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할 게 있더라도 항상 글로 돌아오게 되는 건, 글쓰기가 현실도피의 일종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몇몇 고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영화를 보며 현실을 잊는다면, 글쓰기에서 몰입의 역할은 어떤 면에서 ‘본다’는 것에 대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글을 쓰며 자신을 들여다본다. 이때 글을 쓰는 지면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이 된다. 이따금 글을 쓰는 일은 그런 점에서 깊은 상실감을 남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계속해서 세상을 잃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영화를 찍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같은 선에 놓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이 둘을 나란히 할 수 없다. 카메라는 세상을 담는 일이고 글쓰기는 자신을 누르는 일인데 어찌 같이 볼 수 있을까.
무중력 상황의 우주인처럼 잡아당겨주는 힘이 없다면, 우리는 모성에서 멀어지고야 만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자신이 땅을 내딛고 있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글을 쓰는 이는 펜을 들어 종이에 촉각을 전이하고 타자기와 키보드의 사례에서는 다시금 세계의 감각을 환원받는다. 즉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를 원하는 일과도 같다. 글을 쓴다는 건 계속해서 피드백을 하는 일이기에, 세계를 ‘걷는다’는 감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는 일은, 글쓰기의 감각이 무언가를 ‘바라본다’와 연결되는 대목을 설명해준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은 단지 그곳에 가고 싶어서일 뿐인 게 아니라 땅을 딛고 서 있고자 함이다. 영화를 보는 이는 스크린에 추방되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더 충실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러니 글쓰기를 하고 있지 않을 때, 누군가는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상가로서의 부유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지구를 잃어버릴 듯한 불안의 감정 말이다. 이 경우 글쓰기는 살아가는 문제이자 삶의 행위가 된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다른 문제들에 골머리를 썩히면서 지구를 탈출하는 듯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집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요컨대 어떤 면에서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생물이다. 그게 어디든 간에, 자신이 살아갈 집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 위에서 세계를 걷는 일을 언급했던 걸 떠올려보자. ‘걷는다’라는 감각은 우리가 글을 줄곧 써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숨 쉬듯이 걸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를 두고서 글쓰기가 자신을 누르는 행위임을 알게 된다.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감정이나 자신이 세계에 녹아버릴 것만 같은 우울감은 글쓰기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다. 글쓰기가 어느 정도 삶의 치유를 제공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글을 쓰지 않아도 마음의 형태는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폭발에 대응하는 방식만큼은 글쓰기가 효율적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누름돌과도 같아서 개인의 삶이 되어줄 수는 없지만 삶에 중심을 잡아줄 수는 있다. 아이에게 차분함을 가르칠 요령으로 서예를 가르쳤듯이, 확장된 주체를 잡아 가두어놓는 것은 오직 글쓰기의 힘이다. 재미있는 점은 카메라 또한 대상의 영혼을 붙잡아둔다고 이해되었었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대상을 가두었다면 글쓰기는 주체를 가둔다. 즉, 글쓰기는 평형계의 일종이다.
별도의 통제를 하지 않는다면 터져버릴 듯한 이 감정이 글쓰기를 통해 제어된다면, 글쓰기란 마치 핵분열과도 같은 것이다. 존재가 상시 분열 중에 있다면 글쓰기의 역할은 마치 냉각수와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글쓰기를 하는 이들에게서 글을 쓰는 이유를 마땅히 따져 묻기가 힘들다. 숨을 쉬는 일에 이유를 묻지 않듯,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의식을 유지할 수 없는 이들에게서 글쓰기란 지속의 삶 그 자체이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서 점점 인내가 사라져가는 근래의 풍경이 무섭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억누르는 법을 잃어간다. 누군가는 현실이 살기 힘들어서 다른 곳으로 도피한 결과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감정을 토해내고 나면 정작 이들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거리는 마치 중세의 프랑스 거리처럼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글쓰기가 그런 거리를 위한 하이힐이 되어줄 것이다.
하이힐은 지면에 발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접촉면을 줄인다. 대지가 너무 더러워서 사람들은 이를 피해 갈 요령으로 그걸 발명했다. 오늘날 글쓰기의 용도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만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너무 더러워서 펜이나 키보드 같은 문자로 표면적을 최대한 줄인다고. 영상 매체의 부흥과 전파는 우리가 세계와 닿는 접촉면을 늘렸지만 반대로 거리의 오물을 피해 갈 수 없게끔도 했다. 너무 많은 정보와 불필요한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고 불평하는 혹자의 말도 참조해볼 만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이 말하듯 이제 우리는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존재를 붕괴시키는 무작위적 칼부림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럴 때일수록 더더욱 글쓰기의 역할이 간절해지는 건 그게 단순히 더럽거나 해서인 건 만은 아닐 것이다. 붕괴의 삶에서는 자신을 찌르는 것만이 우리를 지구에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