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Aug 09. 2022

하루 우라라, 지지 않는 말

하루 우라라,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의 풍경을 이르는 일본어 표현. 그리고 이름과는 달리 한 번도 피어나지 못한 말. 한국에서 하루 우라라가 알려지게 된 건 실존 경주마를 모에화한 <말딸>이 런칭한 시점이었다.[1] 아직 한국에 서비스하지도 않는 게임인데도 사람들은 하루 우라라에 열광했고, 이는 모에화를 소재를 한 게임에서 외견이 아닌 실존마의 개인사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현상이었다. 특히나 하루 우라라가 실존 경주마였다고 한들, 자국도 아닌 타국의 경마에 관심을 두는 이는 적을 것이므로 이러한 관심은 온전히 게임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하루 우라라라는 말의 개인사 이전에 게임 속의 인물인 하루 우라라에 열광했다. 


사실 하루 우라라의 유명세는 게임의 팬들이 게임에 관한 여러 흥밋거리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생성된 커뮤니티 게시물 덕분이었다. 게임에 관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생산하면서, 유저들에게는 게임에 대한 이해를 대중에게는 게임에 대한 홍보를 겸했다. 게임에 출연하는 말들의 실제 삶은 이것이 게임 속에서 어떤 이야기로 변형되었는지를 유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가령 현실에서는 레이스 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사일런트 스즈카가 <말딸>에서는 극적인 치료 끝에 복귀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의 기적이 있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하루 우라라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 건 말 자신의 삶 덕분이었다. 하루 우라라라는 말에 얽힌 사연을 고증해 넣은 <말딸>의 게임 속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았다. 


하루 우라라는 속된 표현으로 ‘똥말’이었다. 중앙도 아닌 지방에서 삶의 모든 경기를 패배로 끝낸 경주마이자, 훈련이나 주행 모두에서 말을 잘 들어먹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하루 우라라는 돈을 걸고 달리는 경마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다. 일반적으로라면 먹이는 돈도 아까워 진작에 도축되었어야 할 말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하루 우라라는 패배의 아이콘이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삶의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이 계속 달리는 걸 보고 싶게 한 것이다. 허나 이러한 평가는 대중과 업계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음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경마계의 기수들은 하루 우라라가 노력의 가치를 폄하한다고 비판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한순간의 실수로 도축되어야 했던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던 기수에게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살아남은 말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말딸>에서 하루 우라라의 개인사는 바뀌었다. 게임 속에서 우라라는 달리는 것만을 좋아하던 처지에서 우승의 기쁨을 알아가는 과정에 놓인다. “이기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달리기만 하면 즐겁다”고 말하던 우라라에게 트레이너는 줄곧 묻는다. ‘우마무스메’는 왜 달려야 하는가. 어떤 면에서 이는 <말딸>이 빌려 온 아이돌물 장르의 법칙인 꿈과 반짝반짝을 단순히 묘사할 뿐인 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 즐겁다면 확실히 그것을 ‘하지 않을 이유’란 없을 테니 말이다. 헌데 현실에서 우라라는 어떠했는가. 우라라에게 달리지 않을 이유란 달려야만 하는 이유와도 같았다. 이길 수 없기에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 나간다는 것. 그 점에서 생각하면 <말딸>에서의 우라라는 중앙을 묘사한 트레센 학원에 어영부영 입학하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얼추 비슷하다. 우라라는 평생 중앙에 가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대중의 관심만큼은 중앙 못지않았으니 말이다. 


하루 우라라의 개인사에서 <말딸>이 가져온 것은 노력의 가치였다. <말딸>이 인용하는 우라라의 삶은 ‘하지 않을 이유’를 ‘해야만 할 이유’로 바꾸는 것이다. 트레이너는 말한다. 모두가 1등을 향해 달리는 경주에서 1등이 될 목표로 임하지 않는다면 모두의 노력을 배반한 것이라고. 그와 동시에 우라라는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경기[2]에 나가 패배의 쓴맛을 본다. 게임 내내 방실방실 웃던 우라라가 시나리오상에서 가장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단순히 즐기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우라라가 노력의 가치를 깨닫는 장면은 그녀가 한층 성숙해졌음을 묘사한다. 그런데 나는 이 감정에 모종의 의구심이 있다. 우라라가 본래 자유경쟁 논리에서 벗어난 존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딸>의 이 서사는 그녀가 자유경쟁 시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하는 게 아니던가?


