 상과 하로 나뉜 만큼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의 결말로 향해가는 파이널시즌에서 주된 서사로 등장하는 것은 결정된 미래와 그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파이널시즌에서 주인공 에렌 예거가 시조의 힘을 발동하고 난 직후의 대사다. 에렌이 에르디아인들을 좌표세계에 초대해 바깥 세계를 절멸시키겠다고 선언하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한쪽에서는 에렌을 학살자로 지칭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구국의 영웅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에렌이 시조의 힘을 빌어 강제적으로 사람들에게 전언한다는 점이다. 마치 트위터에서 유저의 발언이 팔로워들에게 강제적으로 수신되듯 에렌의 말도 모든 에르디아 민족에 전파된다. 해당 발언에 관한 의견이 어떻든 이미 결론이 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전해 듣는 이 발언은, 우리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묵적인 불안감을 가리키는 듯하다. 트위터, 혹은 넷플릭스처럼 우리의 취향, 그 무의식이 제시하는 미래의 결론을 선제적으로 보여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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