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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6. 2023

잔류 감각과 정류 회로


모든 일에는 관성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인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새로운 걸 발견했을 때 기존의 것에 빗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화는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연극과 음악의 혼성 예술로 파악되었다. 영화는 기성 예술의 연장선으로 파악되었기에 빠르게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성에서 출발하는 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관성을 따라가는 일은 파악을 용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과거의 유산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세계가 인식의 연장이듯,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기성의 연장선으로 파악한다. 이때 새로운 것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기성 체계에 도전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경우, “세계가 태어나려면 세계가 파괴되어야 한다”라는 아름다운 말로 포장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 살해”라는 예술계의 관습이다. 


한편으로 기성의 체계로 파악되지 않는 무언가를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한다.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조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이렇게 등장한 것들은 그게 이득이 될지 아니면 위협이 될지를 논하기 위한 많은 검증과정을 거친다. 마치 외계 생명체를 마주한 것 마냥, 격리실에 가두어놓아 지구 생태계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지를 따져 물으며 이들을 검역한다. 등단 제도의 역할은 바로 이렇게 기성 체계에 잘 녹아들 수 있는 이를 선별하는 것이다. 헌데 이런 일은 흡사, “검역되지 않는 것들은 그저 간과될 뿐인 게 아니라 이미 지구 생태계 안에 있기에 별도의 취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해 검역은 ‘통신보안’이나 ‘암구호’처럼 양쪽 프로토콜을 잇는 핸드셰이크(Handshake)의 과정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신진 비평가들이 등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분파를 확정 지으며 비평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합의 절차를 뜻한다. 이들은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속이곤 하는데, 일단 등단해야만 공적인 발언권을 얻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합의 절차는 검역의 한계를 가리킨다. ‘등단’은 이렇게 자리에 올라서는 이들 중 누가 반동분자고 누가 쭉정이인지를 걸러내지 못한다. 기성 체계는 자기들의 등에 칼을 꽃을 이가 누구인지를 사전에 선별하지 못한다. “등단 제도가 일종의 차단막으로 기능한다”고 지적했던 마테리알의 발언이 그렇다. ‘아버지’로서의 기성체계는 신진 비평가를 또 다른 자신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이들을 생물학적 자신으로 분류한다. 사실 그래서 기성체계는 신진 비평가를 적절히 인식하거나 구분할 수 없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면역체계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걸까. 신진비평가를 기성체계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가정해보자. 혹자는 김병규를 정성일의 연장에 놓고 윤아랑을 유운성의 연장으로 여긴다. 이는 적어도 그들 자신에 의해 말해진 바 없다는 점에서, 혹은 그림자로만 남는 걸 경계하는 측면에서도 공적으로 논해질 수는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일의 배경은 쉽게 파악가능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좋아하는 일의 관점의 연장에서 이들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신진 비평가는 어떠한 그림자나 유산에 종속된다기보다 생물학적 자기로서 바라보아진다. 이 둘은 철학적으로 타자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개체이므로 유행병이 생길 땐 양쪽 다 영향받는다. 고로 이 둘은 서로를 제거하려 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바깥으로 나설지를 고민하는 상호협력관계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라면, 누군가를 추종하는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또한 관습 체계의 연장선에서 파악되는 일도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이는 세상에 아주 새로운 게 없어서가 아니다. 관습을 따른다는 건 이들이 살아가는 게 하나의 세상, 지구본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진 비평가를 기성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우리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몰두하고 있음을 뜻한다. ‘검역’은 우리 세계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우리’임을 확인하는 절차이다. 이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암묵적인 눈빛교환을 수행하는 일이고, 서로의 고민이 ‘협력 가능한 체제’ 즉 단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확인받는 일이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기성체계에 대한 공격은 지구 생태계의 피드백 회로를 되돌리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단절이다.  


긴장과 정체, 팽팽함과 머무름.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그렇게 서술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겪는 갈등이나 화합은 마치 지렁이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처럼, 가장 높은 파고와 낮은 저점을 반복하는 일인 듯 보인다. 즉 기성과 신진은 어느 한 쪽에 봉사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를 요구하며, 신진 비평가를 기성 평론가 2세쯤으로 파악하는 일은 단순한 권력이 아니라 꺼짐과 켜짐과 같은 반복적 신호 신호체계로 이해돼야 할지도 모른다. 위베르만이 말하듯, 꺼짐과 켜짐의 반복적인 체계는 0과 1의 이분법으로 풀이되면서 어떠한 이미지의 잔존을 말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는 그렇게 추종하고 따를 만한 닻이 있는지를 고민해보게 된다.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는 걸까. 그리고 이들 이미지가 실패한 자리를 밝힐 만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피드백 회로에 소속되지 않는 감각은 사멸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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