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문맥과 의도를 읽어내는 일은 때때로 문화적 코드의 과잉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서브컬쳐를 즐기는 입장에서 이야기는 만든 사람의 의도보다 읽는 사람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령 우리가 모에라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징이 되지 않지만, 그 안의 코드를 읽어내어 조합하는 능력을 거칠 때 비로소 애호의 속성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서브 컬쳐 전반에서 통용되는 현상은 <윈터솔져>의 버키 반즈처럼 별다른 의도와 의미가 없는 단어를 나열했을 때, 그것이 사용자의 어떤 힘과 기억을 일깨우는 일이다. 물론 이 말이 서브 컬쳐에 관한 평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건 그저 조합하고 추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일종의 게임이기도 하다는 뜻일 뿐이다. 서브 컬쳐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서브 컬쳐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를 받아들이고 조합하는 쪽이 어떠한지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에 더 가깝다.
판데믹으로 극장이 폐쇄되어 주요 영화가 개봉 연기된 상황에서 나는 학업을 진행했고, 학업이 끝난 후에는 이미 영화를 보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당 기간에 활성화된 OTT 시장은 조금만 기다리면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1.5배 올라버린 티켓 가격은 ‘볼만한 영화’의 기준을 높여버렸다. 극장은 돈이 되지 않는 영화를 내거는 일에 점점 소극적이 되었고, 나 또한 <아바타: 물의 길>이나 <듄>처럼 극장에서 꼭 보게 될 만한 영화만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접할 수 있는 매체와 취향은 점점 서브 컬쳐에만 가까워지는 듯하다. 고립에서 연결을 발견했던 판데믹 시기는 ‘받아들이고 조합하는’ 방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달고나 라떼 만들기 같은 일이 유행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이를 이해하기란 쉽다. 단순히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달고나 라떼에는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판데믹을 통해 연결에 관한 믿음을 얻게 된 건 아닐까. 평행우주와 같은 설정의 매체적 활용에서 주로 발견되는 근래의 경향은 단지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이들을 서로 만나게 한다는 점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TV판인 <록키>라던가 등은 특히나 시리즈로 분절되는 방식으로 거대 서사를 구성해가는 현대의 서사 방식에서 중요한 가치가 바로 연결임을 말해준다. 혹자는 연결이 넷플릭스와 같은 곳에서 몰아보기라는 형태로 구상되었다고도 말하지만, 구독 경제의 활성화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는 게 우리들 세상의 추세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동영상 촬영을 통해 증거를 확보하는 추세와도 결부되는 바, 멈춰있는 것만으로는 논리적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연결이 확보되어야만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인 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이제 멈출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비릴리오의 질주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멈출 수 없다는 말은 제 몸을 주체할 수 없다는 뜻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이 말은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왔던 고전적인 명령의 답습이다. 우리의 현재가 모든 평행 세계에서의 최선이라고 말했던 니체처럼, 우리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줄곧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냥 우리가 모든 세계의 최전선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항상 외계인의 존재를 상상하면서도 사실은 우리가 온 우주의 최전선에 자리한 문명임을 깨닫듯이,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구상되고 상상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전선이라는 말처럼 운명은 항상 미지의 위험을 동반하며, 때로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처럼 의미 없이 고착화하여 굳어지는 일도 다반사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운명을 마주해야만 하는 건 그런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음을 줄곧 되새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운명을 전혀 통제할 수 없고, 단지 받아들이면서 조합하기만 할 뿐이다. 요컨대 운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메인 세계의 바깥에서 하나의 서브 컬쳐로 자리한다.
판데믹 기간 동안 결정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대개 서브 컬쳐를 사유하는 과정이었다. <진격의 거인>이 보여준 결정론적 세계는 우리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문제를 내는 것도 질문에 답을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라는 점에서, 모든 지혜는 자신을 잊을 때만 비로소 시작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에반게리온>과의 작별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우리가 과거와 이별하는 방식에 있어 생각해볼 지점을 남겼고, 넷플릭스에서 영상화된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는 ‘미래’는 우리가 그걸 엿보는 순간 확정된다는 점에 관해, 그렇다면 그걸 미리 확인하고 나아가는 일이 용기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매체를 즐길 때 미리 나무위키 등으로 스포일러를 접하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추리 과정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 말이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그렇듯 미쳐 날뛰기 마련이다. 우리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나서, 미래의 최전선에 있어서 미처 운명이 따라오지 못하는 탓이다. 그리고 그런 운명은 아주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평행세계이기에, 우리에겐 미처 슬퍼할 시간이 없다. 우리가 반드시 도래할 것으로 여기는 미래는 그것에 의해 지배받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결정론적 세계는 우리가 그런 세계와 항상 연결되어있음을 말해주면서, 그런 사실에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되려 우리는 그렇게 결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에서 자기 스스로를 제거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도래할 것으로 여겨지는 결정된 미래에서 벗어나는 법은 그런 연결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한 그런 믿음은 꺾이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자신을 지워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