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 평론가의 비평집을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비평집이기도 했지만, 이런 형태의 비평집이 다소 고전에 가깝다고 느낀 지가 꽤 되었어서 더욱이 생경한 느낌이었다. 한 작품에 대한 글이 연달아서 있고, 이에 부가적으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몇 편 정도 담긴 기획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비평가에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이 사라지는 추세다. 이제 막 데뷔한 평론가를 보면 영화와 미술, 만화나 게임 같은 문화 전반을 어우르는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많다. 확실히 학제 간의 구분이 흐려지는 요즘을 체감하게 되면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한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의 바깥을 빌려오는 일은 합당한 일일까? 돌이켜보면 근래에 읽은 영화 비평 중에서는 영화 안에서만 머무르는 글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례나 매체 등을 빌려오는 경우는 있어도 영화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꾸리는 경우는 잘 없다. 물론 한 편의 영화를 더 깊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려면 다른 도구를 가져와야 할 법도 하다만. 결국 영화에 대한 애정은 영화 안에서만 끝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남다은의 평론집은 2012년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어서 시대가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게 느껴져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남다은은 씨네21에서 전영객잔이라는 기획으로 참여했었고 이 기획은 한 편의 영화를 진중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프론트라인이라는 기획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필진도 바뀌었지만 한 편의 영화는 영화 안에서만 파악해보자는 의도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확실히 영화 자체에 대한 탐구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이전 시대에 비해 더 수월해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술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연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등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이런 건 너무 향수 어린 발언일까? 흔히들 현재가 어려울 때 과거는 도피처가 된다고들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영화가 우리에게 도피처가 되어주는 이유란 자명해 보인다. 영화는 항상 과거였고, 그래서 슬픔이었다. 모두가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영화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람은 보기 어려워졌다. 다들 기업의 신사업부처럼, 영화 하나에 줄곧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만 할 뿐. 영화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것을 지켜보려는 움직임은 많이 사라졌다. 영화이론이 너무 고도화해서 더는 새롭게 내놓을 무언가가 없어서일까? 그럴 수도 있어 보인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재는 프론트라인이다. 영화가 외부이론을 끌고 오는 순간 영화 자체를 구성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타인의 의견으로 대체되면서 이곳에 서사는 사라지고야 만다. 즉, 영화에 외부를 끌어들이는 일은 자신이 최후의 인간으로 서고자 하는 욕망이다. 어쩌면 영화를 공부하는 일은 점점 더 영화에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영화를 의식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의식하면서, 정작 자신이 서 있을 자리는 사라지고야 만다. 한 영화를 세상과 연결하는 일은, 정작 자신의 세상을 외부로 갈음하면서 ‘바깥’을 제거하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가 자신의 삶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런 영화의 내부로 거주할 수는 있다고 믿으면서.
도서관에 가면 분류표를 따라 자신이 원하는 섹션을 찾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레이블 작업은 보존과 정리, 서지 접근의 관점에서 필요한 조처다. 이런 뜻에서는 한 주제를 갖고서 자신이 썼던 글을 발행하는 일이 그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기록물 말이다. 개인적으로 젊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비평글 모음집을 발간하는 일을 선호하지 않게 된 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세대에서, 다시금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세대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역사상 가장 진보했지만, 오랜 시간의 끝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한 시대가 거머쥔 승리가 경쟁자의 제거가 아닌 그라운드의 제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한때 아주 분명하게 자리했던 것들은, 이제 흔적으로만 남아 옛 추억과 영광을 되살리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폐허의 열기를 발견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바깥을 제거하고, 영화야말로 자신이 거주할 장소임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거울 속에 세계란 없다고 배웠지만 그럼에도 영화만큼은 한 가지 입체이자, 내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폐허의 주변을 호시탐탐 노리며 어슬어슬렁대는 것은 젊은 평론가의 시대감각이자 현상에 가까이된지 오래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한 사람의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밀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마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더 나은 미래를 꾀해보려 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오직 다가올 시간만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인해 부인된다. 삶이 계단이라면, 과거는 우리가 미래를 오르는 과정에서 내디딘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밟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서 전했던 말에 보태자면,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내가 영화에 대한 감상집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 영화들 사이를 돌아보는 일은 오히려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시절만을 자극할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한 죽음을 서둘러 추모하고 싶지 않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도리어 그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밀어낸다면 우리가 당장에 설 곳은 사라지고야 만다. 그저 한 편의 영화를 다루는 사람이 부럽기만 하다. 언제든지 영화를 떠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니까.
영화 안에 진득하니 머무르는 일이 싫다거나, 그에 반대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려는 건 아니다. 젊은 비평가들에서 영화 안에 머무르는 일이 지양되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자신의 천함을 대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분산의 시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폐쇄 공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반영한다. 어딘가에 멈춰있으면 혼자만 성장하지 않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수천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면 좋겠노라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근래에 유행하는 멀티버스 같은 게 연상되기도 한다. 최근 마블은 성공적으로 마블을 은퇴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재기용하면서 멀티버스의 페르소나 분산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멀티버스의 대표적인 단점은 죽음의 무게가 줄어듦에 따라 영화가 더는 중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인데, 어쨌거나 죽었던 사람은 살아 돌아와 버렸다. 서사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갖는 감정은 귀신처럼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미 멋지게 퇴장했던 감정이 돌아온다는 것은, 어쩌면 천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2009년에 <아이언맨>을 봤고, 2019년에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마블 영화는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봤다. 하지만 이후로는 개별 영화에 대한 실망과 부침을 겪었고, 이제는 돈 낭비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은 <데드풀>의 3편처럼 보고 싶은 작품이 생기는데, 이게 작품 자체에 관한 니즈인지 아니면 그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향수를 느끼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한 편의 영화를 잘 이해하려면 결국 영화 밖으로 나서야만 하는 이런 상황은, 영화 비평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는 한 세계 안에서 나고 자란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티버스는 많은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닫힌 세계를 더 들여다보려 들지는 않는다. 마치, 한번 보았던 영화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경우 성장하지 않는 건 단지 어른만은 아니다. 이미 죽어버려서, 더는 진행될 구석이 없는 것을 두고서도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다. 즉, 가능성이란 게 완전히 소진되어버려서 앞으로 남은 길은 퇴락인 상태, 이 유예의 지대가 바로 오늘날의 영화다.
영화라는 말에 많은 것이 담겨있어서 반대로 영화를 설명하려면 그 많은 것을 언급해야 한다. 그냥 영화가 재밌을 뿐인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면 이것도 알아야 하고 저것도 알아야 한다. 마치 시상식의 수상 소감처럼, 자신의 감상에 영향을 미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다발로 언급해야 한다. 젊은 비평가에게 한 편의 영화는 하야오의 마지막 영화처럼 무너지는 세계와 그에 대한 비준의 태도에 가깝다. 평소 스스로를 영화 평론가로 여기지 않는 건, 실제로 영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미 그 세계가 무너져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에 담긴 실패의 감정은, 돌아가고 싶더라도 결국은 마음속에 담아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내 일부가 되어버렸으니까. 성장의 거름이 되어, 체성분의 어딘가를 이루고 있으니까. 멀티버스가 갖는 캐릭터 활용의 방안은 결국 무궁무진한 게 아니라 제 곳을 잃어버린 것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세계와 연결되고 싶다는 건,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싫다’는 원초적인 본능을 따라가는 것뿐인 게 아닐까 하고.