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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5. 2024

할복할 마음


누벨바그 갤러리라는 곳에서 미시마 유키오 리뷰 대회가 열렸었다. 폴 슈레이더가 만든 전기 영화 <미시마-그의 일생>을 상대로 한 이 리뷰대회에 참여를 기획하였으나, 어영부영하다 기간이 지나버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일대기는 할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재고하는 계기가 됐다. 언젠가 정성일 평론가는 “선언을 할 때는 그에 따라 할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별점 매기기와 비평에 관해 진행된 이 대담에서 그는 비평의 무게에 관해 말한다. 정성일은 비평이 단순한 사상이나 관념이기 전에 행위임을 염두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평은 단순한 의사표현일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의 흥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창작자의 의욕을 꺾어놓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한 작품에 평을 내릴 때는 그만한 무게의 펀치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두해야 한다”고 부연한다. 무언가를 말하는 일에는 그만한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품에 대해 말하는 일은 그만큼 자기도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당신은 할복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이 질문에서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무라이에 관한 인상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라거나 ‘자신이 선택한 것에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라. 당당해져라.’라는 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 말은 그가 젊은 날에 내렸던 몇몇 평가들에 관해 그의 동료들이 내비친 서운함을 기억하기에 이루어졌을 것 같다. 직업인으로서 동료 영화인의 작품을 마주하는 그의 태도는 정직과 소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 감독은 정성일이 자신의 작품에 내린 촌철살인 같은 평에 깊은 실망을 내비쳤으며 이후 그와 연락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요즘 말로 하면 ‘긁혔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자신의 작품에 쓴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언론의 평가에 의해 밥줄이 끊길 수도 있는 입장으로서는 평정심을 갖고 받아들이기엔 힘들었을 테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별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모두가 이상을 갖고 살아가지만 밥그릇 앞에서는 누구라도 이상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자신이 믿는 일과 선택한 일 모두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점인 듯하다. 비평의 의미가 사물에서 현상을 재단하여 끄집어내는 일이라면, 이 과정에서 감정선은 얼마든지 도륙날 수 있다. 많은 경우 비평가는 감성보다 이성이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작품에 내린 평이 이성에 근거했음을 고지하지만, 이러한 조항은 면책을 위한 것일 뿐 그 누구보다도 비평이 이성적일 수만은 없다는 걸 그들 자신이 잘 안다. ‘감각’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미학이 감각적 경험을 분배하는 하나의 체계라면, 그러한 미학을 갖고서 작업하는 사람은 작업하기에 앞서 어떠한 감각적 경험이 있어야만 하는데 바로 그런 점에서 비평에서는 이성이 우선하는 게 유명무실하거나 불가하다는 것이다. 물론 비평에 선험적인 무언가가 작용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비평은 신체를 토대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유물론적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흔히 유물론은 신체를 갖고서 작업하기에 감정에 상반되는 지위를 갖는다고 이해됐다. 하지만 신체란 세계 안에서 자기를 구분 짓는 경계이고 그런 점에서 유물론이란 자기로서 뿌리내리는 일, 혹은 그에 관한 힘이다. 유물론은 항상 바깥을 미지의 세계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바깥에 대한 두려움이나 희망 모두를 포섭하는 것 같다. 애초에 유물론은 ‘바깥’을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넘긴다는 점에서 [세계]를 몰이해의 상대로 삼기 마련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로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등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냥 서로를 믿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와 닿는다. 많은 경우 비평은 자신이 왜 좋다고 느꼈는지, 혹은 왜 거부감이 들었는지를 소명하는 작업이 되기 마련인데 그렇게 보면 비평은 결국 자기를 상대화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나’를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내 감정들에 ‘이해’를 보내는 일이 바로 비평인 것이다. 결국 비평은 바깥을 자기로 포섭하는 작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 비평의 문제는 결국 영화가 어떤 현실을 보여주려 할 때 그런 현실에 모두가 공공연하게 공감을 내비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정말로 자기에 근접하는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고 어쩌면 평생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평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 들지 않고서도 그런 세상을 자기로 포섭할 수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깥’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어려운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아직 탐색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신을 탐색하게끔 해주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내부는 바깥의 상대항으로만 존재하므로 ‘바깥’은 그 자체로 내부를 결속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상대하는 일은 자기를 이해해보려는 일이기도 하다. 1인칭 게임의 플레이어가 자신의 모습을 끝까지 알 수 없듯이,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세상에서는 가장 알 수 없는 게 바로 나 자신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계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해하는 일”은 그런 세계를 통해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킨다. 


