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를 취득하며 느낀 점은 운전이라는 개념의 철학적 의미였다. 혹자는 운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묻겠지만, 우리는 이미 몸을 운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질 뿐이다. 가령 어린 아이는 손을 뻗어 움켜쥐는 법을 배우거나 다리를 밀어 땅에 올라서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한번 배우고 나면 이것을 의식적으로 ‘한다’는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운전도 마찬가지다. 운전을 처음 할 때 우리는 달라진 몸에 관한 감각도 차폭이 얼마 정도인지도 모른다. 허나 운전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몸이 자동차에 올라탄 게 아니라 몸이 자동차로 확장되었음을 깨우친다. 이른바 <퍼시픽림>이나 <건담> 시리즈에서처럼 우리는 자동차와 싱크로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차체는 인체의 긴장을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운전자가 불안에 떨 때 차체가 요동치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으며, 난폭운전처럼 운전자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것도 있다.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어떠한 길을 달린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그 삶의 주인이 우리인 만큼,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건 인생을 달려가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동차의 폭과 넓이를 아는 일이야말로 몸의 체화를 잘 드러낸다. 차선을 변경하거나 주차를 할 때처럼 다른 지형과 대상에 접촉하지 않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우리가 세계에 얼마나 잘 부대끼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운전에서 중요한 건 첫 번째가 멀리 보는 시야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건 운송수단을 잘 아는 일이다. 자신의 차종과 연료, 엔진의 스트로크와 기어의 특성 등을 알아두면 연비를 높일 수 있으며 각종 버튼들의 위치에 익숙할수록 운전은 편해진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손에 닿는 위치에 있다면 그제야 라디오를 듣거나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는 운전이 재능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임을 보여주는데, 운전을 많이 할수록 차체에 대한 감각이 확장되는 것은 몹시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적어도 운전에 있어 차체를 움직이는 일은 본능적이다.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악셀 등을 헷갈리는 일은 어떠한 재능이라기보다 주어진 기능에 대한 배반에 더 가깝다. 급발진의 이유가 차량 제어시스템의 결함에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 사고는 자신의 몸보다 과한 힘을 휘두를 때 발생하곤 한다.
자동차란 마차와 같은 탈것의 역할을 직접 수행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시작했으며, 이는 주어진 힘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도구에 가깝다. 그래서 운전은 기능에 가까운 것이다. 자동차는 인간이 어딘가로 나아가는 힘을 극대화하는 도구이므로 운전이 사고를 낼 확률이 높은 건 당연하다.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힘과 같은 정도의 자연스러움으로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다면, 우리가 그런 도구를 사용할 때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은 모두 평소보다 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할 테니 말이다. 쉽게 말해 도구가 작은 힘을 큰 힘으로 증폭하는 만큼 자동차는 같은 거리를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해주는 도구에 가깝다. 그리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자신이 직접 차체를 손본다는 점에서 몸에 대한 감각 익히기를 요구한다. 그러니 운전을 두고서 재능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만약 운전이 재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성애나 연민과 같은 감정 또한 개개인에 척도가 있는 타고난 무언가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몸을 다루는 방법을 처음부터 알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운전이라는 행위가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카메라와의 유사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계적 시선을 생산하는 카메라에서 무언가를 포착하고 드러내는 일이 선천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송과선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듯이 우리에게조차 본다는 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눈은 무언가를 보기에 적합한 구조를 지녔고, 우리는 이를 세계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도구로 삼는 것뿐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들어 무언가를 찍는 일에서 윤리를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메라를 우리 몸이 확장이라고 본다면, 윤리는 기능적이라고 밖엔 말할 길이 없으므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본다는 일이 아니라 어떤 세계 자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재능이라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어떠한 상대방을 두고서 지독한 악의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악의를 갖고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만큼 차별적인 일이 또 있을까?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이 무언가에 탑승하는 일이라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운전하며 익혀가는 주변지형물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장소의 수행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오히려 영화란 그러한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의 숭고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카메라를 두고서 자동전진의 세계에 빗댄 스탠리 카벨의 논리는 결국 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언가를 찍는다는 점에서 유발되는 감정은 대상을 마주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스쳐 지나감에 따른 무의식의 불가능성이다.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상황은 운전이라는 게 결국 주변공간 전체를 파악해야만 줄곧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딘가를 가기 위해 지나쳐야만 하는 것도 있다는 점에서 슬픔을 초래한다. 운전자가 불안에 떨면 동승자는 더 크게 불안을 느낀다는 점도 카메라와의 유사점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불안을 느낄 때 영화는 그것을 더 크게 보여준다. 사이드미러의 세계처럼 영화 속의 풍경은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더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고, 앞으로 달리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뒤나 옆을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풍경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렇게 달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다른 각도의 현실을 포착한다. 그래서 영화는 결코 현실과 분리되어있지 않으며 오히려 안전한 주행을 위해 우리 현실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