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영화에 관해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문화나 태도 혹은 방식을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 비평보다는 문화 비평에 더 가깝다는 피드백이나 영상 문화라는 전공 자체와도 결이 맞는다. 나는 한 편의 영화보다는 영화를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에 더 관심이 있었다. 대상을 특정하기보다는 그런 대상에 의해 특정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영화에 대해 알기보다는 영화로 가는 길을 알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정말로 진실된 것인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도’는 자신이 세상에 취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영화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의 문제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관한 물음과도 같았다. 낙원을 생각하는 문제처럼, 정말로 그게 있다고 믿기보단 어떻게 해야 좋은 세상이 될지를 생각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지만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진 않는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자는 마음가짐 자체가 좋은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그런 태도만을 취하게 될 뿐이다.
낙원을 생각하는 문제는 그 존재를 입증하려 드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낙원은 바깥에서는 관측되지 않고 내부에서는 그게 낙원인지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낙원에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며, 반대로 낙원을 증명하는 법은 그곳에 다녀오는 수밖에는 없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낙원은 개인적인 체험이자 바깥에 소속되므로 적어도 우리에겐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빗대자면 임사체험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영혼이나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간의 의식이 신경계의 전기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시네필은 미장센이나 디제시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의 의식은 필름의 장치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유사점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그게 영화인지를 알 수 없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영화에 대한 감흥을 제대로 되새길 수 없다는 한계를 지시한다. 시네필들은 자신이 영화에 대해 느꼈던 걸 조심스레 고백하지만 이런 감상은 영화의 의미작용에 불과할 뿐, 진정으로 ‘영화’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차라리 영화는 어떠한 존재의 양식을 드러내는 지평좌표계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의 의미작용에 대해 말하는 건 결국 일의 진행과정을 나열하는 것 뿐, 그걸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곧바로 가닿지는 않는다. 물론 영화엔 아무런 목표가 없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삶에 생존 자체가 곧 목표라는 점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단서가 붙는 것처럼, 영화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시간의 인과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이 그저 뇌의 전기작용에 불과한 것처럼 영화도 숏과 시퀀스의 의미작용에만 불과한 것이며, 이 경우 영화는 그 의식의 본질보다는 세계 안에서의 행동 원리를 탐구하는 게 더 중요해진다. 가령 벌레의 뉴로시스템을 복사해 넣은 로봇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명백하게 생명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식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걸 증명하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는 일을 택하게 된다. 영화를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화를 말하기보다 영화가 어떻게 우리 세계에서 행동이 될 수 있는지를 따져 묻곤 한다. 영화의 의미작용보다는 영화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작용하는지를 생각하는 게 우리의 주된 임무가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를 증명할 수 없으니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논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비평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꺼내보면, 개중에는 자신에 관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는 크게 두 가지에 귀안하는 듯한데 첫 번째는 무력함이다. 영화가 처한 어떤 입장에 자신이 동참할 수 없고 그렇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이 관점은 일종의 행동원리주의에 해당한다. 이들에게 영화는 현실 세계의 최전선에 있고 어쩌면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사들처럼,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온갖 문제들을 막아내는 ‘보이지 않는 헌신’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세계는 어떠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해오는 중이고, 또한 비슷한 사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각자의 세계는 모두 평행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서로 부딪혀서 박살 나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여기서 비롯된다. 어떤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은 굉장히 다양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정교한 원리와 해결책을 가정하면서, 이에 들어맞지 않는 건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긴다. 헌데 말하자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으며 사실은 그게 ‘문제’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대라고도 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무력함은 전방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 관해 말하는 일은 항상 영화의 안쪽을 향하곤 했다. 영화 비평은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하나의 원리적 설명이었고, 바꾸어 말하자면 그런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과 배경은 설명할 수 있어도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화는 ‘바깥’과 분리된 곳이라는 점에서 외부가 어떻든 그 자신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취급됐다. 즉 영화는 일종의 독립된 세계였고 이를 따라 영화를 말하는 일은 정작 영화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영화는 항상 영화의 밖에서만 말해져야 한다는 이 의식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낙원의 원리증명처럼 우리가 이미 자신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화는 우리가 자신에 소속되지 않게 해주는 일종의 ‘바깥’이었고 우리를 이를 거쳐 자신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해 말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관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살피려고 영화를 보는 이들의 논리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지 않는 곳이 바로 영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영화가 낙원처럼 여겨지는 건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래서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해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영화가 특정한 정의와 합의에 따라 발화되고 지칭되는 한편, ‘영화에 관해’ 말한다는 건 그 자신도 영화의 주변에 서있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서술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영화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모른다. 영화는 너무 복잡해서 자연의 산물이라고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영화를 말하는 건 차라리 바깥을 제외한다는 점에서 전방주시의 의무만이 있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묵묵히 자신을 믿으면서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만 한다. 그리고 영화에 관해 말하는 건 영화에 얽힌 감정을 함께 배운다는 점에서 영화에 이르는 길을 외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자신에 이를 수 있는지를 따져 묻는 건 내가 아닌 것을 통해 나를 말하는 것과도 같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이르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영화란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극복된 바깥의 세계, 낙원의 증명논리가 침범하지 않는 순수이성비판의 세계가 아닐까. 이 경우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최근에 영화보다 서브컬쳐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된 건, 실질적으로 관심이 가는 영화가 줄었고 영화를 보기 힘들어진 환경에 많은 영향이 있지만, 서브컬쳐 자체가 갖는 주변부의 인상 덕이 더 크다. 서브컬처는 문화에 소속된 이들이 자신을 돌아봄에 있어 바깥이 되기에 유용한 지대를 갖는다. 서브컬처의 서브는 주류문화가 말하는 프리오리티가 될 수는 없지만, 반대로 그게 프리오리티기에 수면에 떠오르지 않는 인상들을 경유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우리가 무언가에 입문하려면 당장의 발판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우리가 내딛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낙원에 출입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흔히 ‘비-낙원’ 즉 ‘낙원이 아님’의 상태일 것만 같지만 오히려 그건 ‘처해 있지 않음’의 맥락에 더 가깝다. 허무주의적 세계관에서의 예비가 이곳에 있으며 죽음이 늘 도래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은 어떠한 잠재의 증명으로써 우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때 영화는 그러한 잠재로 지시되지만 우리는 오직 ‘영화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리가 영화에 의해 말해진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늘 염두에 살아가는 것일 뿐, 그 안에 내재하는 건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