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18. 2022

영화를 다시 한번 본다는 건


1.



비릴리오의 다음 발언을 살펴보자.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를 산다. 그 세계는 완전히 움직임의 법칙에 몰입되어서 관성의 환영을 창조한다.” 비릴리오의 이 말은 그가 주장하는 관성의 세계, “‘출발’이나 ‘여정’이라는 경험은 이미 소멸했고, 존재하는 것은 이미 ‘도착’밖에 없”는 즉각의 세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각의 세계란 과정 없이 결론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터넷 혁명을 통해 가능해진 정보 사회의 가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보 사회 네트워크는 개개인을 픽셀 하나에 데이터 형태로 할당하는데, 여기서 모든 개인은 하나의 단자가 된다. 그런데 단자라는 건 이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코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 가속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자화된 인간이란 자신의 너머가 엿보여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처럼, 아무리 들여다본다 한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결론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결론을 전제한 상태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로 관성의 세계는 눈에 비치는 게 전부인 마냥 여겨지기도 한다. 출발지점도 전개과정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결론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흥미로운 상황은 소위 ‘서사 영화’라고 불리는 이야기에 대한 어떤 사실 하나를 말해준다. 그 사실이란, 영화 안에서 발단과 전개를 거치는 영화의 경우는 결말 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라는 카테고리보다는 서사학이라는 유서 깊은 장르를 말하는 게 더 옳은 분석이겠지만, 이것이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흥미로운 이유는 시작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재생’된다는 점에 있다. 시간을 뛰어넘은 구전으로 존재하는 문헌 시대의 이야기와는 달리, 시간을 통해 재생되는 영화의 경우 그 모든 이야기에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현실의 지점이 파생된다는 특징이 있다(영화를 보기 시작한다면, 영화 보기를 중단하는 시점도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특징은 일종의 궤적을 형성함으로써 이야기의 전반과 후반, 둘 중 한 곳만 알더라도 자동적으로 다른 한쪽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문을 열고 들어갔다면, 반대편에서는 나오는 모습이 관찰되어야만 한다).



2.



시간의 궤적에 대해 말해보자. 마틴 에이미스가 1991년에 쓴 소설 『시간의 화살』은 과거의 시간대를 보여주는 소설이지만 시간 여행처럼 단번에 시간대가 바뀌지는 않는다. 시간은 순차적으로 과거를 향하며, 이윽고 역사의 현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소설의 서술기법으로 인해 이 이야기는 마치 시간 여행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도 이것은 시간 여행이 아니다. 단지 의식의 실타래를 현재라는 테이블 위에 펼쳐놓을 뿐이다. 과거로 역행하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마치 순행으로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바로 이 점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전제인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가 ‘시간의 화살’이라는 점은 우리가 어떻게 과거로 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시한다. 먼저, ‘시간의 화살’이 열역학 2 법칙을 지칭하는 문장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우주에서 엔트로피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따라서 엔트로피 값이 역행하거나 질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열역학 제2법칙이다. 말하자면 그 어떤 경우에도 엔트로피의 총량은 유지된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엔트로피의 위에 놓인 부속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엔트로피가 역류할 수 있다면 시간도 거꾸로 흘러갈 수 있다. 마틴은 이 흥미로운 전제를 두고서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현장으로의 역류를 택했다.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는 하나의 방법이 그에게는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이는 ‘있을 수 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되려 ‘있어야만 하는’ 당위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인과는 지금 이곳의 자신으로 귀결되는데, 왜냐하면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자신에게 이전의 순간들은 이후로 나아가게 될 현실 역사의 평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과거를 향해가는 자신은 미래의 기억을 품에 안은 채 현재를 만들어간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순열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엔트로피를 거스른다고 볼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엔트로피를 역행한다. 마틴의 소설처럼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의식을 주제 삼지는 않지만, 주도자는 매 순간의 자기 행동을 암기함으로써 과거에 대응하는 자신의 내적 대립쌍을 만들어낸다. 



3.



우리가 여타 매체에서 주로 목격하는 시간 여행은 두 개의 시공간을 반으로 접어 그사이를 관통하는 식으로 과거로 향하는 것이다. 반면 <테넷>에서의 시간 이동은 일종의 달리기 형태로서, 뒤처지는 것들이 곧 과거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다. <테넷>에 나오는 도로 추격신을 보며 이 원리를 설명해볼 수 있겠다. 두 개의 자동차가 같은 속도로 나란히 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둘 중 하나의 속도가 다른 하나보다 느려진다면 이 순간 관찰자는 자동차의 뒤쳐짐을 감지한다. 즉 대상의 속도는 보는 이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한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테넷>에서 엔트로피의 역행은 시간과 함께 그에 달라붙은 공간을 변화시킨다. 순간을 다투는 싸움 속에서 공간은 잘게 분할된다. 초 단위로 분절된 운동의 지점 속에서 우리는 시공을 되돌리는 영상 편집의 기법을 떠올리게 되고, 정해진 결론을 바꾸기란 힘들다는 점도 동시에 깨닫는다. 열차의 발명이 우리의 시간을 기계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영화의 등장은 우리의 공간을 영화가 상영되는 장소로 바꾸어버렸다.



