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락!>과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며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을 생각했다. 먼저 전자를 먼저 말해보자. <봇치>는 히키코모리 소녀가 밴드를 구성한다는 단촐한 구성의 만화다. 여기에는 2000년대 이후 일본 만화의 장르인 [여고생 밴드]가 자리하고, 성격상으로는 [외톨이]라는 특성도 있다. 이 중에서 여고생 밴드는 그닥 흥미롭지 않지만 외톨이라는 소재는 다소 흥미롭다. 왜냐하면 2010년대 이후 일본 서브컬쳐에서는 외톨이를 소재로 한 만화가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외톨이라는 점에서 고립과 우울을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소재는 “외톨이의 주변에 좋은 사람이 들러붙어 비자발적인 인싸가 되는 게 특징”이라는 점에서 단어의 표준적인 사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 외톨이라는 단어가 묘사하는 건 판타지에 가까우며 그 판타지란 ‘상상적 공동체’의 구성이다. 헌데 <재벌집 막내아들>의 경우에도 비슷한 논리가 관측된다. 경향신문이 인터뷰한 이융희 연구자는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은 현실과 판타지의 사이에서 현실에 머무른 결과이며, 이는 소비자가 판타지는 판타지로만 남는다는 대체현실에 적응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작사는 재벌을 징벌하는 현실주의적 논리를 따랐지만 정작 시청자가 원했던 건 판타지에만 머무르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제작사가 고려한 건 “재벌이 단죄받는 합리적 사회”와 이를 구성하는 상상적 공동체(인 시청자)였다. 이 사실은 자명해 보이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다. 예를 들어 <봇치>가 “비자발적 인싸”라는 공식을 따른다면 이러한 특성이 보여주는 건 판타지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아싸들이 인싸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는 따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이 아싸들의 판타지라고만은 볼 수 없다. 오히려 캐릭터화된 아싸를 두고서 그에 반대되는 인싸를 하나의 장르로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판타지를 구성하는 게 아닐까.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가 현실을 다루는 게 아니라 현실주의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면, 판타지 또한 이상적 현실이 아니라 그저 이상적으로 보일 만한 것에 그칠 테니 말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봇치>가 내보이는 외톨이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만화는 어떠한 현실을 다루기보다 그러한 현실을 구성하려는 인자들에 의해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로 작동한다. ‘이유’란 게 없다는 소리다. 관계에 이유가 개입하는 순간부터 전혀 순수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만화에서 관계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작되며 바로 이 점이 시청자의 암묵적 합의를 얻는 지점이다. 관계를 전제로 시작한 만화에서 부차적인 것은 오히려 관계라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지적처럼 <재벌집> 결말 논쟁의 핵심은 회귀와 같은 판타지 설정을 전제로 하는 이 드라마가 갑작스레 현실로 들어서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재벌집>이 현실주의를 다루는 만큼, 결말이 현실에 들어서서는 안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판타지를 전제로 시작한 이 드라마에서 부차적인 것은 오히려 판타지이며, 이 드라마는 현실로 회수되지 않을 부수성으로 이뤄졌기에 되려 인기를 얻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주류를 이루는 장르의 특성은 이것이 현실과 명확히 분리되어있고 그렇기에 현실과는 분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어디까지나 현실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잘 알기에 현실의 바깥에서 용기를 얻는 것을 포기했다. 이들에게 현실은 불변의 지점이었고, 바로 그렇기에 현실은 다른 현실과의 비교를 위한 척도가 되었다. 가령 멀티버스처럼 매 순간 다른 세계에 동시에 속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 모든 세계의 기준이 될 단 하나의 시간 선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체성은 흩어지며 몰두해야 할 장소 또한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이기에 그 외의 모든 세계는 현실과는 뚜렷이 구분되어야만 했다. <재벌집>이 간과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며, 그들은 매체에서 대리만족을 얻기보다 그것이 허황된 좌절이 되는 걸 경계했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봇치>로 돌아가 보자. 외톨이라는 소재가 주는 감각은 고독이나 우울처럼 음습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판타지는 판타지로만 남아야 한다”는 교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우리가 판타지라는 말로 현실을 하나의 외톨이로 남게 한다는 점이다.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면서 매체는 현실주의를 다룰 뿐이라고. 말하자면 둘 사이에는 명확한 간극이 있으며 매체는 현실의 인상들을 두고서 작업할 뿐 둘 사이는 진정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인상’만으로 현실을 논하는 일은 어렵거나 거부되어야 할 것만 같다. 누군가 현실주의 유령이라고 부른 이 인상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무언가 만족감을 주는 듯 보이나, 실상은 그러한 판타지가 현실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현실의 규범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현실은 모든 것과 연결되었지만 실상은 단 하나의 현실만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면, 우리는 ‘외톨이라는 판타지’가 성립하는 과정을 알게 된다. 외톨이는 단 하나로만 작동하는 인격이라는 점을 말이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성립하는 고유성이야말로 <봇치>와 같은 장르가 작동하는 동력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봇치>를 구성하는 것은 “영화를 혼자 두지 마세요”와 같은 식의 동반자 의식일 수도 있다.
예전에 “영화를 혼자 두지 마세요.”라고 말을 꺼냈던 적이 있는데, 그와 반대의 경우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 성장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영화가 우리를 통해 성장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하자면 그 영화는 우리들의 극적인 현실을 자양분 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위에서 이것을 현실의 인상으로 지칭한 만큼 둘 사이에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건 무리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외톨이가 주변인물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일보다는 외톨이와 주변인물이 함께 나아간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바꾸어 말해 현실과 현실의 인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진 않지만 이들은 함께 움직인다는 점에서 관계의 지속을 획득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용한 ‘동반자’라는 표현이 외톨이라는 말과 얼마나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재벌집>과 같은 사례에서도 서사를 판타지 안에 가두면서 이것이 우리의 현실과 어울릴 방법은 있었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온전히 현실을 묘사하지 않았더라도 이 드라마는 현실과의 동반자 관계에서 현실에 관한 인상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세계로 가는 트럭이 다시금 등장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슬램덩크>와 <거침없이 하이킥>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둘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