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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2. 2024

영화가 직접 빛을 발할 때


예매를 실수해서 <스즈메의 문단속>을 재관람했다. 재관람을 하며 느낀 바도 있었지만, 영화관에 대한 이야기도 겸사겸사 하고 싶다. 사건의 발단은 롯데시네마에서 벌어졌다. 집 근처 롯데시네마를 둘러보던 중 <스즈메> 다큐멘터리를 하는 중인 걸 발견해서 예매했더니, 그게 일반관도 아니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금일(2024.01.10)에 다큐멘터리와 특별판이 동시에 개봉했다고들 한다. 제목도 무슨 ‘다녀왔어’라고 지어놔서, 최근에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같은 느낌으로 예매했더니 얼떨결에 재관람을 하고 말았다. 


‘다녀왔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 게 화근이었다. 컬러리움’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와서 나머지를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컬러리움은 현시점에서는 이곳에만 있는 특별관으로, 화면 전체를 OLED로 만들어놓은 게 특징이다. 그 말인즉 화면 소자 자체가 빛을 발하기에 영사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색상 표현에 있어서도 꺼짐과 켜짐으로만 화면을 구성하기에 명암비가 확실하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영사기 없이 화면 자체가 빛을 발한다는 점이 기존과 차별화되지 않나 싶다. 영화사의 중요한 축이었던 ‘영사기’가 사라짐으로써 개념에 변화가 생기니 말이다. 


여태까지 영화란 관객, 스크린, 영사기라는 세 개 축으로 설명됐다. 그런데 영화라는 개념에서 영사기가 사라지고 나면 스크린과 관객만 남는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단순화된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졌으니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지리라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기술의 변화가 사람들의 사고를 바꿔놓는 일은 꽤 흔하다. 유성 영화나 컬러 영화의 발명과 마찬가지로 OLED 스크린은 단순한 특별관에만 그치지 않고 영화를 물질적으로 바꾸어놓을지도 모른다. OLED는 영화를 더 잘 보거나 팔기 위한 판매 수단인 것만이 아니라, 영화사의 기술적 변화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영사기’라는 장치는 투사의 개념만을 남기고서 OLED에서 빛을 발하는 소자에 역할을 이관할지도 모르겠다. 소자 하나하나가 빛을 발한다는 대목에서는 라이프니츠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라이프니츠는 단순자에 소우주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세계]론을 설파하고 있기도 하다는 걸 떠올려보자. 영사기의 제거가 암시하는 것은 그런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양분된 세계에서는 상황에 대한 관찰자의 지위 따윈 없어지고야 만다고. 즉, 가해와 피해라는 두 개의 사실만을 종합하면 여기서는 모두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물론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갈등에서 빚어지는 반발력을 비평적 추진력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진은 이율배반적인 것을 한 자리에 놓기보다 다시 돌아보는 쪽을 택했고, 말하자면 그는 세계가 가역적이라기보다는 아직 회복될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 말처럼, 우리는 준다와 받는다로만 [세계]를 이해할 게 아니라 빈 곳을 향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꺼짐과 켜짐은 배면에 서로가 달라붙은 형태의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는 항상 무언가 있었으니 말이다. 소위 말하는 ‘나눌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는 사람도 있다. 영화도 그렇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짐을 챙겨 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간다고 가정했을 때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걸 알게 된다. 영화가 끝난다고 볼 법한 순간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영사기는 무언가 상영되고 있음을 말하는 가장 특징적인 표식이 되어주는데, 이게 사라지고 나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영사기라는 기계 장치가 우리에게 말해주었던 건, 장치가 꺼지더라도 ‘영화’라는 세계가 계속되리라는 믿음이었다.


영사기의 역할이 스크린에 결합했을 뿐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OLED 스크린은 화면이 꺼짐과 켜짐으로만 구성되므로, 화면이 검은 것을 묘사할 때는 소자가 아예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곳엔 영사기처럼 세계의 전면으로 드러나는 빛 같은 게 없다. OLED 스크린은 ‘무대’라는 특정한 공간을 가정하기보다 온 세상을 무대 삼는 듯 보인다. 역설적으로 영사기를 통해 특정되는 공간이 없다 보니 스크린을 지정하는 곳이 곧 세계를 선보이는 곳이 된다. 곧바로 빛을 발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세계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 영화가 직접 빛을 발할 때 화면은 완전 영화로 돌아간다.