영화를 상영하는 도구가 아무리 달라진다 한들 영화 매체는 예외 없이 시작과 끝을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동영상 플레이어 아래에 있는 바를 따라 타임라인을 이리저리 옮겨보며 영화 서사의 구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지난 시간에 대한 복기가 될 뿐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가 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도 엔트로피는 유지되며 따라서 이것은 시간 여행이 아니다. 주어진 영상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 시간 여행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로그램의 바깥에서 영상을 다루는 우리에게 시간은 그저 평소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테넷>에서 관객의 위치가 그러하다. 편집자가 영상을 돌려보며 타임라인의 오류와 일치를 찾아내듯이 관객은 인버전이 진행 중인 이야기를 보며 영화 전반의 이야기에 대한 인상을 재고하게 된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테넷>을 두 번 보아야 한다면, 서사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가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보며 얻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4.



관객은 서사의 논리적 연결을 위해 여러 번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관객은 스크린 위의 순행 시간 속에서도 자신이 전에 보았던 영상들을 돌려보고 있다. 이때 영화 속의 관객, 서사에 이입한 주체는 순행 시간 속의 역행자가 된다. 이어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영화 속의 서사를 편집-기억하려 드는데, 몇몇 장면은 왜곡된 채로 기억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영화는 이 기억의 왜곡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영화 서사의 바깥에 자리하는 관객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관람을 통해 알아낸 정보들을 하나의 총체로 완결하려 들고, 이에 들어맞지 않는 조각은 선택해 버려버린다. 즉 이 관람 구조에서 관객은 영화 매체를 분절하는 기계에 해당한다. 이들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서사를 주체적으로 조합하고 풀이한다. 매체와 이미지의 역사에 걸쳐 논해졌던 플루서의 게임은 재생 장치 위의 로딩바로 집결한다. 서사는 하나의 결론으로 집약되고, 이때 관객이 내린 결론은 선택적 귀결이 된다. 



<테넷>에는 ‘현재는 미래의 것을 알지 못한다’, 혹은 ‘알아도 모른 체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있다. 서사의 논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자연스레 이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도자의 싸움은 이러한 서사적 연결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목격한 이미지를 시간이 아닌 서사의 선형성을 따라 조합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격납고에 비행기가 부딪히는 장면 중, 현재에서 미래의 자신과 싸우던 주인공은 자신이 맞닥뜨린 괴한이 미래의 자신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에서 현재의 자신과 싸우는 주인공은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이 자신인지를 알고 있었다. 영화의 서사 측면에서 이것은 전반부의 단서가 후반부에 다시금 되풀이되는 것으로, 영화를 순행적으로 볼 때는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를 두 번째로 보는 관객에게 그것은 복선이 아니다. 영화를 두 번째로 보는 관객은 당장에 보여지는 결론을 취소하고 자기만의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다. 



5.



여기서 핵심은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통해 영화의 관람 환경이 얼추 비슷하게 유지되고,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도입부로 역행해가는 경험은 시간에 대한 직접적인 사고와 맞닿는다는 점이다. 극장의 엔딩 크레딧이 끝나기 전에 다시금 출발 지점으로 돌아옴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도달한 영화 경험의 결론을 취소할 수 있다. 이렇게 돌아온 두 번째 출발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경험한다. 첫 번째는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기시감의 경험이다. 여태까지 경험한 이야기를 취소했기에 가능하고, 후반부의 결론을 미리 경험했기에 자동적으로 생겨나버린 전반부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에게 언제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이 기억은 마치 미래에서 온 것처럼 느껴질 테고, 그렇다면 이때의 나는 현재를 다시 한번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파생되는 두 번째 경험은 부재와 마찰과 저항과 상실의 경험이다. 만약 우리가 미래의 기억을 품에 안은 채로 살아간다면, 정해진 이야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서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불운의 요소로 작동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운명처럼 스크린 안에서 재회하고, 이러한 묘사는 비릴리오가 말하는 기술의 가속과 소멸의 경험을 우리에게 전한다. 즉, 영화의 종말을 향해 가는 우리의 일상은 영화가 ‘끝나게 됨으로써’ 비로소 현실에 풀려난다. 헌데 그렇다면, 이렇게 돌아온 일상은 영화에 대한 체험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현실일까? 어쩌면 이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을 취소당함에서 비롯되는 허전함과, 그 상실의 공백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되는 기시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는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감각’은 이미 보았던 것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인 건 아닐까. 들뢰즈의 말마따나 “’결코 본 적이 없는 것’은 ‘이미 본 것’의 반대가 아니다.” 결론을 취소하고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 우리에게 전반부에 대한 경험은 생생한 무언가로 다가오지만, 이 생생함은 우리가 실감나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현실이 아니라, 언젠가 마주했던 것들을 잊어버렸음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6.



