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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02. 2022

영화를 혼자 두지 마세요

영화를 보고 삶의 전환점을 찾는 몇몇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은 영화를 자기 삶의 일부와 결부 짓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정 영화 혹은 영화를 보는 일상이 자기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를 회복의 서사와 연결한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구원받았고, 그리하여 자신은 영화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이른바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이라 불리는 이 기능은 영화를 통해 삶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긍정적인 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영화관은 성공한 삶을 위한 하나의 발판에만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추진체를 사용하는 연료식 우주선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우주선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여태까지 자신과 함께 해온 추진체를 방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추진체가 자신을 궤도에 올려두고 나면 이후로는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만 수행해야 하는 여정에서, 추진체는 ‘한번 쓰고 버려둘 뿐인 물건’이 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대피형 캡슐 구조물을 알고 있기도 하다. 주로 배에 탑재되는 이 물건은 타이타닉과 같은 재난에서 사용자를 구조하는 역할, 우주선을 묘사하는 거의 모든 SF 영화에서 소수의 인원을 대피시키는 탈출 포드로 묘사된다. 이들 탑승물은 추진체와 마찬가지로 일회의 분리로 사용이 종료된다는 특징이 있지만 버려지는 쪽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추진체가 자신을 희생하는 반면 탈출 포드의 경우는 본체가 망가지고 소진되어버려서 자신만을 남긴다. 즉 이때의 탈출 포드는 분리의 속성에서 추진체와 유사하나, 그 방향에 있어서는 정말 다른 것으로서, 바로 이 대목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구원받는 자신에게 영화가 발판이 되는 일은 ‘한번 쓰고 버려둘 뿐인’ 게 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요컨대 “실패를 받아들이는 건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두고 싶다. 이 말은 영화에 실패를 전가하고서 자신만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영화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영화를 왜 과거로 버려두어야만 하는지에 의문을 품는 일이다. 만약 실패를 받아들이는 게 영화가 되어야 한다면 그때의 영화는 과거의 특정 시점에 머물러 있을 테다. 하지만 숏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특정한 순간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언어로도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영화가 순간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다는 말은 영화는 ‘특정 순간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특정 순간을 영화에 견주는 일도 불과할 것이고, 영화와 함께 좋지 않은 기억을 버려둘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건 영화를 자기 삶의 추진체로 삼는 게 아니라 영화와 같은 속도로 이동하는 일, 즉 ‘무빙 이미지’로서 영화를 사유하는 일이다. 


무빙 이미지로 영화를 사유하는 일은 우리가 여태까지 익숙하게 해왔던 만큼 크게 어렵거나 혹은 다르지 않다. 영화와 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일은 영화를 탑승체로 이해하면서 그와 함께 어딘가로 나아가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물론 여기서 대상을 조종할 수 있는지와 같은 일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두고서 우리의 현실을 속도 측정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슬로우 시네마라는 말은 잘 생각해보면 정체불명의 단어다. 이 단어는 같은 영화끼리의 비교에서 ‘느리다’고 할만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현실에 비해 느린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인가. 같은 영화끼리 비교한다 한들 영화가 느리게 보이는 일은 우리 현실이 더 빠르게 돌아갈 뿐이라는 점을 예견할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가 영화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레 영화와 멀어지는 것을 영화를 ‘버린다’고 착각하는 일, 즉 영화가 실패했다고 여길만한 경우가 되고야 만다. 


그리고 이때의 영화는 ‘실패한’ 현실로서 우리의 현실을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위로받는다고 말하는 일은 바로 이 대목을 의미한다. 영화를 발판 삼아 성장한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은 영화를 두고서 ‘실패’한 것으로 여겨버리고, 이를 패배자로 규정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상대적으로 ‘덜’ 실패한 것으로 위로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속도는 상대적이다”고 말하면서 이를 영화에 견준 자신의 처지를 항변하는 말로 사용할 때,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된다”고 말해버리면서 영화를 일종의 쓰레기통처럼 여기는 일이 되고야 만다. 영화를 반면교사 삼아 자신의 삶을 전환시키는 이들에게서 영화를 일종의 추진체처럼 사용하는 일이 그다지 좋지 않게 보인다면 그 이유란 바로 그 때문일 테다. 영화를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용할 때 스크린은 추방자들의 세계, 비천하고 추락한 이미지들의 세계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스크린의 추방자들이 사는 비천한 세계에서 영화는 현실을 더는 재현해내지도, 혹은 진실을 포착해내지도 못한다. 현실과 동리듬을 유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영화는 그 자신의 패배가 아니라 우리들의 패배를 대신 껴안는 방식으로 새로운 현실의 순교자가 된다. 그렇다면 역시나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마땅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영화가 될 때 우리의 현실은 영화를 반면교사로 삼는 게 아니라 실패한 자신을 끌어안을 수 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게 영화라면 우리 또한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끌어안을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의 구원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구원을 주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영화인 셈이다. 영화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 또한 영화가 우리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을 반영할 수 없다. 즉, 영화는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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