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집을 짓는 일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비평의 경우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에 관해 쓴다는 점에서,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 예전에 한창 지구촌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글쓰기도 그런 듯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니 그런 세상이 망쳐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대화와 소통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서로 터놓고 말을 하지 않아도 생태계란 것은 꽤 민감하게 반응해서, 어느 하나에 사건이 터지면 다른 쪽도 빠르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원전이 터지면 지구 전체의 해류가 오염되는 세상에서, 혹은 중국의 사막에서 날아온 먼지에 고통받거나 일주일 사이 평균온도차가 30도를 오가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비평계’도 그렇다.
유리 로트만은 생물계 개념에서 착안해 기호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기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바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지만 메모와 같은 형태를 예외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모란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이면서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전언하는 것이다. 메모에서 명령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자신을 삶의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비평도 글쓰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어떠한 생각이나 관점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인식에 자리 잡으면, 비평은 우리 사이를 이어줄 수 있다. 원자와 원자 사이는 비었지만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힘이란 게 분명 있다.
자생하는 글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글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쓰는 글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현상에 압력을 가해보려기보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메모하는 것에 가깝다. 순전히 글을 알아먹을 수 없게 쓰는 일에 핑계대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어쨌든 나는 내 생각들에 관심이 많다. 현실에서는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지만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나는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글쓰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게 일기든 비평이든 간에 꾸준히 무언가를 쓰는 일은 이어지는 힘을 사람들 간의 연결로 탈바꿈시키곤 하므로, 노이즈캔슬링 같은 것도 좋지만 어쨌거나 이곳이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그래서 더 널리 알리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한다. SNS 식으로 말하자면 리트윗이라고나 할까. 기술적으로 보면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마도 ‘훔친다’는 표현이 직관적일 듯한데.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호흡과 박자로 재구성해 나만의 곡을 샘플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했던 말에 기대어 표현하거나, 타인의 발견을 가져와서 자신의 발명품에 하나의 영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설사 그게 완전한 재창작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없다면 지금이 없다는 점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를 탈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훔친다’라는 표현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하나의 생태계가 있다면 다른 멀티버스에 이를 전파하는 방법은 로트만식의 메모인 것은 아닐까? 2010년대 중반부터 멀티버스 개념이 미디어에서 핫한데, 수많은 변종 중에 하나가 되면서 다른 변종을 양산하는 일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밈 개념이 이러한 문화적 유전자의 전파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밈은 대상의 특징적인 면을 갖고서 자의적이지 않게 퍼져 나간다는 점에서 자생성이 목표로 삼아야 할 행동체계다. 종국에는 원본과 너무 동떨어지거나 오인된다 하더라도, 밈은 다원화된 세상에서 다시는 이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여러 생태계를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라는 점에서 위그드라실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기술자에 가깝다고 느낀다. 번뜩이는 순간이나 현상을 발견하는 이들이 과학자라면, 이들의 기술을 응용해 실생활에 쓸만한 기구를 만들어내고는 한다. 노벨이나 오펜하이머처럼 발명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끝에는 활용방안을 결정할 정치인들이 있을 테고, 이 과정에서는 특정 방향을 밀기보다 항상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일에 자생성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파국의 기차는 선로 끝을 달리거나 탈선하거나 둘 중 하나만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그 원인과 과정은 모두 다르다는 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행복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나 불행은 천의 얼굴을 지녔다.” 미래는 항상 분기하고 있다.
자생성이라는 건 북미 대륙과 호주 대륙에 있는 서로 다른 종이 비슷한 환경을 살아간다면, 결국에는 비슷한 외양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멸종되지 않으려면 문화적 다양성을 가져야 하고, 또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사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개인 블로그는 그런 뜻이 있다. 블로그는 개인의 온전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집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분과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모든 것에 예외적이지만, 반대로 온전히 자기를 담는 그릇으로도 기능한다. 그와 동시에 다양하게 배열된 글은 별개로 인식되기보다 총체적으로 인식될 때 하나의 생태계가 되어, 다른 세계로의 분기점이 되어줄 수 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굴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직장을 다닌다면 인사과나 인터뷰어, 편집자처럼 사람을 만나 (무엇이든) 발굴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것이 가장 복잡한 무언가로 변하는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초인을 상상하는 것보다 수만 명의 단순자를 한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전자가 후자를 양산하는 형태겠지만, 이들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생태계를 구성하는지가 눈에 보여서 그런 점이 흥미롭다. 생태계는 항상성이란 게 있어서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아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그게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무너트리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 마음이 무너지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되듯, 불행 앞에서도 여전히 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상을 영유한다는 것은 사실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대견하다고 볼 만하다. 마찬가지로, 읽을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다가오지만, 삶의 어느 순간에 문뜩 떠오르며 일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무너짐과 일으켜 세움을 반복할 때 경험은 분화되어 우리 삶의 전반에 스며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극적인 변화이기보다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양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에 확 바뀌기보다는 한 사람의 삶 전반에 영향을 주고 싶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무언가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한 획기적인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중에 흔적처럼 남는 글을 쓰고 싶다. “어라, 어째서 나 눈물이?” 같은 대사정도라면 어떨까. 이를 위해 특정 지면을 오가기보다는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자기애로서의 글쓰기를 행하기보다는 아마추어리즘을 계속 수행하려 한다. 집단이나 단체보다는 자생성을 믿기 때문에 누구든지 간에 이야기를 자유롭게 꺼낼 수 있을 때 집단은 미래로 분기할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개념을 리메이크하고, 리믹스하고, 디깅해서 하나의 리듬감을 부여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를 믹싱과 리믹싱하는 식으로 연결한다.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고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기대어볼 생각이다. 그냥 어느 환경에서든 자생하면서 뭉칠 땐 뭉치고, 아니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그런 식으로 소집된다고 보면 어떨까. 대외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기대기보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아마추어리즘과 블로거 사이에는 여전히 자신이기를 잃지 않는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