이 슬픔은 우리가 경험을 취소당한 시점부터 이미 없던 것으로 되어버리기에 더는 기억할 수 없게 된 무언가다. 말하자면, 우리가 두 번째 영화관람을 통해 느낀 감정들은 경험이 취소됨으로써 불가능해진, 바로 그 비존재의 자리가 만들어낸 상실의 장소인 것이다. 경험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경험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 경험은 가능하지만 경험이라 부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논의의 모순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만약 시간이 정말로 되돌아간다면 우리의 경험도 함께 이전으로 되돌아가 ‘비존재’의 자리로 바뀌어야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다.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말은 과학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다시 한번 관람함으로써 우리의 영화 경험을 일순시킬 수 있다. 영화를 다시 한번 관람할 때, 우리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윽고 세계는 자동기계가 되어 앞으로 전진하며, 우리가 느끼던 불안은 현실 안으로 구현된다.



여기서 자동기계를 통해 가능해진 게 바로 잠재태의 현실 구현이고, 이게 바로 일순을 통해 만들어진 ‘비존재’라 할 수 있다. 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지만, ‘있음’이 두 번 생겨나는 생성만큼은 가능하다. 영화 스크린 안에서 생겨나는 재생의 두 번째 반복은 단지 기술복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영화라는 사건이 깨어난다는 감각만큼은 복제할 수도 없고 또 복제될 수도 없는 단수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존재를 위해서는 영화를 다 끝마쳤다는 완료의 경험, 즉 터널의 밖으로 나오는 종말의 경우를 겪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특히나 영화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날의 현실이 영화가 탄생한 이례로 줄곧 있어왔음을 생각해볼 때, 영화의 종말에 대해 반복되는 논의는 우리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계속해서 취소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 영화의 종말을 향해가는 터널 안에 있으며, 이 터널 안에서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계속해서 취소된다.



7.



여기서는 기술 복제라는 말과 기술 발전이라는 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술 복제라 함은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기술적 가상의 영역으로 이어지지만, 기술 발전이라는 말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여태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것들을 다시 설계해야만 하는 취소의 영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시간상으로 과거 시제 이후를 지시하기에 과거에 있던 것들을 내포하게 된다. 즉, 완전히 새로운 기술처럼 보인다 한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같은 이유로 기술적 발전의 산물인 영화는 그 기원에서부터 예술의 이상향에 대한 기시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시감은 단순히 영화를 예술의 기원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영화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다시금 영화를 예술의 기원으로 데려갔다. 이를 통해 영화는 늘 항상 ‘문제’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미래의 기억을 품은 채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역사는 운명처럼 반복되었고 그러나 기억만큼은 겹겹이 쌓여 유지되는 것이었다.



잠재태의 현실 구현이라는 것을 미분화의 분화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순 후의 잠재태는 아직 분화하지 않은 결정체가 아니라 이미 한번 녹아들었던 분자의 형태를 띤다. 즉 결정체라 부를 수는 없지만 결정체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이들을 조합한 결과물은 얼마든지 이전과 다를 수 있다. 영화를 두 번째로 관람하는 경험이 처음으로 보는 경험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라플라스의 악마를 떠올려보자. 분자가 도래하고 분열하며 다시 조합되는 일련의 순간과 과정들, 이 모든 세계의 좌표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의 몸이 산산조각나더라도 다시금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어느 A 지점에 있던 우리가 B 지점에서 다시금 재구축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 한들 결국에는 기존에 있던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이 구축의 현장은 세계에 잠재했던 우리가 다시금 현실에 구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재구현되는 우리는 반복을 통한 강렬하고 생생한 현재를 체험하게 된다. 