노력하지 않으면 패배하거나 죽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자유경쟁 시장을 떠올려보자. 현실에서 우라라의 인기 요인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이 아니라 그녀가 패배하더라도 다시금 멀쩡히 돌아온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우라라는 다른 의미에서의 불멸이었고, 이 ‘죽을 수 없다’는 이미지가 업계인들의 마음을 자극했던 것이다. 무리해서 달리면 부상을 입을 우려가 있고, 달리지 않으면 시장논리에 따라 죽을 수도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적당히 잘’ 달린다는 말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우라라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살아남았으니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 따라서 <말딸>이 우라라를 게임에 가져온 방식은 패배의 감정을 부여하는 게 되어야만 했다. 부분적으로 아이돌 장르를 가져온 이 게임에서 패배는 승리를 빛나게 하기 위한 필수요건이기 때문이다. 


즉 우라라를 살아남게 하려면 오히려 한번 죽여야만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본다면 우라라가 아리마 기념에서 흘린 눈물은 경쟁 시장으로의 진입을 슬퍼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라라는 다시는 달리기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즐기는 시절은 이제 끝났고 죽을 듯이 달려야만 비로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시절이 왔다. 나는 우라라의 시나리오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이여, 어른이 돼라”고 말하는 만화들이 어른의 의무만을 강조하면서 책임은 교묘하게 감춰버렸던 일을 떠올려보자. 어른이 된다는 건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점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런 모습을 묘사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무언가를 더 잘, 그리고 풍부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는 점에 기대를 품지 피곤함에 찌들어 하기 싫은 소리 들어가며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하진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반대로 하기 싫은 일도 같이 진행해야만 삶은 굴러간다. 우라라의 시나리오는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눈물 나게 한다. 우라라의 달리기는 이제 어른의 그것이다. 


피쳐폰을 사용하던 한때 유행하던 ‘놈’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캐릭터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다가오는 장애물을 피할 뿐인 이 게임은 굉장히 단순했다. 다만 적어도 다음 한 가지 문장에서만큼은 단순하지 않았다. 게임이 시작하면 화면 위로는 “놈은 달린다.”라는 짧은 문구가 펼쳐진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면, 놈은 사랑도 하고 악당도 물리치지만 결국 게임의 마지막에 마주하는 문구는 처음과 같다. 놈은 달린다. 아니, 처음과 끝이 같다면 놈은 달려야만 하는 것에 가깝다. 나에게 ‘놈’ 캐릭터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인의 자화상처럼 보였고, 내가 우라라를 보며 놈을 떠올리게 된 것은 바로 그 점에 귀인한다. 달려야만 하는 것에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면, 달리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말하는 일은 있을 수 있을까. 세간에는 기안84처럼 태어난 김에 산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인생이 일종의 자동전진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자동전진은 좋든 싫든 간에 우리가 어떠한 조작을 가할 것을 강요한다.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으면 스테이지 밖으로 밀려나 버려 게임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모 평론가는 <오징어 게임>의 배경을 두고서 “이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죽을 자리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삶을 스스로 멈출 수가 없으니 <오징어 게임>을 통해 적절한 시점에서 하차하기를 택했다는 것이다. 하루 우라라의 시나리오에서 아리마 기념은 그런 위치가 아니었을까. <말딸>을 신자유주의적 경쟁 사회의 논리에 편입하는 건 확실한 무리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우라라가 멈출 자리를 결정하게 하는 게임 시스템에 관해서는 확실히 감정이입이 된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임, 깨라고 만든 게 아니라서 죽는 것 자체가 다음 단계로의 진행 요건이 되는 시나리오. 이는 보통 게임을 시작하는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자주 나오는 연출이라는 점에서, 우라라의 아리마 기념은 ‘뉴 게임’의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세간에는 성공한 경험이 한번 생기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는 말이 있다. 개인의 가능성을 개화하는 건 성공의 경험이라는 것. 이는 성공의 경험을 발판 삼아 자신의 재량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확실히 하루 우라라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패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패배’라는 경험을 발판 삼은 우라라, 아니 우리에게도 성장의 미래는 열려있지 않을까. 

          


[1] <말딸>은 일본에서 2021년에 서비스를 시작했고, 한국에선 그보다 늦은 22년 6월에 카카오게임즈를 통해 런칭했다.

[2] 게임에서 하루 우라라는 더트+단거리에 특화된 캐릭터인데, 시나리오의 마지막 경기인 아리마 기념은 장거리+잔디 조합이라서 일반적으로라면 이길 수 없게 해놨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에 대한 선제타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