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억지를 부려서라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개념을 떠올려보자. 그리스의 연극에서 기계신은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화신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갈등을 원만히 봉합해버리며 이로 인해 인물은 해피엔드를 마주한다. 쉽게 말해 해피엔딩은 개연성이 없거나 하는 일이랑 깊게 연결되어버려서 우리는 해피엔딩을 억지스럽고 갑작스러운 무언가로 연결짓게 됐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본래적으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신파라는 말이 억지눈물을 뜻하지만, 최초에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의미에서의 혁신이었듯이 해피엔드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방법일 뿐이었다. 설사 그게 거짓되고 허황된 현실을 가린다 하더라도, 어쩌면 고통에 찬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피엔딩은 행복이 있다면 불행이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곳이 불행하다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행복이란 게 있다”고 믿게 해주었다. 쉽게 말해 해피엔드는 행복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의미있었다.
어떤 이야기에서, 행복은 낙원의 바깥에 추방됨으로써 생겨난다. 이미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때 낙원 증명 문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의 방향이 있다. 첫 번째는 낙원의 관측에 관한 것이다. 낙원에 도달한 이는 낙원의 바깥에 나오지 않을 것이므로 낙원의 위치는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다. 두 번째는 낙원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낙원의 바깥으로 나와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한다면, 그곳이 낙원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바깥으로 나왔을 것이므로 공표된 위치는 낙원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낙원은 대체 뭘까? 그리고 행복이란 어디에 있을까? 해피엔드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서 자유롭다.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무엇이 행복인지를 잘 모르겠다면 삶은 그저 살아가는 일에만 불과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게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해피엔드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것을 명령한다.
그런 점에서 피폐물, 또는 피카레스크라는 장르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가령 최근 발매된 게임 <사이버 펑크 2077>의 확장팩 이름은 ‘팬텀 리버티’이다. 환상 자유라는 이름으로 직역될 수 있을 이 제목에서는 “해피엔드란 없다”는 법칙이 여전히 관철된다. SF 디스토피아를 배경삼은 이 게임에서 인물은 어떤 분기에서도 ‘행복’하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한다 한들 살아있는 것만 못한 처지에 놓인다. 이는 SF 장르의 특성 중 하나가 실패한 현실이자 대체 현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을 대체’의 맥락으로 이해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이를 바라봄으로써 살아가는 현실에 위안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는 [베르세르크]처럼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거야”라고 말하면서 현실에 맞서 싸우라고 명하는 걸 수도 있다. 해피엔드란 기본적으로 낙원과도 같은 것이기에, 낙원은 우리가 도망치지 않을 때 비로소 도피처가 되어준다고 말이다.
낙원은 도피처다. 도주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지 못한 체 도주해버렸다는 점에서의 도피처다. 바꾸어 표현하면 낙원은 겁쟁이들의 쉼터이자 대체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원이 없다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일과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정작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보면 행복은 우리가 소속될 수도 없고 또한 도망갈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기만 할 뿐,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가 유통되는 방식처럼 행복은 사람들 간에 교환가치를 지니고서 감정을 교류하는 한 가지 방식처럼 보인다. 해피엔드는 대상을 드러내 교환가능한 가치로 만든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 자본의 성질을 닮았다. 심지어 잉여가치, 현실을 초과한 일들이 바로 행복으로 여겨진다는 점도 그렇다. 팬텀 리버티, 자본주의 사회라는 허상은 행복의 근원에 대해 묻게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불행을 마주하는 일을 향유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미디어를 소비하는 우리는, 이야기 속 타인의 불행에 관해 자신의 처지를 올려세우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행복과 성취감을 대리하는 입장도 아니다. 우리가 이세계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살아가는 현실은 점점 이질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남는 건 뭘까. 왜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불행과 세상이 억까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걸까.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일은 서로를 상대화하는 개인화 사회에서 개인의 사유가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거절된다. 타인이 불행하면 불행한 것일 뿐 그렇기에 우리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세상이 거지 같다면 우리의 세상도 똑같이 거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의 공통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금 낙원과 해피엔드의 상관성에 대해 물어야 한다. 모두가 불행하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행복했던 과거인가? 아니면 미래?
누군가는 해피엔드의 반대급부로 피폐물이라는 문화 코드가 대두해왔다고도 말한다. 무조건적인 행복과 보살핌이 ‘마망’ 캐릭터로 등장해온다면 무조건적인 불행과 학대는 ‘멘헤라’ 캐릭터로 등장해온다고. 요컨대 우리는 경험주의에 따른 직관을 위해, 될 수 있었을 미래보다 그랬었던 과거이기를 택한다. 츤데레나 얀데레가 주인공과 얽히는 과정에서 관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이를 통해 현실인식에 영향을 끼친다면 마망과 멘헤라는 기본적으로 세계 인식과는 거리를 둔다. 여기서 캐릭터의 불행과 행복은 회복의 관점이 아니라 엔트로피계로의 회귀를 택한다. 현실은 가역적이어서 한번 손상된 것을 되돌리기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이 존재했음을 통해 우리의 현실에 간접적으로 같은 원리를 부여받자고, 이른바 그곳과 이곳의 얽힘에서 같은 원리를 증명해내자고. 그래서 마망과 멘헤라는 캐릭터성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되지 못한 대체의 성격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원초적인 행복을 찾기보단 우리 현실이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