‘나’는 전적으로 믿음의 영역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게 바깥의 역할이다. 내부와 바깥의 경계가 없을 때 자아는 자신을 유지할 벽을 잃고야 만다. 물론, 마음에 벽을 두는 일은 서로를 밀어내는 일에 더 자주 사용되기도 하고 또 요즘 세상은 그런 점에서 갈등과 혐오가 대두하기도 하지만, 샹바오의 말처럼 서로가 너무 개인화되었기에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유물론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오히려 이 모든 일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서로가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렸다면, 반대로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이름이 있고 또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도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비평의 문제의식은 이미 결론을 갖고 접근하는 일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예측’은 늘 시작을 동반하므로 비평의 문제는 자연스레 자기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걸 깨닫는다. 


무언가를 예측하는 일은 전적으로 출발점을 갖기 마련인데 여기서 출발점을 탐구하는 일은 자신의 위치를 탐색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 그런 예측이 빗나가거나 수정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런 목표를 수행하려면 자신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특정한 결론이나 미래를 수행하는 과정은 한 가지 신념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이나 경로를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과 남성이 접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성별을 갖고서 작업하는 것일 뿐이지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 자체가 되진 않는다. 리눅스와 맥, 윈도우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질 수 있겠지만 플랫폼은 어디까지나 사고에 접근하기 편리하게 해주는 인터페이스 체계에 불과하다. 키틀러는 매체의 발전 역사가 곧 사고의 발전사라고 믿었지만, 어쨌거나 여기서도 매체란 주체와 대상 사이를 매개해줄 무언가라는 점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의 차이거나 전달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여성이나 남성은 우리가 어떤 성별을 갖고서 작업하는지의 차이일 뿐, 이 모든 일에서 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따른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서로에 다가서는 방법이 다를 수 있고 또한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바깥이 없다면 우리는 내가 아닌 것조차 나인 것처럼 여기며 살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감정을 내 것처럼 끌어안는 일은, 자신의 삶에서라면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을 몇몇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모든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함을 이에 묶어두려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를 내부 삼으며 자기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은, 우리 세계가 하나의 생태계라는 점에서 환대받지 못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포기해버리면 선택된 것들에 대해 선택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안으로 품는 일이 결코 그런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망치는 일은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중력에 의존하기를 포기하는 일이기만 할 뿐이다. 이때 할복할 마음은, 이성은 바깥을 가리키며 좌표를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감각만으로는 타인이나 세상에 관계를 맺는 일이, 다가서려는 일이 불가하기에 그렇다. 현실의 인상을 갖고서 작업하는 영화들에게선 그런 인상이 항상 우리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펜을 드는 사람은 펜을 휘두르는 일에 신중해야만 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면 어떤 면에서 비평가에게 중요한 건 이름이다. 그 사람이 어느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건 그 사람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름’ 자체이다. 나이, 성별, 국적 같은 게 게임에서 구역이나 지대를 연상시킨다면, ‘이름’은 플레이어의 역량 그 자체이다. 우정은 나누되 자신은 나누지 않는 것, 우리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비로소 ‘나’가 된다. 모든 자신이 예측과 확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거기엔 무한한 가능성에 사로잡힌 ‘나’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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