*


영화가 시작했고, 스즈메가 문을 닫으러 달려갔다. 여기까지 나는 ‘아, 영화를 짧게 요약하고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됐고 어느 순간 결말에 이르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부분은 뭔가 프레임이 더 부드러운 것 같은데?’하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보니 실 상영시간은 같았다.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원본과의 차이점은 마지막에 가서 대사 한 줄이 추가된 정도라고 했다. 결국 영화를 보며 들었던 감상은 순전히 기분 탓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관람을 하며 처음 보았던 때와는 인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작품에 대한 인상은 전반적으로 어른에 공감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작중에서 사다이진이 일행에 합류하는 지점을 떠올려보자. 소타의 친구인 토모야와 함께 고향을 향하던 중 모녀는 사소한 말싸움을 한다. 그런 와중 스즈메의 이모는 갑작스레 심한 말을 늘어놓는데, 이 장면은 사다이진의 영향을 받아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된 일을 묘사한다. 작중 설명을 따라가면 두 존재는 음양을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이해되는데, 다이진이 ‘소중한 것’을 가리킨다면 사다이진은 ‘소중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이모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아이에 관한 가치를 일깨우는 듯한 면이 있다. 


스즈메와 다이진의 유일한 공통점은 아이다움에 있다. 두 존재는 모두 사랑을 갈구하고 또 그만큼 응석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스즈메의 보호자로 있는 이모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은 손해 봤어”라고 고백하는 일은 어른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잠시나마 아이로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스즈메와 다이진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는 반면 이모는 회사와 같은 일상에 구속된 모습을 보여준다. 스즈메가 재앙에서 사람들을 구한다는 과업을 끌어안는 반면, 이모는 그런 스즈메를 구한다는 책임에 얽매여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이를 구한다=세계를 구한다’라는 말이 된다. 


스즈메가 세계의 뒷문을 발견하는 곳은 모두 폐허지만, 한때 유원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문을 닫는 과정에서 불러오는 사람들의 즐거웠던 한때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 그중에서도 주로 아이들의 기쁜 목소리를 담고 있다. 즉 폐허는 유년기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이는 스즈메가 3.11의 기억을 폐허와 함께 유폐해버린 이유기도 하다. 폐허를 유년기로 남겨둔 시점에서 어른이 되는 일은 폐허를 벗어나는 일에 대입되어, ‘순수’를 유지하는 일은 가급적 지양된다. 왜냐하면 폐허는 재개발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순수’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사라져야 할 가치로서 언급되고 있다. 


폐허를 찾아다니는 스즈메의 여행이 근 백여 년간의 일본 지진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즈메의 여정은 다크 투어리즘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폐(弊)를 끼친다는 이모의 지적은 유년기를 끝내는 여정처럼 보인다. 특히나 문을 ‘닫는다’라는 점에서 ‘폐(閉)’라는 단어는 아무쪼록 폐(廢)허라는 말을 역사가 닫힌 장소, 즉 ‘더는 진행되지 않는’ 곳으로 연상하게끔 한다. 이 점에서 ‘순수’는 성장하지 않는 가치가 되며, 유년기에 줄곧 의존하는 일은 어른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일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스즈메는 어른이 되려 했던 건 아닐까. 


스즈메는 어머니를 잃은 후에 그녀와의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리고야 만다. 이로 인해 그녀는 ‘어머니’의 기억을 잃었으며, 실질적으로 저승 세계에서 만났다고 가정되었던 사실조차도 ‘내일’의 자신에 불과했다. 스즈메는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가치라고 말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지난날의 스즈메에게 ‘미래’는 결정되었다고 말하며, ‘내일’을 살라고 말한다. 결정적으로 어린 스즈메와 고등학생 스즈메가 서로 만나는 장면은 어린 스즈메에게는 ‘폐허’에 대한 의도적인 망각이 되지만, 고등학생 스즈메에게는 폐허의 기억을 딛고 일어서는 성장이 된다.


페허를 두고서 ‘순수’하다고 일컫는 건 자칫했을 때 낭설이 되기 쉽다. 하지만 들뢰즈가 폐허를 결정에 빗대었듯이 이곳을 기억이 도래할 무대라고 보면, 현재를 사는 것과 내일로 나아가라는 말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지를 떠올리기란 쉽다. <스즈메>에서는 문이 열리는 일을 막을 수만 있을 뿐 애초에 문을 없애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한 듯 보인다. 이 맥락에서 ‘닫는다’라는 말은 폐허나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일만을 가리키며, 어른이 되어가는 일의 가치를 부각한다. 어른은 어떤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일 뿐 그것들을 저버리거나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망각은 유년기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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