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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4. 2022

자주영화에 관한 단상

자주영화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이것이 독립 영화와 어떤 뉘앙스적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독립’이라는 말이 항상 무언가를 등지고 서 있다는 점이다. 독립 영화는 항상 무언가에 대한 독립이었으며, 이것이 한국에서는 더는 거대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독립’이라는 표현을 꺼내기엔 모호하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등장한 표현인 ‘자주영화’는 ‘자주’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지에 자생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것에 기대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궤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자주영화는 어딘가에서 피어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면서 특정한 지역에 군락을 이룬다. 자주영화는 군락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로컬의 속성을 지니며 국가나 인종처럼 개인을 정체성화하는 표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영화는 한데 밀집한 비슷한 속성의 무리라는 점에서 ‘살아간다’의 완결형인 ‘삶’에 가깝다. 독립 영화가 항상 반(反)하는 것에서 추력을 얻어냈다면, 자주영화는 무언가를 반하는 것에서 그 자신의 삶을 이동시킨다. 


독립 영화의 한계는 밀어낼 무언가가 사라졌을 때에 있다. 이 경우 독립 영화는 최초의 추력만으로 빈 곳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이는 끝내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걸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일을 낳는다. 욕망이라는 말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방향성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추력은 없으므로 한번 중간에 방해받거나 한다면 영영 그 경로는 끊겨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반면 자주영화는 발생과 진화, 혹은 감염과 번식의 양상을 따라가므로 적어도 욕망에 있어서만큼은 모자람이 없다. 생명체의 기본 욕구가 번식에 있듯이 자주영화 또한 그 목적은 번영을 이루는 것에 있다. 다만 자주영화의 경우는 마땅한 방향성이 없다는 게 단점으로 거론되는데, 오히려 이는 비슷한 환경에 놓인 것이 서로 유사한 형질을 발현하는 ‘수렴진화’의 면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찾는다. 방향성 없는 진화는 많은 착오를 겪지만 오히려 그런 착오들이 도착하는 곳은 한결 같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자주영화는 정말로 착오적인 걸까? 시행착오라는 맥락에서든 아니면 시대착오라는 말에서든 영화에서 자주성을 찾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 자체로 세계의 외부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자주’라는 말이 갖는 내부자의 면모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내부자들이 그리는 꿈은 필연적으로 외부로 확장되기 마련인데 어떻게 영화는 ‘자주’를 표상하는 게 될 수 있을까? 내부자들의 꿈은 그들이 내부에 있다고 해서 결코 내부에 있지 않다. 만약 자주영화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여기서 영화란 “어떻게 해서 꿈이 세계와 독립될 수 있는가”라는 맹인의 문제와 연결되고야 만다. 이른바 “태어나서 한 번도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여 본 적 없는 맹인에게 꿈은 어떤 형태인 것인가”라는 문제다. 다시 말하자면 자주영화에서 영화의 문제란 “외부를 모르는 이들에게 꿈은 우리가 아는 그런 꿈으로서의 의미가 있는지”다. 


이 문제는 우리가 착오에 대한 의미를 점검함으로써 탈출구를 찾는다. 알다시피 벤야민은 시대착오와 폐허를 연결지으며 미래의 어떤 면을 현전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사물이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거리두기 탓이라고 말했다. 사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점진적으로 시대를 벗어나 탈구된 시간의 밖으로 밀려나고, 이를 통해 개인에게 익숙한 하나의 ‘형태’가 된다고 믿었다. 거리두기란 ‘외부’를 위해 의도된 것으로서, 우리가 거리두기를 해제할 때 ‘외부’는 내부와 하나의 혼성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는 코로나 판데믹 상황이 낳은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이라는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한다. 거리두기가 대외적으로는 미래로의 가속을 이끌었던 것과는 달리,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되려 자신을 앞질러가는 현실에 거리를 둘 뿐이었다. 말하자면 영화관은 어떤 이들에게 ‘현실’의 기준점으로서 실제 현실이 자기들을 앞질러가든 말든 언제나, 항상, 늘상 돌아올 자리로 지정되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의 영화관. 돌아올 자리로의 영화관. 어떤 면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시대를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는 곳.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이란 시대착오적이며 이는 곧 영화를 ‘꿈’이라고 가정할 때 이것이 얼마든지 현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관이 현실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들이 대피해야 할 현실이 어떠한 현실도피로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어떠한 후퇴의 지점이 아니라 외부를 내부와 같은 평면에서 두고 관찰한다는 것, 여기서 영화는 그런 외부를 내부에 펼쳐둔다는 점에서의 ‘착오’로 기능한다. 벤야민의 경우 보들레르를 인용하며 착오라는 말이 거리두기의 실패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자주영화에서도 이는 정확한 평론이 된다. 자주 집단에서 영화란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만이 아니라 외부를 내부에 들여놓는다는 점에서 클라인의 병과 같은 위상학적 연결을 제공한다. 


예컨대 자주영화의 시대착오성을 논할 때는 그러한 위상학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 자주영화는 외부가 내부로 건너오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형식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꿈에 위험한 면이 있다면 그런 위험한 면을 중화하면서 이를 들여오는 과정이 바로 영화인 것이다. 물론 자주영화를 두고서 안과 밖이 이어진 형식이라 말하는 일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마치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그들만의 이야기로 번역한다는 점에서 힙합에서의 자기반영성과 같은 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라고 부를 만한 속성이 여기에 있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영화란 단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속성만으로 획득되는 하나의 연결일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말하는 것과 이를 통해 연결되는 일 사이에 영화라는 형식이 자리하는 일은 합당한가. 만약 영화가 외부를 내부에 들여놓는 형식이라 가정하면 그 영화엔 이미 내부가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요컨대 빈자리가 있어야만 한다. 


영화는 무언가를 들여오기 위해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한다는 이 문제는 잘 생각하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빈자리’라는 건 자주영화가 갖는 그 특유의 자생성이 폐허라는 터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자주영화에 단절과 고립의 면을 부여한다면 이것이 결사항전의 인상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삶이 없다. 삶이 없으니 살아가는 것도 없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영화는 그저 일순간의 영화로만 끝날 뿐이다. 그렇다면 자주영화의 시대착오적인 면은 ‘일순간’이라는 대목을 늘려 영원을 탐구하려는 일종의 행위인 게 아닐까? 분명 자주영화는 낯선 대지에서 피어난다는 점에서 자생이라던가 하는 단어와 깊이 연결되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영원이라는 표현만을 놓고 본다면 이는 위에서 말한 도피적인 성격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자주영화가 젊음과 연결되는 대목은 필시 현실에 대한 탈압박이다. 


우리가 현실과의 경주에서 실패한 이를 두고서 광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 자주영화는 현실과의 어쩔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를 통해 무언가에 반하고자 하는 힘을 끌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건대 이는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무언가에 미치는 일이 꼭 현실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법은 없다고 말하면서, 어느 것을 현실이라고 볼지는 결국 그 자신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주영화라는 건 애초에 영화로써 태어났기에만 성립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벤야민의 말처럼 거리두기의 실패가 폐허를 양산한다고 보면 자주영화란 되려 현실과 거리를 둠으로써 성립가능하다. 만약 영화가 꿈이자 영원이라면 그렇게 시간을 늘려놓는 일은 늘 시간의 최전선에 자리하는 것이므로, 자주영화가 현실도피를 한다기보다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영화가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최전선에 서지 않기 위해 항상 자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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