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항상 비평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자문하곤 한다. 그리고는 단어에 대한 주변 이야기만 꺼낼 뿐 정작 물음에 답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비평가로 생각해본 적 없고 그렇게 소개를 한 적도 없다. 그저 남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만 부르라고 내버려둘 뿐이다. 다만 비평에 관해서는 매번 생각에 빠지는 날이 많다. 한 편의 글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무언가에 영향받지 않는 이의 삶은 비평의 불가침영역이 되는 걸까. 개인주의가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비평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말은 사실 서로를 밀어낼 뿐인 건 아닐까. 비평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특징짓는 방식으로 자신을 특징짓는 것에 사용된다. 비평의 자의식은 무언가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비평은 사랑의 감정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사랑이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어떤 면을 발견함으로써 그와 연결되는 일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세상에는 너와 나 단둘만 남는다. 시간이 멈추고 음악이 들린다. 이런 묘사는 흔히 영화에 빠져드는 순간을 그리는 것에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이는 너와 나를 제외한 세상을 배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평이란 대체 무엇일까? 무언가를 통해 자신을 지정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가치를 세계에 의탁하는 일, 즉 데이터베이스의 추출과도 같다. 이 경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정작 ‘나’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풀이할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 왜 훌륭한지를 말하는 것보다 “이 작품을 왜 좋아하는지”를 말하는 게 더 어려운 이유다. 물론 후자는 어느 정도 전자의 이유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자신을 고백하기 위해 다른 걸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라는 고백은 이것이 고유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결국 비평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휘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명제로서 그렇다. 그 누구도 비평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 이라는 게 대중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지만 ‘다른 시각’이라는 말은 결국 내가 그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 되려 인정할 수 없는 가치라는 역설을 남길 뿐이다. 무언가와 연결되는 일이 고유의 영역이라면, 비평이라는 말은 자신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을 때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랑은 그냥 있는 그대로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두려는 건 바로 그 형태 없음이다. 우리가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에게 “비평가는 직업이 아니에요!”라고 조언하듯, 비평이라는 말 자체는 비평의 장 안에서 되려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형태가 와해되듯이, 사랑에 어떤 시각이 있다면 그런 시각이 성립하지 않아야만 사랑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평이라는 말이 무색하다는 이 시대는 되려 비평의 최전성기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서 주류에 흡수되지 않는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오늘날의 ‘작은 이야기’란 “모든 이들이 자기만의 카메라를 들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던 베르토프의 예언과도 같다.
“포착되지 않음.” 비평가란 이야기에 저항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하기에 저항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있으므로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자기 생각을 다른 이와 비교할 뿐, 이 점에서라면 비평가란 세계와 분리되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통하지 않고서 비평이란 걸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면 결국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비평을 읽지 않는 사람이 비평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무언가를 생각하려면 결국 타인의 생각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야기하는 능력이란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할 테다.
‘이야기될 수 없음’이라는 문제가 바로 비평가의 지위라고 본다. 그렇다면 자신이 비평을 한다고 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야기가 없으면 무언가를 서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야기될 수 없음이란 표현의 불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들은 흔히 비평을 읽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들 하지만, 비평을 쓰는 입장에서도 비평을 읽을 수 없다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남은 건 단지 믿음뿐이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우리는 믿음으로 유지되던 과거의 공동체를 떠나왔지만, 다시금 믿음으로 유지되는 세상을 향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비평의 역할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절주절 생각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을 알리기 위해 SNS를 하는 것은 합당한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인지도가 곧 일감이라는 점에서 SNS를 하면 조금이라도 의견을 알리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늘상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자신으로 남는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분열된 자신을 생각한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순간 되려 자신은 이야기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야 만다. 반대로,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부류의 글을 매번 쓰고 있다.
내가 이데올로기라든가 하는 것, 자신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특수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 입는 ‘슈트’를 입는 타입의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중앙을 토대로 주변을 압도하는 일은 예로부터 리더의 자질로 여겨졌다. 그들은 마치 사무라이와도 같다. 하지만 이따금 나는 코등이 없는 칼에 손을 베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상상한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칼에 베이지 않으리라고 여기지만, 그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자신에게 적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타입의 사람은 필연으로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이 정작 고독을 싫어한다는 점이 유머포인트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