8.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 안으로 잠재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기억의 최소 단위보다 더 작은 형태로까지 분해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화로 치면 하나의 장면에 해당하는 쇼트보다 더 작은 찰나로 분해된 셈이다. 다르게 보면 이는 우리에게 영화적 경험이라는 게 쇼트보다 더 작은 단위의 영상이라는 점을 뜻한다. 이 특이점은 우리가 아직 영화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비존재의 경험 안에서, 복제할 수도 없고 복제될 수도 없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비슷한 환경에서 다시 보게 되는 두 번째 영화 관람은, 세계의 구성 단위보다 더 작은 상태의 자신이 영화를 재구성하는 재편의 환경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이루는 것보다 더 작은 자신이 세계를 구현한다고 여기는 일은, 위와 같은 이유로 불가능하다. 시퀀스에서 쇼트가 나오는 일은 가능해도 쇼트로부터 시퀀스를 구현해내는 일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두 번째 영화 관람에서 영화를 예측한다고 여기는 우리의 경험은, 존재 이전에서만 가능하다.



시간을 가속해 세계를 일순해 온 우리가 모든 영화적 경험보다 더 기원에 가까워질 때, 영화는 예측 가능한 무언가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서 배제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몸 없는 몸의 경험인 비존재의 경험을 선사한다. 즉 쁠랑보다 작아진 우리가 쁠랑의 경험을 취하는 건 예측이 아니라 예측의 궤도에 올라타는 일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적이 없는 것과 연결되는 감각 등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이미 느껴본 적이 있던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른바 기시감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 아니라 이미 한번 도래했던 세상을 일순해온 자신을 통해서 가능하다. 말하자면 영화를 다시 한번 본다는 건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의 생성점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다. 이 ‘다시 한번’은 세계를 빠르게 돌려 영화의 기원을 불러내고, 그 기원으로부터 비존재 상태의 우리를 가정할 수 있게 해준다.



9.



영화 한 편을 여러 번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냥 재밌어서든 간에 여러 번 보았다 하여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다. 영화를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영화를 보아야만 할 이유가 없다면, 영화를 두 번 본다는 말은 다르게 생각될 여지가 있다. 이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에게 보여진다는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우리를 뚜렷이 엿본다는 관음증의 성격은 아니다. 관음증이 특정한 주체의 시선을 상정하는 반면, 세계로부터 보여진다는 말은 세계 안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지운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우리는 앞으로 어느 순간에 어떤 장면이 나오게 될지를 몸으로 익히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나’가 아니라 그냥 영화 자체를 재현해내는 장치만이 이 자리에 덩그러니 남는다. 그러니 영화를 정직하게 재현해내려 드는 이가 아니라면 영화가 반복된다는 인상은 그리 좋은 게 아니다. 영화가 반복됨은 진정으로 영화에 삼켜짐을 의미한다. 영화를 처음 볼 때 우리는 생생함을 느끼지만, 이내 그것이 기시감으로 바뀌고 나면 우리는 죽은 것만도 더 못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운명이 바뀌지 않음에 대한 무기력함과 슬픔만을 느끼게만 될 뿐이다. 


반복된다는 인상을 받는 것, 우리는 이를 기시감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기시감은 일상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같은 것이 여러 번 목격됨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는 건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영화의 그림자만을 본다는 건, 우리가 영화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는 영화를 등진 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기를 거부한다.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는 것의 슬픔은 바로 이러한 외면으로부터 발생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그 세계 안에 속해 있을 때야 연속성과 동질감이 확보되는 것인데, 그 세계와 섞이지 못한다면 영화를 보는 일은 지루하거나 괴로운 일이 된다. 따라서 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진다는 것은 확정된 미래에 대한 반발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에 나오는 고문 장면처럼, 기억을 강제로 주입함으로써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영화에 대한 악감정 말이다. 



10.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발견되는 이 모습을 두고서 희극과 비극의 차이를 언급해볼 수 있다. 비극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례처럼,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문제가 극복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 때 우리는 그러한 감정을 안게 된다. 처음에는 자유로웠을지언정, 영화를 한번 보고 나면 영화의 내용은 정해진 순서대로 각인되어버린다. 기억의 오류 같은 게 아닌 이상 순서가 뒤바뀔 일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보며 느끼던 생생함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영화란 기본적으로 생생함을 바탕으로 작동하는바, 반복하면 할수록 영화의 생명은 꺼져버린다. 말하자면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는 것의 슬픔은, 영화가 점점 소멸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과도 같다. 종합해서 살펴볼 때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일은, 외적으로 소멸의 세계를 설정함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래서 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탈출구의 모색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완고하게 정해진 현실이라면, 이를 포기하고 자리를 뜨면 되지 않겠는가?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재관람의 행위가 우리의 기억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기를 중단한다고 해서 원래 있던 세계가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다. 이 경우, 오히려 사라지는 것은 가속의 논리를 따르는 우리다. 따라서 영화 보기를 중단하는 것이 곧 운명을 바꿀 단서가 된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영화를 반복해서 보아야만 우리는 정해진 운명에 개입할 단서를 얻게 된다. 영화를 반복하여 봄으로써 영화 속 세계를 굳건히 할 수 있고, 이에 영화를 버리고 다시 한번 영화로 돌아오는 일이 가능해진다. 기존에는 영화가 불투명한 것이어서 함부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무형을 띠었다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일을 통해 영화와 우리의 세계 모두 굳건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소멸의 지점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난 후에 영화의 내용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영화는 늘 생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 속에서 생생함에 저항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매 순간 주어지는 소멸의 감각을 뛰어넘는 것 또한 가능해진다. 대폭발의 어둠을 뚫고서도 살아남을 능력 말이다. 


11.


만약 미래가 두렵다면, 미래에 다녀오면 그 두려움이 해결될까? 우리의 미래가 하나의 대폭발에 다다른다고 가정할 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절멸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빠르게 한 바퀴 돌려 앞으로 일어날 일과 과거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빠르게 가속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비극으로 만든다면 이 슬픔은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슬픔이라면, 그것을 기정사실로 하여 받아들인 채 살아가자고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다 알고 본다고 해서 영화가 생생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다. 영화는 과거와 미래가 맞닿는 지점을 만들어주기에 항상 육체의 감각으로써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가속의 상황에서 시각은 육체의 감각에 뒤처지므로, 육체를 먼저 움직이는 것만이 소멸의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폭발이 세계의 종단이 아니라, 세계가 다시 시작되는 곳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말은, 시작과 끝을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접붙임으로써 어둠이 하나로 관통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히 선형적이기만 하지 않고서 모든 운명과 재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글로 읽으면 앞으로의 영화 내용이 어떻게 될지가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정말로 겪었던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를 구술로 듣던 아니면 외국어로 읽든 간에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건 눈으로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오히려 시각은 생생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생생함을 결정하는 건 우리의 시각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글쓰기로 읽어냄으로써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기억의 편린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인다. 바꾸어 말해 이는 영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허구이며,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기억이 우선시된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는 건 우리 자신을 반복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고, 이러한 반복은 시각 이전에 육체가 있다는 선험적 논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하지만 이 논리는 육체 자체가 아니라 가속의 상황에 중점을 둔다. 우리에게 시간의 감각이 생겨나는 게 육체를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두자. 육체가 없을 때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이유는, 시간을 가로지를 몸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 말이다. 



12.



빠르게 가속하는 상황에서 시간이 왜곡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빛의 속도가 곧 시간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대상에는 빛도 포함되며, 이에 따라 중력이 강한 지점에서 시간은 왜곡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가장 강력한 소멸의 지점으로 파악하는 블랙홀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왜 시각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지를 말해준다. 빛이 왜곡되는 장소에서 기억은 우리보다 이전에 자리한다. 블랙홀은 빛조차 왜곡하기에 그 자신으로 목격되지 않는다. 즉,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블랙홀로부터 탈출속도를 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우리가 미래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이 구현 능력을 통해 증명된다. 영화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우리가 목격한 인상과는 괴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우리 현실의 탈출구라면 스크린 위의 풍경은 우리 몸의 생생함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영화가 생생하다고 말할 때는 이것이 기만이라던가 현혹이라던가 하는 표현이 성립할 수 없다. 이 생생함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생생함이 미래 예지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고도로 발달한 생생함은 그것이 기술된 것인지 아니면 떠오른 것인지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영화를 반복해서 볼 때는, 우리가 영화의 앞부분을 ‘이곳에서’ 예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저곳에서’ 이곳을 바라본 것인지를 헷갈리게 된다. 즉 이것은 기본적으로 위상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를 넘보기도 하지만 미래에서 과거를 엿보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례 모두에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속이란 지속의 과정 안에 있는 것이므로 현재의 범주는 오직 과거와 미래 사이를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바꾸어 말해, 과거와 미래는 뫼비우스의 띠가 만나는 바로 그 한 가지 지점에 대한 두 가지 판본이다. 그래서 과거/미래는 쉽사리 관측되지 않는데, 이는 가속을 통한 예외상태의 진입으로만 우리 현실에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왜상을 떠올려보자. 우리 현실을 찢고 들어오려는 왜상은 카메라 경통의 가속을 통해서 관측된다. 홀바인의 해골을 비스듬히 보아야 하듯이, 가속을 통해서만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숨긴 현재에 진입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프지 않았지만, 그저 지쳤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